초대교회의 예배의 발달에 대한 연구
1.서론
주전 6세기 이래 바벨론, 페르샤, 희랍 그리고 로마의 순으로 이들 모든 나라들이 유대를 지배하였다.이 나라들의 지배는 언제나 종교생활에는 위협을 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주전 4세기에 알렉산더에 의한 팔레스티나 지역을 포함한 근동지역의 희랍화는 팔레스티나에 있는 유대인들의 종교생활에 방해를 주게되었다. 주전 333년 팔레스티나를 지배한 후, 주전 323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게되자 그의 각료들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이 투쟁은 에집트의 프톨레미 왕가와 시리아 안디옥에 근거를 둔 실루커스 왕가 사이의 완충지대를 팔레스티나에 남겨놓게 되었다.1)
희랍화의 본격적인 프로그램은 안디오커스 4세(Epiphanes)에 의하여 이뤄진다.안티오커스 4세는 종교의 획일성과 희랍문화를 통하여 그의 제국의 단결력을 갖추고자 하였다.그래서 주전 176년에 자기자신을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하였다.그는 주전 169년에 예루살렘의 성전 지성소에서 향단, 촛대, 상, 보화들을 거두었으며,군대를 통해 예루살렘 성벽을 헐고, 주택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에 이방인들을 입주시켜 주둔한 관리로 하여금 엄한 통치를 하게하였다.예루살렘 신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었고, 제단에 돼지고기 재물을 올리는가 하면, 유대인의 할례, 안식일, 축제, 성경휴대를 금하고, 왕을 숭배하지 않는 자에게 사형을 집행하였다.2)
이와같은 과격한 조치에 유대인 정통주의자들은 폭력과 폭동으로 맞섰다. 결국 마타티아스라는 사제와 그의 아들들이 안티오커스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혁명이 마카비 혁명이었다.마카비 가족에 의하여 주도된 혁명의 결과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의 독립이 주전 141년 시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마카비 혁명의 세력은 주전 63년 폼페이의 주도아래 로마인들의 출현될 때까지 하스모니아 왕가를 이루게 된다.3)
로마의 파레스틴의 통치는 유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로마는 주전 40년에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였고, 가이사(Caesa)와 안토니(Mark Antony)가 그를 후원하였다.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멸시한 자, 헬라화를 저지한 바리세인들을 고문, 살해한 자등으로 알려져 그가 죽게되었을 때 저항세력들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지방에서, 뵈레아에서, 갈릴리에서, 각각 메시야라고 호칭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독립투쟁이나, 테러행위가 등장하게 된다.이때(주전 4세기) 수리아 총독 바루스(Quinctilius Varus)가 이들중 2,000명의 유대인들을 잡아 예루살렘에 서 십자가에 처형하였다.4)
주전 4년 헤롯의 죽음후에 헤롯의 왕국은 분열되어 그의 아들 아켈레오가 주후 6년까지 유대를, 다른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주후 39년까지 갈릴리를 다스렸다.그리고 필립은 갈릴리와 베다니를 주후 39년까지 다스렸다.그러나 주후 6년에 유대에 문제가 있어서 아켈레오의 영토를 로마가 직접다스리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많은 유대인들이 혁명당으로 들어와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폭동을 일으켰다.그리하여 주후 66년에 로마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폭동이 일어난다.이 유대전쟁은 훈련된 로마제국의 막강한 힘을 제압하지 못하고,로마의 배스파시안(Vespasian)과 디도(Titus)에의하여 주후 70년에 종식되고 말았다. 전쟁으로 예루살렘 도시는 심한 상처를 입었고, 성전전체는 파괴되었다.5)
이같은 연속되는 정치적 참담함 속에서 그들은 무었인가의 철저한 변화를 요청하게 된다.바로 이 사회의 현상은 도래할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이 가득한 상황이었다.6) 이러한 묵시사상이 초대교회의 예배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불문가지이다.
2.초대교회의 예배 발전
신약성서가 보여주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불트만은 그의 책, “초대교회의 정황”에서 그는 기독교의 구약적 유산, 유대교와의 관계를 논의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그가 취한 입장은 기독교가 처음부터 혼합주의 형태에서 파생해 나왔고 유대적 맥락의 밖에서 처음 기독교를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그의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후속 불트만(R. Bultmann) 학파와 현대성서 학계로부터 대폭적 수정을 받고 있다. 사해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기독교 발생당시 유대교자체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났고 이는 불트만의 이론을 수정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8)
예배는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이다. 성경은 예배와 찬양과 감사로 가득 채워진 책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배를 받으셨다. 노래로, 악기로, 희생으로, 간증으로, 기도로…인간이 하나님을 알고나서 부터 예배를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드려졌고, 내면적으로 감정을 통해 또는 외면적으로 소리내어 드려졌다. 살다보면 인간이 예배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존경이나 명예나 칭찬, 인기 등을 통해서 받는 찬양이 얼마나 달콤한지!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경배 받기를 사모한다. 인간의 선과 강함, 하나님을 닮은 모든 훌륭한 점을 찬양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예배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많은 점에서 유대교회의 토대 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복음의 강력한 힘으로 예배 역시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하나님이었지만 구원의 방법과 주시는 은혜는 비교할 수 없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유대교인들처럼 시편을 노래해도 전혀 차원이 다른 감동으로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다 기독교적인 경험을 더해 하나님을 예배하였다.9)
1) 유대교와 예배
초대교회는 유대인의 전통을 거의 다 물려받았다. 하나님과 성경과 절기, 기타 많은 전통이 그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유대교 이상이었다. 마치 폭탄을 물려받았다면, 그것이 폭발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계란과 병아리 같았다. 먼저 번이 잠재력이었다면 나중 것은 힘 그 자체였다.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가 왔지만 기독교인들은 구원의 복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유대 적인 것은 기독교적으로 바뀌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외형상으로 보아 유대인의 성전과 회당에서의 예배는 그대로 기독교의 예배 전통으로 이어졌다. 주께서도 스스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며, 유대교의 전통대로 희생제물을 드리고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하고 병자를 고쳤다. 그는 유대인의 절기들도 그대로 지켜 유월절 음식을 먹었다. 유대인의 예배는 세 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즉 찬양, 기도, 가르침 등이었다.
탈무드에는 “언제나 찬양을 돌리고 그 다음에 기도하라”고 씌여 있는데, 이것이 그대로 초대교회에 전승됐음은 성도들이 모일 때에 ‘찬송시’가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고린도전서 14:26). 유대교에서는 사회자가 목회자로 하여금 예배를 시작하는 찬양을 하게 하였다. 그것은 “찬양받으실 주여! 주는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니이다” 하는 외침과 “주를 영원히 찬양할지어다”라는 응답으로 이어진다. 예배 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축복하심을 알도록 초대된다(느헤미야 9:5 참조).
2) 초대교화와 찬양
유대교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부분은 하나님의 창조 주 되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과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택하신 주여, 찬양을 받으소서!”로 끝마친다. 그리고 즉시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신앙고백이 따르고 인도자의 축도가 첨가된다. “그의 나라의 영광스런 이름을 영원히 찬양할 지어다!”
두 번 째 부분의 공중기도가 그 뒤에 이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고 믿을 만하다는 내용을 회상시킨다. 이 부분에서 목회자는 회중 가운데 한 사람에게 기도를 인도하라고 지적한다. 그 사람은 앞으로 나와 법궤를 향해 서서 기도를 하며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이 부분을 ‘열 여덟 축복’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내용 즉 감사, 찬양, 그리고 영적, 육 적인 요청,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한 간구 등으로 이어진다. 그리고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당신의 나랑 평안을 주소서”로 마친다.
그 다음에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단계가 나타난다. 먼저 회중 가운데 지적 받은 한 사람이 나와서 율법이나 예언서를 읽는다. 그리고는 목회자가 읽은 부분에 관해서 설교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당이나 성전을 ‘가르침의 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은 구약의 찬양은 물론 유대교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초대교회에 전수되었으며, 그러한 찬양은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전통은 대체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계시록의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모세의 노래를 불렀다”등의 내용이 그것을 증거한다. 요한은 이렇게 하여 하늘의 장면을 우리들에게 묘사해주고 있다. 즉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의 나라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같다는 말이다. 10)
끝으로 히브리서 1장 3절의 내용을 보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러한 내용이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에게 붙여진 찬양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과 동체이시고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동의이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부활, 승천 및 임재 하심은 초대교회 에배의 좋은 주제였다.
3.결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새롭게 일어난 것이다. 물론 초대교회 예배내용이나 형식이 단순하고 명료하지만 후에 많이 바뀐다. 그리고 예배형식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명쾌한 복음의 내용 속에 담긴 영적인 감동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변치 말고 가져야 할 예배의 원리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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