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적교회

[스크랩] 다윗의 장막 (여주봉 목사)

어노인팅 2011. 3. 2. 14:46

이 시간 다윗의 장막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에서 1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요즈음 많은 분들이 「다윗의 장막」이라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는 「다윗의 장막」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하루에 24시간씩 매일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줄 압니다. 분당의 어느 가까운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 교회에서는 밤 12시부터 새벽 7시까지 한 주간 내내, 매일같이, 하나님의 부흥과 또 다가오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금 세계적으로도 많은 수는 아니지만 여기저기에서 다윗의 장막이란 말들을 하면서, 하루 24시간, 하나님께 중보기도 드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사역되어지는 특징은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내내 7일동안 끊임없이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사역을 하는 분들은 그것을 「다윗의 장막」이라 말하면서 다윗의 장막이 더 세워지길 기도하고 있고, 또 각 지역에서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중보기도 컨퍼런스 기간동안, 중보기도의 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중보기도 하는 자세와 중보기도의 요소들, 또 그동안 우리를 인도해 오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중보기도를 하게 하셨고, 중보기도를 실제로 배운 작은 부분들을 같이 나눴습니다. 또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근래에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들이 결국 그 일들을 통해 중보기도로 연결되게 하신 부분을 들었습니다. 또 중보기도 시간을 통해 이길수 목사님과 교회를 통해 무엇을 기도하게 하셨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얼마 전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이라고 말하는 그러한 기도를 드려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뜻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이 뭔지도 모르고,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또 지금 우리 상황으로 볼 때 하루 24시간 기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인원도, 또 찬양 팀들도 많이 필요하고, 장소적인 면도 필요하고, 그래서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를 내세우다 보니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는 지난 몇 달 전에 미국 켄사스 시티에서 열리는 세미나를 참석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는 마이클 빅클 목사라고 하는 분이 폴 케인 목사님과 합력하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곳 세미나에 참석하기를 원하셔서 다녀왔는데, 그런데 그곳에서는 다윗의 장막, 또 24시간씩 기도하고 있는 그런 일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사실 그곳에서 열린 세미나는 중보기도 세미나는 아니었음에도 그 부분에 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새물결 훈련원의 이번 학기 강의 중에 중보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 모두가 이러한 부분들을 다같이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윗의 장막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성경은 다윗의 장막이 어떻게 회복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들을 조금씩 배워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도 오늘 설교할 일부분을 바로 지난 주일날 낮예배 시간을 통해 살펴보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통해서 다윗의 장막을 향하신 하나님의 열정을 보게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을 특히 느끼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보여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 저 개인적으로도 이 부분을 조금씩 더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지금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하나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막이 의미하는 그런 기도가 당장 우리 가운데 24시간 드려지지 않는다하더라도 중보기도를 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오늘 살펴 볼 부분으로부터 배울 부분이 많이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 배워가야 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 단체나 각 교회를 세우심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원칙이나 기준을 살펴볼 따름이고, 나머지는 각자가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면서, 성령의 인도에 순종해 가면서, 우리 삶 가운데 배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번 집회를 통해서,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어떻게 인도해 가시고, 교회 가운데 어떻게 세워 가시고,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우리는 다 배워가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배워가다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더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시고, 또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차원에서 다윗의 장막에 대한 기초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기 원합니다.

사도행전 15장 16절은 아모스 9장 11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본문은 말세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세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장막은 무엇일까요? 소위 24시간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소수의 기도처소를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러한 기도처소를 말세에 일으키시겠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만일 아니라면 그럼 다윗의 장막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1. 다윗의 장막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다윗의 장막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뚜렷한 점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장막은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먼저 살펴본 다음 둘째로,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장막이냐 하는 것을 살필 것입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이 다윗의 장막을 세우시는 이유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점을 살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하나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대로 아모스 9장 11절에서 이미 다윗의 장막이 언급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아모스 9장 11절의 말씀을 인용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다윗의 장막을 세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의 장막은 먼저 교회를 가리킵니다. 소위 말하면 24시간 기도하는 어떤 소수의 처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장막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처음 살펴볼 부분은 다윗의 장막은 교회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 주의할 점은 항상 문맥에서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의적으로 한 구절을 뽑아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부분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예언을 중요시 여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언을 중요시 여겨도 당연히 성경을 기초로 해서 중요시 여겨야합니다. 우리가 예언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반드시 예언을 비추는 작업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본문을 그 본문이 들어있는 문맥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받은 체험과 감동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꿰다 맞출 수 있습니다. 어느 구절을 해석할 때 자기가 원하는 여러 구절들을 뽑아서 꿰어 맞출 수 있습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성경은 항상 문맥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15:16의 말씀을 문맥에서 이해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5:16은 야고보 장로가 아모스서의 구절을 인용하여 회중들 앞에서 말한 내용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아모스의 말씀이 인용되었는가 하면, 여러분도 잘 아시는 대로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 회의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의 예루살렘 회의가 무슨 회의였습니까? 당시에는 유대 기독교인들과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의 기독교인들 사이에 복음에 대한 이해를 놓고 서로 이해가 달랐습니다.

유대 기독교인 중에는 바리새인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복음과 관련하여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은혜를 우리가 온전히 받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할례도 아울러 받아야 한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반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과 바나바, 그 외의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있을 수가 없다. 심지어 할례를 받는 것을 그 조건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고, 그것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행위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갈라디아 5장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이 마찰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간에 복음에 대한 이견으로 서로 상충되었습니다. 양측간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회의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는 우리 기독교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복음의 성격에 관한 그 뚜렷한 정의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회의입니다. 이렇게 변론이 있을 때에, 가장 먼저 회중 앞에 나선 사람이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렇게 하게 된 것은 자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신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건이란 하나님이 베드로를 이방인의 집인 고넬료의 집에 인도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서 베드로가 있는 거리 집, 사람 이름, 베드로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려 주시면서 “가서 데려다가 너희가 구원 얻을 말씀을 들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절부터 48절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 ○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 ○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바로 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날 일어서서 그사건을 모두 설명한 다음에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내가 저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않았는데,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저들이 믿음으로 나아올 때,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처럼 저들에게 주셔서,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증명했는데, 우리도 짐지지 못하는 그 짐들을 왜 저들에게 지우려고 하느냐?“ 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라 할 수 있는 야고보 장로가 일어나서 아모스 9장 11절의 말씀을 제시하면서 “보라, 베드로 사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맞다. 말씀에 보아도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리니 이것은 유대인들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다 하나님을 찾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 맞다” 라고 언급하며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보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정확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지니까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은 마침내 이렇게 내려졌습니다. “그렇다, 믿음으로만 구원받게 되는 것이고, 이 구원은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미치게 된다” 이렇게 결론이 내려져서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되는 복음이 오늘날까지 전파되게 된 겁니다. 이게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그래서 이 회의가 중요합니다.

자, 이제 예루살렘회의 때에 야고보 장로가 말한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되 유대인과 이방인을 합하여 한 새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찾게 하시겠다고 하면서 다윗의 장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말세에 다윗의 장막을 세우리라”고 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다윗의 장막은 특별한 소수의 몇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를 다윗의 장막으로 부르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모든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장막이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세 시대의 성막도 있고, 솔로몬의 성전도 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된 후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지은 학개와 스가랴 시대에 지은 성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것이 다윗의 장막이었습니다. 사실 솔로몬의 성전은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그 귀한 백향목 나무에, 모든 기구들이 금으로 쌓여서, 그야말로 화려하고, 웅장하며, 거대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내 세울 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장막은 기껏해야 텐트, 천막입니다. 천막 그게 다윗의 장막이었습니다.

성경에는 모세의 성막도 있고, 특별히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그토록 훌륭한 하나님의 성전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장막을 세우시겠다’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특별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세에 회복될 교회를 말하면서 다윗의 장막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특별한 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윗의 장막에 나오는 핵심 요지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다윗의 장막을 세우시는 이유입니다.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15장 17절입니다.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자, 우선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본문과 성경에 나오는 “주를 찾는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어떨 때에는 똑같은 구절을 읽는데도 그 구절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를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주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를 찾는다’ 하면 어떻게 이해합니까? 우리는 ‘주를 찾는다’고 할 때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사업을 하다가 부도위기에 몰리게 되어 큰 위기를 처했다고 합시다. 이럴 때 사람들은 부도위기에 몰린 사업가에게 “주님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사업가는 타는 가슴을 안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래서 철야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사업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하나님이 안도와 주면 저는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번만 제발 도와주시면 제가 앞으로는 신앙생활 잘 할 것이고, 이번만 제발 도와주시면 여태까지 십일조 헌금하지 않은 것 다 잘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만 제발 도와주시면 제가 성수주일 잘 하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기도하면 더 잘 들어주신다고 하니까 “하나님 이번만 제발 들어 주시면 제가 십일조 드리고, 또 다른 십일조는 반드시 선교헌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하고 간구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면, 우리는 그것을 ‘주는 찾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주를 찾는다’라고 하는 말씀을 그런 의미로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를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 부분이 핵심은 아니기 때문에 제가 그냥 언급하고 넘어갑니다만 성경에서 말하는 ‘주를 찾는다’는 말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약에 나오건 구약에 나오건 성경에서 말하는 주를 찾는다는 말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자기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그 분을 구하는 것을 주를 찾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 말한 그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다급하면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그것을 찾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매달리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주를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주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내가 당면한 문제에서 도움을 받는 길도,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경우에 흔히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을 쓰면서 자기의 당면한 문제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건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데에는 하나님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이제 교회를 그만 다닌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를 자주 빠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당연히 하나님을 떠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떠난 징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내 중심에서부터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마음에서부터 일어납니다. 내가 아무리 주일날 교회에 열심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한번도 때먹지 않고, 누구보다 봉사를 열심히 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내 삶에 차지하는 것이,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고 나의 전부며, 그래서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와 목적이 인격체이신 주님을 알기를 구하고, 내 모든 것으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주님과의 그러한 관계 가운데 있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있는 것입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절대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헌금하고 기도하고 봉사해도 친밀함이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기복신앙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복을 많이 강조한다고해서 그것이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기복신앙은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삶을 말합니다. 결국 자기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 그것이 영생일수도 있고, 그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 자식들 잘 되는 것, 사업 잘되는 것, 세상의 평강과 안전, 마음의 평안, 가정의 행복, 여러 가지 일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지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즉 하나님이 바로 그것을 위해서 존재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많은 헌금도 드리고, 많은 봉사도 하고, 많은 헌신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지는 삶이고, 하나님은 수단이 되어지는 삶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목적을 하나님께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열심히 봉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그것이 거짓신앙 체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이 열심히 봉사하고, 설령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신앙 체계에서는 절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중보기도에 있어서 가장 핵심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성령께 민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도 알게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중보기도도 할 수 있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어야 중보기도가 지탱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급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나오는 것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왜요? 발등에 불 떨어졌으니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면 거의 안나올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 이번 기회에 중보기도에 관해 많이 들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시다. “앞으로는 내가 중보기도 해야지.” 여러분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중보기도를 시작한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의중과 중보기도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통해서 그러한 것들을 알며, 그 앞에 엎드리지 않으면 오래 못 갑니다. 일주, 이주, 한 달, 두 달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로 안나처럼 80년 갈 수는 없습니다. 3년, 4년, 10년, 20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삶에서는 절대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제가 매일 이야기하는 것이 그 이야기입니다. 쉽게 비유를 들기 위해서 재벌의 외동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한 남자가 있다고 합시다.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재벌 외동 딸에게 매어 달립니다. 자기의 집까지 팔아서 잘해줍니다. 그 아가씨가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다 조사해서 자기의 모든 것으로 가져다가 잘해줍니다. 자기의 간까지 내어줄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남자가 중심에 원하는 것은 그 재벌의 외동딸과 결혼해서 얻어질 부와 명예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투자하는 겁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해도, 나눠진 마음은 사랑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원하는 바가 목적이 되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수단이 되어지는 삶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자신의 목적이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십니다.

이러한 점은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역’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면 우리가 일하는 것은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니까. ‘주를 위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며 사역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아무리 주를 위해 일하고, 헌신하고, 봉사해도,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 분이 내 삶의 모든 것이 되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전혀 하나님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개인적으로 바꿔 가신 첫 단추가 있었습니다. 저도 과거에 나름대로 열심히 목회를 했었습니다. 나름대로 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첫 단추가 그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인간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모든 노력을 내려놓았습니다. 제가 전한다고 한 하나님, 그분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분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소위 목회에 매달려 있었던 부분을 다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저 나름대로 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저와 연결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성장이 안되면 제 명예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례비를 많이 요구하지 않았지만, 제가 명예와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제 체면, 제 명예와 이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모이냐고 하면 낙심되어집니다. 그것이 저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김영식 목사님을 예로 들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개척합니까? 젊음과 전 재산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김목사님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교회 이제 내게 양도해” 하시더랍니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니까 다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김목사님은 이제부터 아무 일도 안 하고 손을 놓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만져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시기 위해서 심부름시키는 일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께 섬기는 마음으로, 그전에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교회를 세우는데, 우리는 교회가 우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김영식목사님의 경우 그렇게 주님 앞에 내려놓고 나니까 그때에서야 비로소 주님을 전 존재로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선명하게 깨달아지더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드리는가 하면, 특별히 목회자들 같은 경우에는 교회일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천리만리 떠나있으면서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자세히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따라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잘 따라가면 돈을 많이 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복신앙과 탐심이 빚어낸 거짓신앙 체계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억압이 있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교회생활을 더 이상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봉사를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있다는 말은 금방도 말씀드린 대로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는, 그래서 여러분이 전 존재로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주님만이 유일한 피난처시오, 우리의 도움되시며 힘이 되시는 마음과 삶의 자세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저는 똑같은 예화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안 들으신 분이 한 분이라도 있으면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모습에서 좋은 선생님과 나쁜 선생님의 차이를 보곤 합니다. 서울에서 살 때였습니다. 당시 우리 가정이 살던 동네는 부촌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5학년에서 6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 동안 학원에서 미리 다 배우고 학년을 올라갑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게 합니다. 하여튼 엄마들의 극성으로 대부분 다 배워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우리 집 아이들은 그러질 못했습니다. 여러분, 좋은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이신 줄 아십니까? 개인적으로, 어떤 분을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중에 학습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소수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서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선생님입니다. 비록, 다른 아이들은 학원에서 미리 배워 다 알지 몰라도, 원래 안 배운 학생들이 정상 코스니까 모르는 아이들이 한 두 명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위해서 차근차근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제가 보기에는 좋은 선생님입니다. 그러면 나쁜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인가 하면, 학습도중, 아이들에게 질문해보고 대강 아는 것 같으면 적당히 그냥 넘어가는 선생님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직무를 다 못하는 것입니다. 저희 아이들 같은 경우를 보면,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날 경우에는 배웁니다. 그런데 나쁜 선생님을 만나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학교에서 배워오는 게 없습니다. 학년은 지나가는데 배우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나쁜 선생님입니다. 나쁜 선생이지요. 자기 직무를 다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쁜 선생이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뭐라고 말하든지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안 들었으면 그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면 합니다. 아멘, 제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하루는 제 아내가 시장에 가려고 하는데 만원짜리 한 장도 없더랍니다. 주머니에는 천 원짜리 몇 개만이 있더랍니다. 그래서인지 몸에 힘이 쫙 빠지더랍니다. 몇 년 전 이야기입니다. 물론 그 때나 지금이나 저희는 하나님이 채우십니다. 그런대도, 아내는 힘이 쫙 빠져서 교회에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또렷하게 아내에게 그러시더랍니다. “너는 나만이 너의 힘이라며?”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아내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어요.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회개했답니다. 제가 하나님만이 저의 힘이라고 했는데, 제가 돈의 있고없음으로 인해 힘이 빠졌고 낙심한 것을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회개했더니 그 다음부터는 돈의 과다에서 절대로 힘이 빠지지 않는 답니다.

다윗의 고백 중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집안에 이 구절이 쓰여진 액자를 벽에 걸어놓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여호와가 힘이십니까? 우리는 이 구절을 읽을 때, 당연히 여호와가 우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는 주님이 부분적으로 힘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한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이 한 말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시려면, 하나님 그 분만이 여러분의 힘이 되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입으로 아무리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라고 말해도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돈이 많이 있을 때, 여러분의 목에 힘이 들어가고,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돈이 적을 때 여러분의 힘이 빠지면 여러분에게는 전혀 하나님이 힘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성경에 말하는 대로 성경구절들을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너무나 우리 생각대로 이해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전 군대를 동원했을 때, 다윗의 고백이 바로 그 고백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금 같으면 우리나라 최고 통치권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중앙 정보부, 군 정보부, 검찰, 경찰, 군, 관 다 동원해서 저를 잡아서 죽이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살아 남겠습니까? 이 나라가 지금은 민주 사회이니까 좀 덜 그러겠지만, 그 당시 사울이 다윗을 잡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입니다. 그 때에 다윗이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고백한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천인이 내 우편에서, 만인이 내 좌편에서 쓰러질 지라도”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 말은 하나님 그 분만이 자기의 유일한 힘이라는 말입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아니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목회자라도, 아무리 여러분이 장로님이고, 아무리 여러분이 권사님이고, 아무리 여러분이 그야 말로 교회에서 인정받는 따봉 집사님이고, 아무리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아무리 나름대로 헌금 많이 해도, 다른 것이 목적이 되어지고,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지는 기복신앙은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인격체이신 하나님 그 분만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지 않으면 전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 삶 속에 억압이 있습니다.

문제가 왜 발생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생기는 겁니다. 예레미야 2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두 가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며, 둘째는 “다른 물을 가두지 못할 다른 웅덩이를 판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혹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배도 안 드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예레미야 6장에 보시면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바(에디오피아)에서 나오는 특별한 향유를 사다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당시에는 시바가 부강한 나라였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지도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에디오피아를 가려면 사막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바에까지 가서 거기에서 나오는 특별한 향유를 사다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 6장의 이 말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교회가 새롭게 예배당을 짓고나니까 본당에 맞는 샹들리에(조명등)를 사러 프랑스까지 가서, 그것도 한 회사의 사장님인 장로님이 회사가 바쁜데도 불구하고 본당을 꾸미기 위해 일부러 휴가를 내서 프랑스 파리의 제일 좋은 샹들리에 전문점에 가서 2억 짜리 샹들리에를 주문하고 비행기로 공수해서 새로 지은 본당에 달아 놓은 것과 똑같습니다. 예레메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주님을 섬긴 자들입니다. 그들을 두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터진 웅덩이를 판 것이 너희 죄”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도 안 드리고, 율법도 안 지키고, 제사도 안 드린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읽어야 됩니다. 우리가 생각한대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이사야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사야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분이 가득 찼으면 자기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희는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 그러셨겠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 당시 유대 백성들은 그것을 알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를 거짓선지자라고 몰아붙여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그들이 왜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는가 하면 이사야 1장에 나오듯이 그들은 그야말로 많은 예배를 드렸고, 많은 헌금을 드렸고, 그들은 많이 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많이 헌금을 하엿고, 누구보다도 많이 봉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향해서 소돔의 관원이니 고모라의 백성이니 그러시는데 알아들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토록 열심히 기도하고, 많은 헌금을 하고, 그토록 예배에 열심히 참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또 너희의 제물이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며 너희의 제사는 내 마당만 밟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그랬겠습니까?

실제로, 예레미야 시대나 오늘날이나 똑같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이 봉사하고, 아무리 많은 헌금을 했어도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가 중요합니다. 그게 아무리 많아도, 그 모든 것은 원래 신앙의 본질을 담게 되어있는데, 의식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자기의 모든 것이 되어 지는 것, 그게 없으면 그게 하나님을 버린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버리면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수단이 된 삶이고, 그 속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터진 웅덩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이유가 세상의 출세가 될 수 있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는 것도 될 수 있고, 사업의 성공이 될 수 있고, 돈도 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게 아니라 그것을 섬기는 것일뿐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에레미야나 이사야 당신의 백성들처럼 ‘일정 수준의 삶’을 영위하려고 합니다. 즉 그들이 기대하고 요구하는 세상에서의 일정 수준에서의 삶, 그것을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겁니다. 이것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면 문제는 시작됩니다.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지는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데, 여기서부터 떠나면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면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예배가 형식적인 예배로 흐릅니다. 또 전통적인 신앙은 하나님을 대체하는 우상에 불과한데, 그것이 곧 터진 샘물인데, 그렇게되면 우리는 삶 속에서 죄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이기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해도 선별적으로 밖에 하지 않게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순종하고, 자기가 부담되는 것은 넘어가게됩니다. 이러한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억압이 있게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열리지 않고, 하나님의 실제는 경험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셔서, 하나님께로 부르시기 위해서, 때로는 태를 막으시고 코너로 몰아넣으십니다.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은 안하고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그럽니다.

이제 보이십니까? 그게 얼마나 타락한 신앙인가를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그러한 상황일 때, 인격체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의도하시고, 구원하신 그 삶이란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한 가운데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들에게 흐를 수 있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을 위해 간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구하십시오. 그것을 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하세요.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하나님을 찾아 나와야지, 그것은 놔두고 자기가 필요해서 하나님의 도움만 구하러 나아오는 것, 이것은 너무나 너무나 타락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을 찾는 모든 구절들을 가져와 보십시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2. 왜 하필 다윗의 장막인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회복시키실 다윗의 장막이란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의 장막을 통해 유대인의 남은 자들과 이방인,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들을 모아 한 교회가 되게하여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그렇다면 왜 하필 다윗의 장막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자! 왜 하필이면 다윗의 장막일까요? 이 질문은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다윗의 장막의 중요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담긴 중요한 네 가지 특별한 면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입니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과 갚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께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의 장막을 특별히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면 어떠한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까? 다윗의 장막은 아시다시피 천막이었는데, 거기에 언약궤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장막은 모세의 회막이나 솔로몬의 성전과 다른 점이 있는데, 다윗의 장막에는 언약궤 앞을 가리우는 휘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 점이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언약궤가 노출되어 있는 것만 가지고 중요한가? 물론 아닙니다.

지난 주일날 오전에 다윗의 장막을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참 재미있기도 하고 귀합니다. 주일날 아침에 저희 어머님이 새벽기도를 다녀오신 다음 제게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시편 26편과 27편을 여목사에게 읽으라고 하라”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에게 또렷한 감동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26편과 27편을 말입니다. 감동을 있은 후 어머님도 읽어봤는데 왜 그 말씀을 주신 것인지 잘 모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시편 26편과 27편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를 읽다 보니까 다윗의 장막을 향한 하나님 열망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선 시편 26편 8절을 한번 보십시오. 시편 26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본문의 ‘집’은 ‘다윗의 장막’을 가리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

자 보십시오. 다윗의 장막에 무엇이 머물고 계시나요? 본문은 “주의 영광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27편 4절도 보십시오. 이 시편을 보면 다윗의 신앙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본문을 잘 보십시오. 다윗은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윗이 구했던 많은 일 중에 첫 번째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이 여호와께 구했던 단 한가지의 일이었습니다. 한가지 일을 영어 성경에서 보면 “one thing I ask of the LORD” 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한가지 일을 내가 주님께 구한다. 그런 다음, “this is what l seek” 즉, 이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여호와께 구한 한 가지입니다. 많은 것 중에 첫 번째가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입니다.

그 한가지가 뭡니까? “that l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번역하면, 내 생애의 모든 날 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즉,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주목하여 본다. 여기에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gaze upon”한다고 그랬습니다. ‘gaze’란 말은 ‘이렇게 주시하여 본다’, ‘주목하여 본다. 쳐다 본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내 일생동안 모든 날들을,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자기가 원하는 한가지를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주시하여 보고, 그 다음에 보면,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그분의 전에서 그 분을 찾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전이란 성전입니다. 그분의 전에서 “seek him”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다윗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다윗이건 바울이건 똑같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그분 자신이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바울도 그랬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그분을 알고, 그 아름다움을 보고, 그 분을 찾는 것, 그게 그의 삶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휘장이 가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나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올 때 얼마나 기뻤던지 춤을 추다가 계집종들 앞에서 바지가 벗겨졌던 사건을 말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개의치 않고 춤을 췄습니다.

우리 아까 찬양과 경배시간에 춤추고 싶은 사람들 춤추러 나오라고 하니까 별로 안 나왔는데,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길수 목사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문화적인 것을 끊으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공자가 죽어야 우리나라가 산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맞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습니다. 유교 문화에서는 사람들에게 체면을 내세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부분이 우리의 삶에 찌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춤추러 사람들 앞에 나가는 게 멋적을 수 있어요. 다른 사람 앞에서 춤춘다는게 쑥스럽기도 하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체면이 있지”하며 나가기 쉽지 않아요. 이런 생각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나요?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있으면서도 억제하니까 못 나오는 겁니다. 나오라고 했어도 아까 몇 사람 못 나왔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다윗은 왕입니다. 왕이 신하들 앞에서 춤춘 것입니다. 장군들 앞에서 체면이 있지, 아니 장관들뿐만 아니라 시녀들도 있고, 내시도 있고, 궁녀들도 있는데 그들 앞에서 체면이 있지... 그러나 그는 춤을 췄습니다. 아니 어디라고 춤을 춥니까? 어떻게 왕이 많은 신하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습니까? 그런데 춤을 추는 것까지도 좋아요. 나중에는 바지까지 벗겨졌습니다.

그러면 보십시오. 다윗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춤을 추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언약궤가 오니까요. 언약궤가 오는 것이 무엇이 그리 좋아서 춤을 추었을까요? 우선,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 언약궤가 오면 복을 받을 거니까” 이것은 아닙니다. 아마 복 좋아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당시 이미 받을 복은 거의 다 받았던 터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창고에는 금 덩어리가 차고도 넘쳤습니다. 그렇다면 언약궤, 그것이 뭐길래, 다윗이 왜 그토록 춤을 추며 감사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임재의 상징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장막을 기뻐하셨을까?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메모리' (memory)가 있었어요. 기억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기억인 줄 아십니까? 다윗이 그토록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 분의 얼굴을 구한 것입니다. 언약궤가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임재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윗의 장막에서는 열려 있었습니다. 신약시대도 아닌 구약시대에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하나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언약궤가 왔을 때 그는 그렇게 기뻐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에는 하루종일 곧 24시간씩, 일주일내내 7일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과 제사 드리는 자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다윗의 장막에는 다른 장막에는 없는 소중한 메모리(memory, 기억)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기억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때는 맛보기를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그 맛보기 하나 하나가 참 중요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맛보기 차원이 아니고 계속 유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맛보기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한번은 강단 앞에 엎드려 중보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의중에 있는 것들을 구하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넌 내 꺼야.” 그때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이랬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사역도 아니고 헌신도 아니고 봉사도 아닙니다. 물론 그걸 순종 안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것으로 기뻐하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도 기뻐하시며 그것으로 만족하신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것이면 더 바랄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보다 더 원하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나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사역이란 바로 그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역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그저 주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아버지 되시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이기에 아버지가 행하시는 대로 내가 순종해 나갈 때,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 사역입니다. 이렇게 순종함에 있어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다른 모든 목사들보다 더 많이 수고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또 바울처럼 태장으로 맞기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닙니다. 일을 위해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금 말씀드린 대로 “넌 내 꺼야” 그 자리로 부르셨습니다.

지금 여기 다윗이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주시하여 보고 그것으로 인해서 진실로 기뻐하며 감격하며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그것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가운데서 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누구보다 더 바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사역은 항상 그 자리에서 나옵니다. 주님과 친밀한 관계에서 나옵니다. 사역은 절대로 우리의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장막을 소중히 여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다윗의 장막을 소중히 여기시는가 하면,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러한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회복을 말씀하면서 다윗의 장막을 세우신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그 많은 장막 중에 다윗의 장막인가 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그 엄청난 위대한 건물도 있고, 그 많은 금 덩어리도 있고, 그야말로 웅장한 건물, 사람들의 보기에도 그야말로 위대한 신의 신전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그 엄청난 성전, 그러한 것이 많은데, 왜 그 좋은 솔로몬의 성전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그 텐트 하나 밖에 없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는데, 왜 하필이면 교회를 세우시면서 다윗의 장막을 세우겠다고 그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가장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듯이 이렇게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를 원하십니다.

자! 그러면 보십시오. 우리 삶이 그래야 됩니다. 첫째는 우리 삶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우리 삶이 그러지 않으면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여러분 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삶이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뜰만 밟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그럴 뿐만 아니라. 예배가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장막이 그렇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이렇게 삶이 그럴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증보기도로 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보기도로 나갈 때에도, 중보기도하러는 오지 마십시오. 그것이 무슨 말인가하면, 중보기도 하면서 나라와 민족, 회개, 그곳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라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하러 나오십시오.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분을 찾고,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바라보며, 주시하며, 기뻐하며, 감격하기 위해서 나오시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기도를 가르치실 때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하기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인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제가 경배와 찬양을 하는데,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심이 선명히 비춰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도움이 되었고, 제가 혼자 객지에 있을 때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날 경배와 찬양을 할 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분이 저희 아버지 되심이 선명히 비춰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침대에서 일어나서 내가 “아버지” 라고 그 한마디 불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방안에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맛보기입니다. 아, 항상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그분이 저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에 제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 나아가는 것은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 모두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많이 일했기 때문에 그분이 저에게 오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 되시기 때문에 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행하심을 보고 순종하는 것이고, 우리가 더 많은 것을 드려서라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봉사했기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응답도 마차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버지” 라고 한마디 불렀는데, 하나님의 임재가 방안 가득합니다.

그런데 제가 맛보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나 저의 기도가 어떻게 드려져야 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 돈주세요,”부터 하지말고 “하나님 부도나요.” 이런 기도 다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 다 아시고 계십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 교회가 큰일나게 생겼습니다.”이것도 내려놓읍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모든 것 다 놓아두고 먼저 나가야 할 곳은 “아버지” 라고 부르면 하나님의 임재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다시 말하면 주님과의 교제가운데,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시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 되심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인 기도생활에서도 찬양과 경배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이 데이트로서의 기도입니다. 데이트로서의 기도. 저는 남자라서 데이트로서의 기도를 잘 못 하는데, 제 아내는 참 잘합니다. 어떨 때에는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다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저는 저쪽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제 아내는 이쪽에서 지금 찬양만 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아버지” 부르다가, 울다가, 또 찬양하다 합니다. 반면 저는 한참 기도한 후 기도를 마치면 아내에게 “이제 집에 가자”고 그럽니다. 그러면 제 아내는 “나는 아직 기도를 시작도 안 했는데...” 대답합니다. 그러면 저는 아내에게 “아니, 여태까지 기도도 안하고 뭘했어?” 반문합니다. 사실은 아내가 옳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비즈니스(business, 사업) 회담하는 것처럼 나아가곤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하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여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삶을 돌이켰고, 하나님이 목적이고, 그 부분이 삶 속에 유일한 목표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저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수단이 되는 삶은 구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기도할 때, 비지니스 회담하는 것처럼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것이지요. “하나님, 저 이것이 필요하고, 또 이렇게 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이것저것 의제를 하나님 앞에다가 딱딱 꺼내는 것입니다. 상담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데이트 식으로 해야 됩니다. 데이트 할 때 그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아, 오랜 만에 만났어요.”말한 후, 그동안 보고싶어 혼났는데 만나자마자 “우리 30분 시간 있는데... 지금부터 토의할 내용이 세 가지니까... 지금부터 하나씩 10분씩 토의합시다.”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도를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하십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당연히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기도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면 안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해서 하나님이 목적이 된 다음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올 때, 우리는 비지니스 회담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 아시나요?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안건 1, 안건 2, 안건 3, 안건 4,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기도들릴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너무 하지요?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에나, 중보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찬양과 경배가 중요한 것은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데이트하러 왔으니까요.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을 기억하고, 그 분과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 그 분의 사랑을 고백하고, 그 가운데 나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가면 기도는 하나님이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보기도로 나올 때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셔야 합니다. 다윗의 장막이 뭡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많은 찬양과 경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개인적인 기도도 마찬가지지만 중보기도도 그렇게 주님 얼굴을 구하여 나오셔야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계시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아까 보았던 말씀처럼,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라고 했는데 즉 “주님의 아름다움을 주시하여 보며.”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찬양 드릴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 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십니다.

성경을 몇 구절 보겠습니다. 이사야서 62장 2절부터 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중보기도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입니다.

열방이 네 공의를, 열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 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2절의 “열방이 내 공의를 열 왕이 다 내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컫는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이 말씀은 어제 낮시간 사역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특별히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 같습니다. 참석하신 목사님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이 구절들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또 한 두절만 더 보겠습니다. 역대상 16장 10절 보십시오. 다윗이 언약궤를 옮겨와서 들여놓을 때한 노래 내용입니다.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여기서 “여호와를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도 보십시오 하나님을 구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 이것을 히브리문법에서 표현법상 2분법, 또는 평행법이라고 부릅니다. 즉 두 개가 똑같은 의미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들에게 즐거움이 주어질 거라고 말합니다.

또 역대상 16장 27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을 보십시오.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그 처소에 있도다 ○ 만방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왜 거기에 즐거움의 요소가 있는 줄 아십니까? 왜 기쁨의 요소가 있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 임재 가운데서 주님의 그 신실함과 주님의 사랑, 그리고 주님의 마음,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보호, 주님의 은혜 등 이러한 부분들이 여러분에게 계시되기 시작할 때, 물론 이 땅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밖에는 계시되지 않지만, 그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장막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이 땅의 천 날보다 기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교회에서 하루 안내서는 것이 세상의 천 날보다 기쁨니까? 솔직히 말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진실이 담기지 않은 채, 말로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당연히 기쁘지요. 그런데 제 말은 주일 날 교회가는 것 그거말고 진실로 교회 문 앞에서 안내를 서는 것이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기쁜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 말만합니다. 사실은 아니면서도 그런 척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을 보면 예배당 문 앞에 서서 안내를 서는 정도가 아니라 예배도중에도 한 시간을 못 참고 주리를 틀고 있다가 한 시간 지나면 밖으로 나가버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스운 애기지만 텔레비전 앞에서는 세 시간, 네 시간씩 버티면서 말입니다. 제가 너무 과 장했나요? 그렇게 말했다면 죄송합니다. 물론 모든 성도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야구장에 가서는 9회 말까지 세 시간, 네 시간까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예배당에서는 한 시간 앉아 있으면서도 주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여호와의 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세상의 천 날보다 기쁜가요? 아닙니다.

그럼 여호와의 전에 있는 것이 세상에서 좋은 것 취하면서 천일을 사는 것보다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기쁜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그렇게 될까요? 여호와의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아름다움 앞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 세상의 천 날보다 기쁨니다. 하루 정도가 아니라 한 시간만 머물러 있어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경배와 찬양을 통해서 많은 기쁨의 요소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번 집회와 오늘 찬양을 기억해 보십시오. 오늘 찬양 드린 내용이 간단한 내용들입니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자에게’,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간단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찬양할 때 입으로만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 내용들이 간단한 내용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조롱해도’,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어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실로 대단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대단히 찬양을 잘 하시더군요. 하나 물을께요. 여러분들 진심으로 찬양을 하셨지요?

찬양 가운데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왜 기쁨이 있는 줄 아십니까? 주님의 임재 가운데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님의 영광, 주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계시될 때, 거기에는 기쁨의 요소가 있습니다. 중보기도 가운데 그러한 기쁨이 놀라웁게 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길수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인도해 가시는 과정 속에, 또 기도를 더 새롭게 배워가면서 왜 이렇게 기쁜지 모르겠다고, 중보 시간이 그 어떤 시간보다 기다려진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계시해주시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주님을 섬김이 기쁨입니다.

2] 두 번째 찬양과 경배가 같이 갑니다.

둘째로, 그 당시 다윗의 장막에서 드려지는 중보기도에는 예배가 드려지되, 하나님께 24시간 동안 드려졌다는 겁니다. 그중 으뜸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스스로가 그리했습니다. 또한 예배할 사람들을 세워서 그리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예배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예배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그때 기쁨의 요소가 부어집니다.

다윗의 장막과 관련해서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찬양과 경배가 같이 갑니다. 찬양과 경배와 중보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에 있어서도 찬양과 경배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아까 찬양과 경배를 약 45분 드린 것 같은데, 얼마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까. 계속 더 하고 싶었습니다. 45분이나 찬양하면서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께 우리 마음에서부터 찬사를 드리며, 그분을 사모하며,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가운데, 그분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느껴지고, 임재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기쁨이 있고, 그래서 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중보기도가 찬양과 경배와 같이 갑니다. 같이 어울어집니다.

다윗의 장막이 그랬습니다. 역대상 16장에 보시면, 다윗의 장막 안에 언약궤가 들어온 다음 다윗이 행동한 내용이 나옵니다. 4절입니다.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으니

다윗의 장막에서는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장막 안에서 24간 동안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여러 가지 악기들을 동원해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의 장막에서 나오는 예배와 기도는 하늘나라에서 드리는 예배와 기도가 연결됩니다. 똑 같습니다. 다윗의 장막이 한편으로 보면 하늘나라의 예배의 모델 하우스(model house) 입니다. 이 땅의 성전은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우리말로는 그림자입니다. 37절부터 40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대상 ○ 오벧에돔과 그 형제 육십 팔인과 여두둔의 아들 오벧에돔과 호사로 문지기를 삼았고 ○ 제사장 사독과 그 형제 제사장들로 기브온 산당에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 항상 조석으로 번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게 하였고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들을 세워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고 또 번제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번제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기도를 가리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 다윗의 장막에 드려지는 기도와 하늘나라의 보좌에서 드려지는 기도가 연결되어집니다. 요한계시록 4장과 5장을 보면 하늘나라의 예배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5장 8절부터 14절입니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하더라 ○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여러분, 이것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거기에 보면 하나님 보좌가 있고, 스랍들이 있는데, 스랍들의 온 몸이 눈입니다. 다 눈으로 덮여있어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이 얼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 여기도 저기도 있습니다. 껌뻑 껌뻑, 여기도 껌뻑 껌뻑, 날개에도 껌뻑 껌뻑... 어떻게 보면 괴물 갖습니다.

그리고,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스랍들이 찬양하면 장로들이 보좌에 앉아 있다가 금방 일어서서 머리에 쓰고 있던 면류관을 그 보좌 앞에 던지고 엎드려서 찬양합니다. 그리고 찬양이 끝나면 엎드린 자세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조금 후에 스랍들이 또 찬양을 시작합니다. 그러면 장로들 역시 일어나서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고 다시 엎드려서 찬양합니다. 그러다가 또 한참 찬양하다 일어나서 면류관을 주어서 다시 쓰고 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또 조금 있다 시작합니다.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야, 이거 참 지겹지도 않나, 하루종일 매번 일어나서 똑 같이 엎드리고... 힘들지도 않나” 이렇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줄 아십니까? 아까 말씁드린대로 다윗의 장막에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계시되었습니다. 거기 여호와의 영광이 머물러 계셨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는 우리가 보긴 보아도 부분적으로 밖에는 못 봅니다. 그런데 스랍들과 장로들은 지금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뵙고 있습니다. 그 영광, 그 아름다우심, 그 사랑, 그 긍휼, 그 신실하심, 그러니 찬양이 저절로 안 나오겠습니까? 이러한 기쁨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배하면서 느끼는 기쁨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중심으로부터 진실로 경배하기 원할 것입니다. 스랍들의 몸에는 왜 눈이 그토록 많을까요? 그렇게 주님을 가까이서 뵈오니 영적인 분별력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영적인 분별력을 가리키는 눈.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상징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십시오. 24 장로들의 두 손에 들려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5장 8절을 보십시오.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은 양 손에 거문고와 금대접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대접에는 향이 가득합니다.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장면은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가 같이 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거문고는 ‘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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