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기도의 이해를 위하여 개신교 용어와 교리
그리고 경험에 따라 재편집한 것이다.
목 차
1. 왜 관상기도를 할 수 없는가? 1
2. 관상의 의미와 특성 3
3. 관상기도를 하려면 6
4. 관상기도의 기초 7
1). 관상과 성령 7
2). 죄에서의 해방 8
3). 하나님께 대한 신뢰 9
5. 죄와 고백 그리고 성숙 10
1). 인간의 죄와 거짓 자아 10
2). 바울의 고백 11
3). 인격의 성숙 12
6. 이성과 관상 13
7. 기도의 체험 14
8. 분심과 집중 그리고 잠듦 15
9. 관상으로 이루는 것 17
10. 올바른 이해 17
11. 관상의 실제와 방법 19
1).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19
2). 정감적(능동적) 기도 19
3). 무지의 구름 20
4). 향심기도 20
5).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21
6). 기타의 기도들 24
12. 관상으로의 초대 24
13. 몇 가지 권고 26
1. 왜 관상기도를 할 수 없는가?
토마스 키팅은 "관상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관상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누구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하고,
또 그리스도인 으로서 높은 단계의 기도라고 말하는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 그리도 적은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관상기도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관상기도자(신비가)들이 있었고, 또 그분들의 글이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분들의 글들과 가르침들은 아주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어 가르침을 받거나 읽는 사람들이 잘 이해하기 어렵다. 그 체험은 실제로 어느 정도 체험을 한 사람만이 어렴풋하게 알아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신비가들의 가르침을 책으로 읽어서 어떻게 기도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관상을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 현재 관상기도를 소개하는 책자의 설명들은 많은 경우 추상적이며 관념적이다. 또 어떤 책은 관상기도를 실제로 수련하기 어려운 기도처럼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도 바로 관상기도를 시작하기 어렵다.
둘째, 관상기도자(신비가)들의 대부분의 가르침은 그 표현이 어려워 알아들을 수 없다.
그분들의 관상기도의 수련을 통하여 얻어진 심오한 체험과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 많은 경우 현대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관상기도를 애매한 기도로 여겨 왔던 것이다.
셋째, 관상기도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했던 점이다.
관상기도란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총이며 관상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봉쇄수도원에 들어가서 아주 심한 극기와 절제와 자기부정을 해야만 한다고 믿어 왔다. 지금도 사회생활로 바쁘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나 성직자, 활동적인 수도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기도라고 여기는 풍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평신도가 관상기도를 하는 것은 겸손하지 않은 태도에서 온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관상기도는 아주 소수의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만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평신도들이 잘못하면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진다고 생각했고 아직도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넷째, 종교개혁 이후 수세기 동안 신비가의 글이나 행동이 금기시 했다.
종교개혁 이후 지난 수세기 동안에 모든 것을 분석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대두되고, 또 종교간의 갈등으로 종교재판이 성행할 때에 이러한 신비가의 글이나 행동은 금기시되기까지 했다. 심지어 신학교에서도 영성신학의 역사와 영성에 대해서는 가르치면서도 관상기도 수련은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섯째, 현대교회가 정감저긱도와 헌신의 기도 같은 정신기도 위주로 해 왔다.
현대사회가 인간의 이성(理性 reason)을 극도로 신봉하면서 이성으로 하는 기도, 즉 정신기도(mentalprayer)가 세분화되고 발전되면서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평신도들은 정감적 기도와 헌신의 기도와 같은 정신기도 위주로 해 오고 있다. 말로 하는 기도, 입술을 움직여야 기도한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대중에게 있어 온 것이다. 심지어 관상을 목표로 시작하는 이냐시오 영성수련도 구조적인 논리적 묵상(structured discursive
meditation)으로 끝내 버리는 경향이 있을 정도 토마스 키딩 마음을 열고 가슴을 열고, 엄무광 (서울 카톨릭 출판사, 1998) p. 39
라고 토마스 키팅은 말한다.
여섯째, 지금까지 관상기도의 방법들이 수련하기 쉽도록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의 관상기도 방법들이 제시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기도를 수련하기 쉽도록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았다. 고대 동방의 교부들이 '되풀이하는 기도' (예를 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나 「무지의 구름」 등으로 방법을 제시하긴 했지만 그 방법이 아주 단순한데 비하여 대중들이 기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에 대한 개념적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또한 방법이 제시되었다고 해도 스스로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기도인 것처럼 가르치는 경향이 있었다.
관상기도는 원래 우리의 힘으로 성취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이기에 관상기도를 자신의 힘으로 성취하려고 하면 많은 경우 좌절하기 쉽다.
또 한 가지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 복잡한 사회에 적응하며 살려면 우리의 이성과 지력을 극대화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관상기도처럼 애매하고 신비하게 보이는 기도, 감성과 이성을 초월하는 기도는 이성과 지력을 중요시하는 현대인에게 맞지 않는 기도로 간주되어 버린 점이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너무 바쁘게 현실을 살다 보니 기도할 시간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토마스 머턴은 관상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께서 성령의 선물인 지혜와 이해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도록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잊었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령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이미 자신의 영 안에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할 때 이미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오시라고 성령께 기도하는 것을 본다. 세례의 은총으로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시고 떠날 수도 없으신 분이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지 이유로 현대인은 관상을 하려고 해도 할 수도 없거니와 또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하도록 초대받은 기도인 관상기도를 하려면 우선 이러한 오해가 해소되어야 하고 관상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고, 또한 평신도는 평신도다운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받았기 때문에 묵상은 해도 관상은 할 수 없다는 깊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를 묵상하고 기도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관상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오랜 동안 성경말씀 묵상을 통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관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오랫동안 성경를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관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시편 저자의 말과 같이, 인간에게는 누구나 영혼 깊은 곳에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그래서 관상을 통하여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듯이 하나님과 일치하기 전까지는 우리의 영혼은 안절부절못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자신이 관상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해도, 오랫동안 성경 묵상을 하면서 하나님을 그리워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관상으로 부르시며 관상을 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여 관상을 이해하고, 또 관상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주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몸된 교회의 옛 전통에서 가르치는 관상기도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로 자리잡는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과거에 관상기도를 신비주의라고 부르면서 신비한 현상으로 생각하고, 또 주로 신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기에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한다.
관상기도를 가르치던 고대의 교부들도 관상기도를 이미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었던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보신 그리스도의 영성적 가르침은 현대의 심리학의 도움을 받을 때에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여 가급적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하려 한다.
2. 관상의 의미와 특성
관상(contemplation)은 '순수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6세기 말의 그레고리오는 '사랑으로 충만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설명했다. 또 관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묵상의 열매이며 우리는 묵상 끝에 '하나님 안에 쉼'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것이 관상기도에 대한 고전적인 의미이고 지금까지 대부분의 관상가들이 이해하는 관상기도이다.
관상은 우리의 지식과 이성, 상상과 감각, 지각과 기타 인간의 모든 정신적 기능(mental faculty)들을 넘어서 우리 영의 가장 깊은 곳(inmost being) 안에서 하나님 안에 쉬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또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즉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믿음으로 우리의 정신활동과 의식(意識)이 미치지 못하는 곳(즉 영의 심층)에서 우리의 전 인격(마음과 가슴과 영혼, mind, heart, soul)으로 하나님과 사랑을 속삭이며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차원에서 말한다면 관상기도는 정화의 과정이다. 즉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데 방해가 되는 우리의 잘못된 의식구조와 태도, 습관, 이기적인 행동 동기 등을 정화하여 우리의 정신과 가슴, 그리고 영을 순수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변화(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 이러한 변화를 이루는 정화의 과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는 능동적 정화이고,
둘째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는 과정이 아니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수동적 정화이다.
지금까지 수덕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화를 자신의 힘으로 하는 정화, 즉 능동적 정화(active purincation)를 통하여 하려고 애써 왔다. 여기에 잘못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능동적 정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러나 정화되어야 할 자신의 영적, 심리적 결함이나 어두운 면(dark side)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올바르게 알고 있지 못하거나 완전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덕을 쌓는 일인 정화작업은 너무나 힘들 수밖에 없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상을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해 왔기 때문에 관상을 시작하기 두려워하며 , 또 관상을 어려운 것으로 간주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참 정화는 하나님께서 직접 해주시는 정화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정화(受動的 淨化, passive purificationt) 작업에 자신을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되는 정화이다. 수동적정화가 더 좋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정확하고 완전하게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말은 관상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며, 우리는 다만 그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처음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열어 드리면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기도를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방해하는 방법은 관상기도로서 적절하지 않다. 즉 어느 단계를 설정한다든지, 기도 중에 어떤 체험, 느낌 그리고 바라봄 같은 것을 구하려고 애쓴다면 이것은 내가 기도를 주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에 성령께서 이 기도를 이끌어 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을 하나님께 열어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내 안에 계신 성령으로 하여금 나를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해주신다. 하나님 앞에 그저 "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자신을 내어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신다는 말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에 믿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이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관상기도를 인간 스스로가 이루는 것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며, 그래서 아무나 하기는 힘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관상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이는 수련만 하면 된다. 관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수련이 바로 관상기도 수련이라고 할 수 있다.
관상기도의 방법으로 지금까지 소개되어 온 것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어떤 단계들을 제시하거나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거나 어떤 느낌 혹은 바라봄을 체험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시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기능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현존 감각이나 느낌. 그리고 바라봄과 같은 우리의 감성과 이성의 기능으로 알아볼 수 없으며, 인간적인 모든 감성과 이성의 기능들을 초월하여 우리도 알 수 없는 우리의 가장 심층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기능에서 떠나야(초월해야) 한다. 관상기도를 할 때 느낌이나 감각이나 바라봄과 같이 우리의 기능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것은 초월자이신 하나님과 만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하나님과의 만남이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신비한 만남이며 지식'이다. 이러한 체험은 감성적 체험을 초월하는 가장 깊은 존재(inmost being)에서 얻는 영의 체험(이러한 체험은 사실상 우리의 감각과 이성의 기능으로는 체험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체험이다.)이며 지식은 우리의 지적능력을 초월하는 영적 지식이다.
그리하여 토마스 키팅은 "침묵이 하나님의 첫번째 언어이다. 그 나머지 모든 언어는 잘못된 번역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하나님께서는 영원으로부터 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침묵 속에서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이 말씀을 듣는다."라고 했다. 또 에바그리우스 교부는 "기도는 생각을 떠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침묵이라는 말은 그저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활동에서 떠나 우리의 지력과 상상과 감각과 언어를 초월한 경지, 즉 인간의 정신적 활동이 정지된 상태의 침묵을 말하며, 이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일치하기 위하여
'침묵' 안('무지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어두운 밤'으로 들어간다고 한다)으로 들어간다는 말과도 같다. 즉 관상기도는 인간의 정신능력을 초월하는 우리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며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옛 전통에 따르면 관상기도를 무형(無形, Apophatic)의 기도라고 하며, 이 무형의 기도로 얻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도 바울은 영으로 아는 지식(gnosis),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는 무지의 지식(Unknowing Knowing)이라고 불렀다.
토마스 키팅은 관상기도를 "우리의 마음과 가슴(즉 우리의 전 존재)을 우리의 사고와 언어와 정서를 넘어서(즉 정신적 기능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열어 드리는 것이다"라고 하며, 또 관상기도는 "내적으로 변형(interior transformation)해 가는 과정이며, 만일 우리가 오피歐綬?하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셔서 거룩한 일치로 이끄시는 관계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 신앙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다. 이러한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정신적 기능과 감각기능을 초월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시며 초월자이시므로 인간의 정신적 기능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하나님께 온전히 열어 드리면 하나님은 깊은 침묵 속에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끄시어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뵙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골방에 들어가(세상사를 떠나서 고독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나의 감성과 이성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들을 떠나 보내고) 보이지 않는(나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 즉 가슴 속 깊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들어 주실 것이다(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우리를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말고 우리가 더 필요한 것은 없다. 그리하여 관상을 '가슴의 기도'(prayer of herat), '단순성의 기도'(praye, of simplicity), '순수한 기도(pure prayer), '믿음의 기도'(prayer of faith), 혹은 '하나님 안에 쉼'(resting in God) 등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나님을 전 인격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첫 번째 계명입니다. 토마스 머턴은 "관상은 사랑으로 하는 일로서 성화의 가장 강력한 방법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게 하는데 관상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관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상의 길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쉬운 길은 아니다. 그러나 이 길이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다고 생각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이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칼라너와 토마스 머턴, 그리고 다른 많은 영성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즉 모든 그리스도인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관상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마태오 폭스(Mathew Fox)와 그밖에 여러 학자들이 새 천년의 그리스도의 영성의 방향은 틀림없이 관상기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시편 작가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편 33:9)라고 말한다. 관상기도로 영혼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기도 중에 갖는 체험이 아니라 오랜 기도수련을 통하여 쌓이는 경험을 한 후에라야 비로소 이 뜻을 새겨들을 수 있다. 즉 우리는 관상기도를 통하여 무한한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되지만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 맛을 알 수 없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기도는 오로지 오랜 수련으로 얻어지는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그 맛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험 중에 보편적인 체험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요한 14:27)의 감각경험이다. 이 평화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평화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늘 내 안에 샘솟는 평화이다.
또다시 강조할 것은 관상은 관념과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기도수련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경험과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관상을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관상으로 나아가기 매우 힘든다. 관상기도의 방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관상기도 자체를 알 수 없고 오랜 동안 관상기도를 수련함으로써만 관상기도를 알고 이해할 수 있다. 관상기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어도 관상을 하는 사람들이 적은 오늘의 현실이 바로 관상기도가 지식이 아니라 수련을 통하여 얻는 경험과 깨달음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수련을 통하여 경험과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진정 관상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본인의 수련 경험과 깨달음을 얻은 사람만이 진정 관상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본인의 수련 경험과 깨달음 없이 지식으로 가르치면 배우는 사람이 정말로 관상기도를 하도록 인도하지 못한다.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이 적다는 사실이 관상기도를 올바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만일 관상에 대하여 올바르게 가르쳐 왔고, 또 올바로 했다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지금 매우 많았을 것이며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의 현실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전통은 교회 초기부터 있어 왔다. 근세에 이 전통이 사라지거나 거부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논리와 지식을 초월하는 관상을 지식이나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했는데 그 지식이나 이성만으로는 관상기도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도, 관상기도를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근래에 와서 깨달은 영성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옛날의 관상의 전통을 재발견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2차 바티칸공의회가 가져다 준 은총이다.
3. 관상기도를 하려면
이렇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관상의 길을 가려면 먼저 조건이 있다.
첫째,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과 일치하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필요로 하지만, 특히 관상기도를 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절대로 필요하다.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열망이 하나님과 일치로 이르는 관상기도의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살레시오는 사랑이 관상의 어머니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사랑은 하나님(그리스도 말씀)에 대한 오랜 묵상에서 온다고 본다. 즉 말씀과 가까이 하고 말씀을 묵상할 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난다. 그러므로 성경묵상을 오래 한 사람들이 자연스레 관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옛날 수도원의 전통이었던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관상기도를 하기 위하여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그 값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시간이다. 인간 사이에서도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시간을 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심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도록 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관상을 통하여 얻는 은총에 비하면 우리가 치르는 값은 아주 작은 값이다. 사실 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니 값을 치른다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것에 너무나 집착하고 마음 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크나큰 은총을 알아볼 수 없을 뿐이다.
4. 관상기도의 기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심어 주셨다(시편 139:13). 성경에는 장부(오장육부)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로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 혹은 심성을 말한다). 또 성령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시고, 또 거룩한 말씀과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늘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존재(inmost being)를 만들어 주셨으며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 계시고, 실은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가 바로 하나님 자신(神性, divine indwelling)이라고 토마스 키팅은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늘 함께 하신다. 만일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가셨다면 우리는 벌써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남았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나님은 내 안에 계셨는데 나는 하나님을 찾아 밖으로 매었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예수님께서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신성한 존재" 즉 우리의 본래의 모습(하나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저 멀리밖에 계신 것처럼 기도한다. 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기도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 없이 기도한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렇다.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초로 성립된다.
첫째. 하나님께서 즉 삼위일체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둘째.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우리의 본성을 가리우고 있는 우리의 죄(즉 거짓 자아)에서 해방(즉 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며,
셋째. 무한히 자비하시며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1). 관상과 성령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우리가 바라는 것을 청한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실상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어 두신 분이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리고 숨은 생각도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실상 하나님께 청할 것이 별로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기도 해야 하지만 정말로 기도로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 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라고 하셨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 다른 것들도 더불어 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은 것과 같다.
그런데 성령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할 일은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현존하심에 동의하며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성령께 자신을 열어 드리는 일이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며 또 기도하는가?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라고 했고, 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 6:18)라고 권고했다.
유다도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하라고 권했다(유다 1:20. 참조),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기도할 때 참다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도와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전달해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지 않고 우리 자신을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우리는 '잊어버린 손님' 취급을 하며 안방에 모셔야 할 성령을 골방에 가두어 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로 할 일은 성령께서 다시 나의 안방에 오시어 나의 주인이 되시도록 나 자신을 모두 그분께 의탁하고 내어 드리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에 나를 맡겨 드리는 수련이 바로 관상기도 수련이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내 안에 계신 삼위 일체 하나님의 현존을 점차로 알아보기 시작하게 되며, 영적으로 성장하면서 그분께서 내 안에서 늘 함께 하시면서 나의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확신도 자라난다. 즉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라는 고백을 깨닫고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도로 얻고자 하는 것, 즉 언제나 주님께서 주님으로서 내 안에 사신다는 확신이다.
관상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며 성령께서 해주시는 기도이기에, 우리는 그저 성령께 우리의 기도를 맡겨 드리면 된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성령의 움직임에 우리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이 참다운 관상기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움직임을 저해하는 어떠한 구조적인 기도방법이나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기도방법은 효과적인 관상기도라고 보기 어렵다.
2). 죄에서의 해방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죄악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죄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가 만일 이 죄악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필요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본성을 가리고 있는, 그리하여 우리 안에 와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의 죄, 즉 영적 결함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즉 우리의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활동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게 해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 12:28 참조)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다.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알아보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죄악에서의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를 맡겨 드려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관상기도를 하고자 하면서도 관상기도를 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이 죄악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기 때문이다. 또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실패를 하고 중도에서 하차하는 이유는 자신의 본성이 죄로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죄인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러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사람)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하셨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구하려고 오신 것이다. 죄란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것뿐 아니라 나의 감정적인 반응으로 짓는 죄(탐욕, 자만심 , 분노, 질투, 허영 , 나태 , 육욕 등)와 나의 거짓자아(이기적인 동기와 편견 등)로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까지도 모두 포함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우리의 본성(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형상, image와 likeness)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성(사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참 자아이다)을 가리는 거짓 자아를 무너뜨리고 거짓 자아에서 해방되면 우리는 곧 하나님 나라에 살고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죄악에서 해방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만이 해주실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죄악에서 해방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하나님께서 나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시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겨 드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거의 모든 사람들, 특히 기도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나를 맡겨 드려야 한다.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죄악에서 해방하려고 노력할 때에 우리의 해방은 불완전한 해방일 뿐이다. 온전히 죄에서 해방하려면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이발사에게 자기 머리를 맡기고, 면도사에게 자기 얼굴을 맡기는 것처럼 내 죄를 씻어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그저 자신을 맡겨 드려야 한다. 이렇게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을 온전한 승복(total surrender)이라 말한다. 온전히 승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죄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신뢰
또 한 가지 중대한 일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이며 선이며, 또 자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께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를 드려야 한다. 우리 신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도를 우리의 생각과 아이디어와 또 우리의 힘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기도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해 기도해 주시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우리를 당신 품으로 데려가시고, 우리를 거기서 쉬게 하시며, 결국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도록 우리를 만들어(변화, transformation) 주신다. 이러한 변화가 사실 "하나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롬 3:23)을 우리 안에서 되살리는 작업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하나님께 맡겨 드릴 때에 우리는 기도를 가장 잘 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기도가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거나 하나님은 원래 계시지 않다거나 하나님은 자비하지 않으시다거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부모처림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더욱 우리 곁을 지켜 주시는 분이시다. 다만 우리의 인간적인 지력이나 감각으로 그분의 돌보심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바닷가의 두 개의 발자국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어느날 밤, 한 사람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다.
그때 하늘을 가로질러 그가 살아온 장면들이 펼쳐졌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발자국이었다.
그 중에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이었다.
지나온 삶의 마지막 장면이 그의 앞에 펼쳐졌을 때
그는 모래 위에 새겨진 자신의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그때 그는 그의 삶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슬펐던 일들이 일어났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참으로 그를 괴롭게 했고, 그래서 그는 주님께 물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면 항상 저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저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밖에없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왜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주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의 소중한 정말 소중한 사람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결코 떠난 적이 없었단다. 네가 고통과 환난가운데 있을 때에 모래 위에서 한사람의 발자국을 본 것은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지나갔기 때문이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 특히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에 신뢰를 잃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순수한 믿음과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에 더욱 가능해진다.
5. 죄와 고백 그리고 성숙
창세기로 시작하는 성경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그로 인한 실낙원 이야기로 장식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가졌던 에덴 동산에서 본래의 모습은 원초적인 무죄의 상태에서 순수한 정신, 순수한 마음, 순수한 영혼, 순수한 의식을 가지고 원초적 행복과 기쁨, 평화를 누리는 모습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 구원의 모든 과정은 인간의 죄로 상실한 원래의 선하고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이다. 즉 어떻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영광된 모습으로 되돌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모두가 이러한 가르침이다.
우리의 죄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본성을 찾아가는 일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첫 번째 외침은 "회개하여라, 천국이 가까왔다." (마 4:17)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들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아오니"(눅 15:19)라는 깨우침이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첫 번째 일임을 보여 주셨다. 세례요한도 광야에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하고 외쳤다.
1). 인간의 죄와 거짓 자아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원죄의 후속 결과인 거짓 자아(false self) 엄무광, 향심기도, (서울 : 성바울, 2003. 4)
토마스 키딩, 엄무광, 관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서울 : 카톨릭출판사, 2002, 7)
를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자아란 어려서부터 세상에 살면서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로 행복을 추구하며 형성시킨 습관과 태도, 관념과 가치관들이 혼합된 것이다. 여기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에 동조하고 자신의 과오와 결함을 옹호하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심리기제들을 모두 합한 자아의식이다.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참 자아)대신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만든 이러한 잘못된 자아의식 (즉 거짓 자아)으로 살아간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라고 말하고, 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라고 했다. 누구든지 "나는 별로 죄지은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나에게는 거짓 자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짓 자아가 바로 하나님과의 일치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짓 자아가 하나님과의 일치를 방해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영적 여정의 시작이며 영적 여정 중에 계속 다루어야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자각 없이 영적인 여정을 시작하더라도 언젠가는 이 자각에 부딪치게 된다. 이때에는 이러한 자각을 솔직하고 진실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진정한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2). 바울의 고백
이와 같은 자각은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잘 볼 수 있다. 바울은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5-25)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이 죄의 법이나 내 곁에 도사리고 있는 악, 그리고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란 바로 우리가 어렸을 적에 우리의 무의식 속에 형성시킨 유치하고 이기적인 행동의 동기, 그리고 이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발전시킨 행동양식이나 가치관들을 말한다. 이것을 토마스 키팅 신부는 이러한 욕구들을 '에너지의 중심'(enegy center)이라고 하며 이러한 행동양식들을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이러한 행동동기들은 바로 거짓 자아의 기초를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원죄의 후속 결과인 거짓 자아는 우리의 인격 속에 아주 깊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우리의 행동과 사고를 지배한다. 이러한 거짓 자아에서부터 해방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관상의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과의 일치가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거짓자아를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이 여정의 시작이며 또 과정이다. 수덕생활이란 바로 자신의 거짓 자아, 그리고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이기적인 동기와 싸우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3). 인격의 성숙
사도 바울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했고 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8) 경고하고 가르친다고 했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어른다운 생각을 하고 어른답게 말을 하고 어른답게 감정을 조절하고 어른답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이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감정을 들어 낸다. 이러한 사람들이 어른처럼 보여 주는 행동이나 사고나 감정은 실상은 어린이 때의 사고와 행동과 감정에다가 어른처럼 보이도록 외부를 장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른답지 않게 행동하는 어른들을 너무나 많이 본다.
이것이 현대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거의 모든 사람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진정한 어른들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미숙한 행동과 사고와 감정에서 탈피했을 것이고, 이 사회는 이성과 진리와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거짓 자아다. 방어기제다, 잘못된 행복의 추구다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다. 그러므로 관상기도는 인격의 성숙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오랜 관상기도의 수련으로 인간은 참으로 성숙한 인간이 되어 간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성은 그대로 지니되 어른다운 이성적 판단(즉 진실을 진실대로 보는 판단)으로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집착에서 초월하도록 관상기도는 도와준다. 이렇듯 어른다운 인간으로 되어지는 성숙의 과정을 정화 혹은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6. 이성과 관상 12세기경에 인류가 이성의 가치를 깨우치기 시작한 이래 이성적 활동이 종교개혁 이후에 급격히 발달하여 온갖 이성중심 사상이 자라났고(합리주의, 계몽주의, 인본주의, 실존주의 실증주의 등) 모든 것을 실증(實證)하며 분석하고 분류하는 과학적 태도가 자라났다. 이때가 바로 신비주의로 불리는 관상의 전통이 약화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심지어는 관상기도자, 즉 신비가들을 요주의 인물로 보는 풍조까지 생겼던 시기이다.
16세기의 위대한 관상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의 글도 더러는 삭제되고 더러는 숨기는 사례도 있었다. 같은 시대에 생겨난 이냐시오의 영성수련도 결국 관상을 지향하는 것이었지만, 5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시의 장상은 마지막 부분인 관상부분을 금지할 정도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이냐시오 영성수련은 상상과 지력과 의지를 동원하는 구조화된 묵상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토마스 키팅은 말하고 있다. 즉 이 영성수련은 이성과 지력에 의존하는 수련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 또 하나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데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큰 선물이다. 즉 진리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선물이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문화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과 지력의 덕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성이 인간의 이기심을 부추기는 도구가 되면서 문명의 발전은 오히려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간이 비도덕화되며 감성과 쾌락을 쫓는 비이성화, 비인간화의 역설적 사태로 치닫게 만들었다.
즉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자만심과 이기심을 위해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의 이성(理性, reason)에는 언제나 자신의 이기심이 끼여들 여지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에 이기심과 자만심이 끼여들면서 생긴 인간의 병적인 현상이 신학적으로는 원죄의 후속 결과라고 부르며, 이것이 현재의 인간에게 만연하는 인간의 조건이다. 이러한 인간의 조건을 가진 상태에서는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즉 이성은 우리가 이기심이 없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사용할 때에 진실한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참다운 선물이 되는 것이며, 순수성을 잃어 버리고 이성을 사용하면 이성은 이기심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를 말해 준다. 극도로 순수한 이성을 가지고 판단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자신의 거짓 자아가 끼여들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어느 인류학자는 인간은 이성을 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또 인간의 마음(mind, 즉 이성을 가지고 있는 정신)은 사탄의 놀이터라는 말도 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초기에는 우리의 이성과 지력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좀더 가까이 가고 하나님과 일치하려고 할 때에는 이성과 지력의 한계를 초월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이것이 대부분의 신비가들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신비가들은 순수한 믿음과 사랑으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했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자라는 것이 이 순수한 믿음과 사랑이며, 또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 우리는 그 어렴풋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과 믿음을 발판으로 감성과 이성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신뢰하고 맡겨 드리는 기도, 즉 관상기도를 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더 자라고, 이렇듯이 믿음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는 일이 서로를 부추기고 도우면서 점차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제는 거울(즉 이성의 힘)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즉 가슴과 가슴, 영과 영으로)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성으로 하는 기도나 묵상은 관상으로 이끌어 주는데 발판이 되고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기도의 끝은 아니다.
고대 교부인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란 사고를 떠나는 것이다."라고 했고,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는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기도는 이미 참된 기도가 아니라고까지 말했다. 우리는 이성(즉 정신)으로 기도를 시작하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기도로 나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더 깊은 기도, 하나님과 일치하는 기도를 할 수 있다. 묵상과 정신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이다. 그래서 논리적 묵상이나 이성적인 기도(보통은 정신적 기도라고 분류함)에 계속해서 머무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감싸주신다는 느낌,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감각,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환시, 혹은 영적인 위로 등의 체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관상기도의 가르침에는 하나님 현존의 느낌이나 영적인 바라봄을 추구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기도 중에 어떠한 느낌이나 현시나 감각을 추구하며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면 마치 기도가 실패한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격려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 주시는 선물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하나님과 일치로 가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이 체험이 우리가 관상기도를 통하여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도의 끝이 아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 일치이지 이러한 체험을 얻으려는 것은 아니다. 체험에 매달리면 그 체험을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느낌과 바라봄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의 감성과 이성으로 하는 기도이며, 여기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래서 느낌과 바라봄 안에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가 결여되어 있어서, 이러한 것을 추구하면 진정한 관상기도를 하기 어렵다.
그래서 참다운 관상기도를 하려면 어떠한 체험에도 매달리지 말고 떠나 보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 드리면서 그 체험도 떠나 보내야 한다. 이러한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것에 개의치 말고 꾸준히 기도에 정진해야 한다. 관상기도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신뢰의 기도라는 점을 명심하고 이러한 체험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떠나야 한다. 인간의 기능은 감각적 기능과 이성적 기능말고도 영적인 기능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인 감각과 이성의 바라봄이 아니라 영적인 바라봄이며 영적인 인식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기능으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관상기도의 가르침에서 바라봄과 현존 체험을 추구하라고 할 때, 이것을 잘못 이해하고 감각과 이성의 기능으로 바라보려고 하면 거의 모두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라봄과 체험은 감각과 이성을 초월한 영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가 감각과 이성으로 알 수 없는 '무지의 구름' 안에서, 아주 캄캄한 밤에서 영으로 바라보고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바라봄과 체험은 차라리 우리의 감각과 이성의 바라봄과 체험을 온전히 포기할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생각을 벗어나고'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기도를 이해하고 또 정진할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러한 경험을 가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앞에서 말한 기도 중에 얻거나, 혹은 얻고자 하는 체험과는 다르다. 앞의 것을 기도 중의 체험이라고 말한다면 후자는 기도로 쌓이는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얻는 체험도 성장을 위하여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기도 중의 체험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일치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기도 중에 어떠한 감미로운 체험을 하더라도 떨쳐 버리라고 가르친다.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이해하기 바란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관상기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며 하나님과의 일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기도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이러한 앓은 영의 깊은 곳에서 아는 앎이며 인간의 언어로는 적절하게 표현되지 않는 앎이다. 즉 무지의 지식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면서 활동하신다는 확신을 갖는다. 이러한 지식의 체험, 이러한 사랑의 체험, 이러한 확신의 체험이 우리가 오랜 수련으로 얻어지는 체험이다. 즉 영적 위로와 심리적 느낌 그리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 계속 매달리면 영적으로는 성장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만일 기도 중에 침묵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갖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 잘못된 신앙의 길로 빠져들 위험이 아주 높다. 영적 위로와 체험을 구하는 기도들이 영적 여정을 시작하는데,
그리고 여정 중에 가끔 격려를 받기 위해서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는 잠시 쉬어 가는 곳이지 우리가 향해 가고 있는 종착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관상기도는 물론 어떠한 기도도 기도를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고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하나의 단계일 뿐임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분심은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없앨 수 없으며 분심은 인간이 살아 있고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관상기도 중에 분심은 우리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며 기도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기도를 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분심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분심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에바그리우스교부는 말하기를 관상기도는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관상기도 수련은 분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분심에서 해방하는 수련이며 분심에 얽매이지 않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분심을 떠나 보내는 수련이다. 또한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사고, 태도, 가치관, 감정, 등의 분심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기르는 수련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련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늘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분심이 많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주의 집중은 나의 노력과 의지로 하는 행위이다. 관상기도 수련은 나의 노력과 의지로 하는 능동적 행위라기보다는 관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형성해 가는 아주 수동적인 수련이다.
그러므로 주의를 집중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 아니라 주의 집중에 전혀 관심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관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관상기도 수련은 주의를 집중하는 기도수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자신을 열어 드리는 태도, 즉 아주 수용적(受容的, Receptive)태도를 기르는 수련이다.
또는 사고의 흐름을 느려지게 하는 수련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수련이다. 나의 노력으로 주의 집중하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겠다는 지향을 보여 드리면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받아들이는 수련이다. 관상기도를 올바로 하려면 분심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주의를 집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태도를 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분심이 들고 주의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개의치 말고 기도를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분심과 주의 집중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아무 사고와 감정과 분심이 없는 깊은 침묵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상태를 경험한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고 잠을 잤기 때문에 기도를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필자 역시 이러한 상태를 경험하면서 잠을 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침묵이 관상기도로 가고자 하는 과정이다. 만일 꿈을 꾸지 않았고, 머리를 끄덕거리지 않았으며, 코를 골지 않았다면 잠을 자지 않고 깊은 침묵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분심 속에서 기도를 20분간 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계를 보니 30분도 지나고 한 시간도 지나갔음을 알았으면 시간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침묵 속에 들어갔던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시간은 무시간 혹은 영원한 시간 속에 머문 것과 같다. 이러한 침묵과 시간이 하나님과 함께한 장소이고 하나님과 함께 한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분심이 들고 또 잠을 잔것 같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꾸준히 기도하자. 만일 기도하는 동안에 잠을 잤더라도 후회할 것은 없다. 하나님 안에서 좋은 휴식을 취한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면 된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기도를 하면 기도하는 동안을 어떻게 보냈든 상관없다.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 안에 쉼'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편에 있듯이 "젖을실컷 먹고난 아기가 엄마 품에서 잠자는 모습"이 관상기도를 하는 사람 모습의 좋은 표본이다. 관상으로 이루는 것은 정화와 중독증의 치료와 인격의 성숙을 통하여 하나님과 변형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또 하나님 안에 쉬게 된다. 오랜 수련 끝에 우리의 의식은 늘 하나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고 늘 내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상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과정을 토마스 키팅은 '의식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consciousness)이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의식, 즉 하나님께서 나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의식에서 마음과 가슴이 순수해진 순수한 의식, 하나님과 일치를 이루며 살고 있다는 일치의식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라고 말한 상태이다. 이로써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 즉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likiness)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갈 5:22 참조), 참복의 삶(마 5:1-12 참조), 그리고 '마음(heart)과 생각(mind)이 새로워진 새 사람'(엡 4:22-24 참조), 새 인간(골 2:9-11 참조)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리는 삶(요 8:31-32참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요 14:27 참조)를 누리는 삶이다. 그리고 평범한 삶을 남다른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또 지금까지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물, 목표, 사고, 가치관, 태도, 인간 관계 등에 대해 집착하면서 매달렸던 습관들을 떠나 보내면서 여기에서 초연해지는 수련을 통해서 한다. 또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어렸을 적의 정서적 상처와 기억들을 쓰레기를 치우듯 치워 버리는 과정을 통해서 한다. 사실 이것들은 우리의 정신과 깊은 의식 속에 치워야 할 쓰레기처럼 쌓여 있어서 우리의 영적인 활동과 정서를 매우 제한했던 것들이다.
이러한 쓰레기들이 청소되고 나면 우리 내면에 시원함, 후련함, 혹은 정결감이나 해방감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쌓인 쓰레기를 수십 년간 치우지 않고 묵혀 왔던 방을 깨끗이 청소한 것과 같은 느낌말이다. 또 우리 자신의 사고들을 상대화(相對化, 나의 자아가 절대적인 것처럼 매달리던 습관을 버리고 자신의 자아를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으로 다루어 가는 것)시키면서 객관적이며 이성적인 판단력의 발달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영적인 개안 같은 것이다. 또 잘못되어 온 자신의 정체성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확립하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각과 모든 지적 요소를 초월해서만 만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모든 기능을 초월한 침묵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며, 이 침묵 속에서 우리 영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중독현상, 즉 신학적으로 원죄의 후속 결과와 죄를 하나님께서 직접 정화(치유)시켜 주시어 마침내 하나님과 우리를 일치시켜 주신다는 것이 바로 관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사실 사막이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장소이다. 그래서 옛날의 성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사막으로 나갔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 결함, 즉 심리적인 병적 현상을 다루실 적에 우리의 의식 속에 고통과 비참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막처럼 보이는 기도를 참아 내기도 어려우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된 의식을 도려내며 수술하시는 것에 대하여 아픔을 느끼기에 이러한 기도에 점진하기 쉽지 않고 또 이해하기도 어렵다.
우리를 돌보지 않으신다는 느낌을 갖게 되며, 이것 또한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 여정을 일단 시작한 이상 우리 곁을 결코 떠나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내버려두지도 않으신다. 어미가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손바닥 안에 우리의 이름을 써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확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은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치유방법을 정확하게 사용하시는데 이때에 우리는 사막과 아픔과 신의 부재를 경험하는 수가 있다. 병든 부분을 도려낼 때에 고통을 느끼듯이 하나님의 치유와 정화과정 중에 사막과 어둔 밤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아픔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의 병이 그만큼 중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심각한 치유방법을 쓰고 계시다는 것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특히 하나님과 일치하려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정신 치료인 관상의 길로 더욱 나아가야 한다. 이 길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으로 이르는 좁은 문"이기 때문이다. 인격의 성숙과 성화와 정화, 영적인 성장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정신 치료는 모두 다른 것들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상을 통하여 동시에 영적인 건강을 찾고, 인격이 성숙하며, 그리고 하늘나라로 이끄는 성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 과정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여정이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기도에 정진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이 관상의 길은 끈기와 결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막의 성인 안토니오가 영적 여정에 성공할 수 있게 만든 요소들이다. 관상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우선 여기에서는 관상기도의 전통에서 제시된 몇 가지 방법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만일 관상기도에 대하여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떠한 방법으로 하든 올바로 이해하고 하나님께 나를 온전히 맡겨 드리기만 하면, 우리는 관상기도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열망을 보시면 우리를 관상에 이르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관상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이다. 이러한 이해가 중요하다. 관상의 상태란 하나님과 일치하고 있다는 의식을 항상 유지하는 상태라는 말과도 같다. 관상기도는 이러한 상태를 갖도록 도와주는 기도이며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과 일치를 도와주는 방법의 수련이다. 관상기도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이기에 우리가 습득하는 기술이라고 하지 않고 은총을 받아들이는 수련이라고 말한다. 즉 관상의 상태로 이르게 하는 방법들이며, 그 자체가 관상이라기보다는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즉 우리가 이러한 기도로 자신의 사고와 관념, 즉 분심을 에바그리우스가 말한 대로 '떠나보내고 벗어버리는' 수련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해주신다. 그것은 간단한 방법으로서 늘 '예수 주님' 을 입으로나 마음 속으로 반복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나 길을 가거나 일을 하면서도 이렇게 늘 예수님을 부르며 살다 보면 마음이 단순해지고, 가슴이 순수해지며, 성령의 열매가 싹트고 자라면서 관상적 삶을 살게 된다. 요즈음에도 이러한 기도를 많이 권고한다. 엮어진 기도를 늘 반복함으로써 언제나 이 기도가 가슴속에서 계속되게 하는 기도이다. 그러면 어떤 위기에 부딪치거나 감정을 상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에 이 기도가 자발적으로 나와서 그 상황에서 초연해지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는다.
정감적 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감사와 탄식과 찬미를 나타내는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며, 능동적 기도라는 것은 수동적인 다른 기도에 반해 자신이 능동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 기도는 「이름 없는 순례자」라는 책에서 소개된 무명의 순례자가 사용한 기도와 같은 기도이다. 이름 없는 순례자는 "주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는 기도를 순례 중에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여러 해를 반복해서 기도하고 나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초연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베네딕토 수도원에서는 모든 기도의 앞에 "주님, 어서 오시어 나를 도와주소서. 주님 빨리 오시어 나를 구해 주소서."라는 기도를 한다. 이 저자는 가급적 아주 짧은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리라고 말한다. 기도어는 한 단어로 하되 한 음절이면 더욱더 강하게 하나님께 올릴 수 있으며, 인간의 감각과 지력과 상상과 언어를 넘어선 무지의 구름을 뚫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무지의 구름'의 방법을 현대어로 발달시키고 기도하기 쉽도록 체계화한 것이 항심기도이다. 당시 이 수도원의 원장이던 토마스 키팅 신부의 주도 아래 바실 페닝톤과 월리엄 메닝거 두 신부가 영적으로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무지의 구름의 방법을 현대화시켰으며,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가르침을 도입하여 더욱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기도이다. 지금은 관상지원단의 조직적인 지원 아래 이 기도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으며, 마치 60년대에 시작한 성령기도의 물결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관상기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과학, 특히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현대인이 알아듣고 수련할 수 있도록 방법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요소들이 있다. 향심기도는 이러한 관상의 선물을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여 관상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향심기도를 매일 수련하면 가급적 빨리 관상기도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수, 주님, 하나님, 아빠, 아버지, 성령님, 평화, 사랑 등)를 성령의 도움을 받아 선택한 후,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의식 속에 살짝 이 기도어를 도입함으로써 기도를 시작하며 기도 중에 어떠한 영상이나 감각, 상상이나 생각, 감정, 등 분심이 자신의 의식 속으로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면 그 기도어로 즉시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아주 단순한 기도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이 기도어(prayer word 혹은 sacred word)는 '내 안에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것에 동의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 기도는 이러한 지향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는 기도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마음과 가슴을 열어 드리고 나를 내어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실 것에 동의한다는 나의 지향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면, 하나님께서 나의 성화와 인격 성장에 필요한 정화의 일을 해주신다.
즉 깊은 상처들을 치유해 주시면서 나를 변형시켜 주시어, 결국 하나님과 일치시켜 주시는 것이다. 아주 수용적인 기도이다. 수용적이란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의 은총과 선물을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향심기도는 그 자체가 기도이기도 하지만 관상으로 쉽게 이끌어 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향심기도는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기도로 사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관상에 이르게 하는 여러 가지 기도 중에 향심기도가 가장 쉬운 기도라고 토마스 키팅은 말한다. 이것은 마치 병든 사람이 병이 나을 때까지 매일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하나님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매일 하나님을 만나는 것과 같다. 또한 영적인 음식을 매일 먹는 것과도 같다. 향심기도의 주도자 중의 한 분인 바실 페닝톤(Basil Pennington)은 이렇게 매일 하는 향심기도를 하나님과 갖는 10과 10(Ten/Ten)이라고 부른다. 10과 10이란 메리지 엔카운터에서 가르치는대로 부부 사이에 매일 10분간 편지 쓰고 또 10분간 편지내용을 가지고 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과 매일 대화와 데이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기도를 하면 언젠가는 하나님과 일치를 하는 체험, 즉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관상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토마스 키팅 지음, 가톨릭 출판사), 그리고 「하나님과의 친밀」(토마스 키팅 지음, 성바울)등이 나와 있고, 또 '향심기도의 지침'이라는 팸플릿이 나와 있으므로 이 책들과 글을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중복해서 자세히 기술하는 것을 피한다. 성서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에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또한 성서로 기도를 하면서 이 성서 안으로 빠져들거나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빠져들면 '하나님 안에 쉼', 즉 관상으로 들어가곤 했다. 이러한 과정을 렉시오 디비나라고 부르며, 베네딕토 수도회에서는 초기부터 거룩한 독서를 수도생활의 중심으로 삼아 오고 있다.
인간관계에서 보듯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 즉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단계, 그리스도와 친해지는 단계,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는 단계 ,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단계들이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말씀이다. 즉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이러한 단계로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발전하여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경지에까지 갈 수 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알게 되는 단계로 이 단계를 성경읽기(Lectio - 즉 reading)라고 한다. 다음 단계는 그리스도를 좀더 깊이 이해하며 친해지는 단계로서 이때의 성서 읽기를 묵상(Meditatio - 즉 meditation)이라고 하며,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더욱 발전하면 정감적 기도(oratio - 즉 affective prayer) 혹은 자발적 기도(spontaneous prayer, 자신도 모르게 탄식처럼 가슴에서 솟아나는 기도)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움이나 찬사를 나타내는 기도를 자연적으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 단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구의 관계로 들어간 단계이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친구를 아는 것처럼 알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를 제자들이 친구처럼 깊이 알게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겠다고 하신 것은 이 단계를 말한다. 이처럼 자발적 기도 후에 우리는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잠기게 되며 하나님 안에 쉬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단계를 관상(Contemplatio - 즉 contemplation)이 라고 불렀다. 이 방법의 특징은 성서를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구절이나 단어가 있으면, 이것을 가슴에 품고 하루를 살면서 이 구절이나 단어를 가슴속에서 계속 반복하면서 음미하고 반추한다. 그 말씀을 그날 하루 가슴속에 품고 살면 바로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이 되기 때문에 종국에는 관상적이게 한다.
이 말씀은 나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 그 말씀과 자신이 동화되고 그 말씀 안에 쉬면 바로 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가슴속에 깊이 새겨지고 말씀과 일치를 이루어서 복음적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도움이 된다. 복음적 삶이 바로 관상적 삶이다. 거룩한 독서의 수련에 익숙한 수도자들은 어떤 경우에 한번의 독서로 네 순간을 동시에 거치기도 하며 순간들이 서로 뒤바뀌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렉시오 디비나를 수도원적 렉시오 디비나라고 부른다. 이러한 수도원적 렉시오 디비나는 오로지 성령의 인도에 따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관상으로 이르게 하는 기도수련이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렉시오를 하면 자연히 관상으로 이르게 된다. 이것은 12세기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모든 것을 구조화 하는 단계로 흐름에 따라 카투시안 수도회의 구이고(Guigo)가 렉시오의 네 순간을 네 단계로 나누고 이 네 단계를 순서대로 거쳐서 하는 렉시오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움직임에 따르기는 하지만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하려는 공부의 성격을 띄고 있기에 학구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이 전통에 따르면 성서 묵상에 더 무게를 두고 있으며, 후대에 와서 구이고의 방법이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집단으로 하는 렉시오 디비나가 널리 보급되고 있다. 집단적으로 하는 거룩한 독서는 성서를 세 번 혹은 네 번 반복해서 읽고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나 단어를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방법들에 대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소개된 책자들이 나오고 있다. 렉시오 디비나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러한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상을 하기 위하여 누구나 이 거룩한 독서를 꼭 해야 되는 거은 아니며, 이처럼 반드시 세 단계를 거친 다음에 관상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향심기도를 반드시 해야만 관상기도로 넘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초보자는 이러한 거룩한 독서, 특히 학구적 렉시오를 하는 경우에 관상으로 들어가는 수련에 더욱 도움을 받는다. 그리고 향심기도는 거룩한 독서 수련을 하시는 분들이 쉽게 관상으로 들어가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와 향심기도 수련을 함께 하시는 사람은 빨리 관상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어 줄 사람이 없을 때에는 스스로 소리내어 천천히 읽으며 귀로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말씀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내려가도록 해야 한다. 반복한다.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딤후 3:16) 일을 한다. 우리가 성서를 가슴속에 담을 때에 우리는 그 말씀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진리를 배우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허물을 고치며, 올바르게 살려는 지향을 가지고 성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즉 말씀으로 내가 바뀌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자세가 아니라면 렉시오는 한낱 장식에 불과할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에 그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말씀으로 살아서 그리스도를 닳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태도를 가지고 읽는다. 만일 성서를 백 번 읽었다고 해도 그 말씀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형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헛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가슴에 간직하고 곰곰이 생각하신" 마리아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성서(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를 다 읽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성서구절만으로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 옳바른 렉시오 디비나가 되지 않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씀만을 선택하여 렉시오 디비나를 할 때에 이단이 생길 수 있다고 교부들과 학자들은 경고했다. (가톨릭의 묵주기도, 성체조배, 힌두교의 만트라기도 등).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서 초연해지면서(문을 닫고) 자아가 자신의 내면, 즉 영적차원(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만나는 곳)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와주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기도를 하든지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세속을 떠나고 잡념과 분심에서 떠나서 깊은 내적 침묵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 기도는 관상으로 이르게 해주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어떠한 기도를 하였든지 깊은 내적 침묵으로 이르게 했다면 확신을 가지고 그 기도를 계속하도록 권한다. 데레사는 "기도를 하면 가슴이 넓어진다."고 했다. 즉 기도하는 사람들은 가슴이 열리고 더 지혜로워지며,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고, 나아가서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떠한 기도든지 가슴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을 관상적이게 만든다. 기도가 관상적이게 하려면 '가슴' 속에서부터 기도가나와야 한다. 가슴속에서 나오지 않거나 가슴을 열지 않고 다만 입과 머리로 하는 기도는 결코 관상적이지 않는다.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상기도는 가슴의 기도, 영혼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형식과 방법에 얽매이게 하여 성령의 움직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방법은 오히려 관상기도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너무나 구체적으로 단계를 제시하는 기도방법은 관상기도로 적절하지 않다. 사실, 이러한 일로 해서 관상으로 이르지 못하고 애를 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득 신앙생활에 메마른 느낌이 들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고 기도가 잘 되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려고 해도 생각이 나지 않으며 때로는 도무지 하나님이 계신지도 확신할 수 없는 그러한 공허한 상태에 이르는 수가 있다. 성서는 읽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묵상을 하려고 해도 묵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슴 속에 강하게 남아 있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혹은 성령기도회에 오랫동안 참여한 사람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관상기도로 초대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렇다고 우울증과 같은 상태가 아니라면 이러한 메마른 상태는 이미 관상 중에 어두운밤에 들어갔거나,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무지의 구름 속으로 이미 초대를 받은 상태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토마스 머턴 같은 분들의 가르침이다. 이것에 대하여 확신이 없을 때에는 가급적 빨리 영적 지도자를 만나 상의하고 정규적인 관상기도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만일 영적 지도자를 만날 수 없으면 기도가 메마르게 느껴질 때에 자신이 하던 기도에 더욱 정진하거나 향심기도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나 혹은 정감적 기도를 해보기를 권한다. 이러한 기도에 정진하면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관상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지나치게 분석하거나 판단하거나 회의를 느끼지 않도록 하며 정진하여야 한다. 상태에 들어갔던 경험을 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는 이유는 기도와 성서 묵상과 봉사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자라나면서 이제는 지금까지 하나님과 가졌던 감성과 이성의 수준에서의 관계가 더 이상 적절하지 않고 새로운 수준, 즉 영적 수준의 관계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관상기도를 할 때에 우리의 이성과 감성이 미치지 못하는 우리 영의 아주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감성과 이성으로 해오던 기도가 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상태는 더 깊은 관계로 부르시기 위하여 우리의 오감과 이성을 하나님께서 일시 중지시킨 상태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던가 졸았다고 생각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이미 관상의 상태로 들어간 것이다. 우리가 관상기도 중에 세속과 분심에서 떠나 깊은 내적 침묵 속으로 들어가면 그 깊은 내적 침묵(즉 아무생각이 없었다는 상태)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이 바라던 관상기도를 한 것이니 이러한 상태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말자. 그러니 기도 중에 이러한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으면 오히려 주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자신이 하던 기도를 계속하시라. 관상기도란 어떻게 기도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생활을 통하여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기도를 했다고 해도 꾸준히 수련하면 마음의 평화를 알아차리고 더 인내하며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경험하면 여러분은 이미 관상기도를 잘 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어도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바란다고 하나님께서 모두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일치를 구하는 기도이지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는 기도는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려고 애쓰거나 하나님 현존의 영상을 바라보고 하나님 사랑을 느끼거나 어떤 희열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일치에 방해가 된다. 어떤 방법들은 이렇게 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구하려고 기도하면 실망 끝에 결국 기도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메마름 속에서도 그저 꾸준히 기도를 하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하는 것이다. 데레사는 "침묵의 열매는 기도이고, 기도의 열매는 믿음이며, 믿음의 열매는 사랑이고, 사랑의 열매는 자선이다."라고 했다. 잘 음미해 볼 말이다. 기도를 하면서 어떤 기대를 했다가 기대했던 것을 얻지 못하면 실망하기 쉽다. 관상기도는 내가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이기에 기대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들게 일 해주실 것을 바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기 때문에 무엇을 주시든지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대로 일하시지 알고 하나님께서 좋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일하신다는 점을 알기 바란다. 이것 또한 기도에 대하여 기대를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도를 내가 바라는 대로 기도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이것은 초보자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다. 자신의 기도에 대하여 분석하거나 판단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기도에 방해된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기도 중에 자신의 기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할 필요가 없다. 기도시간 동안 그 시간을 하나님과 함께 하고 기도를 하나님께 맡겨 드렸으면 기도가 잘 되었다거나 못되었다거나 하는 판단은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기도라는 점을 명심한다면 기도하기 전에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분석하고, 기도하고 나서 되돌아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바라봄이나 현존 체험 같은 것을 강조하면 기대하고 분석하고 되돌아 보는 습성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경향은 기도에 도움이 되지 알고 오히려 기도를 방해할 뿐이다. 이성과 감성을 초월한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이기에 사실은 기대하거나 분석하거나 되돌아볼 수도 없다. 이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관상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매일 이루어져야 한다. 매일 십자가를 지고 매일 기도를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매일 잠자고, 씻고, 먹고, 출근하고 일한다.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내가 오늘 잣는지, 먹었는지, 씻었는지, 일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간다. 기도생활도 이렇게 습관화되어서 기도를 하고서도 오늘 기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과 만남은 매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습관처럼 기도해야 한다. 하루에 적어도 두 번, 20분 내지 30분씩 기도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기도를 정규적으로 하면 기도와 생활이 조화를 이루게 된다. 관상기도가 생활 안으로 스며들어 생활 자체가 관상적이게 된다. 즉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 된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 삶을 포기하겠다는 것과도 같다는 것을 알아두자.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지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는 일이 아님을 명심하라. 기도를 늘 습관적으로 하다 보면 기도할 시간이 언제나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방법을 알아도 현대인들은 그 방법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면 기도를 계속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므로 기도에 대한 설명, 즉 개념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방법을 알고 또 개념적 배경을 이해한다고 해도 관상기도를 수련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관상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공부가 아니라 수련이며, 지식이 아니라 체험에서 오는 깨달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체험과 깨달음은 수련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러므로 수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수련 없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다. 하나님과 일치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생각할 때에 기도의 수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만 권의 책을 읽는다 해도 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막의 교부들은 책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기도의 수련 자체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성화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 Thomas Henting, Basil Pennington. William Heninger, Thomas Melton, WilliaH Johnstone, BedeGrfnths, John Main, Henry 1.M. Nouwen, Anthony De Hello등과 같은 현대의 영성가들이나 무명의 저자가 14제기에 쓴「무지의 구름」과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 소화데레사 등의 고전들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누리시기를 기원한다. |
'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기도에 관한 명언들 (0) | 2007.03.24 |
---|---|
[스크랩] 관상기도세미나에 다녀와서 (0) | 2007.03.24 |
[스크랩]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0) | 2007.03.24 |
[스크랩] 중보 선교사의 필요성 --- 마이클 비클 (0) | 2006.11.17 |
[스크랩] 기도는 전투다/피터 와그너 저. 명성훈 역/서로사랑 (0) | 2006.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