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스크랩] 제자도

어노인팅 2007. 2. 5. 12:01
<제자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 예수님께 배우는 자. 그 분을 본받아 살기를 결정한 자

(막1:16-20)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막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막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 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막1: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 나에게 주어진 일을 내가 왜 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
그 대답이 '나'에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그 분에게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만나기를 원하는 마음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새로워 짐은 그 열매이다.

<Discipleship>

(막8:34-36)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막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 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즉 주님의 기대치가 무엇인지?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나 중심의 삶에서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옮겨가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고난의 상징,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중간하게 죽어있는 상태는 오히려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죽으면, 예수님께서 살리실 것이다.

<치루어야 할 대가>

눅9:57-62
(눅9:57-62)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눅9: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눅9: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눅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57- 예수님의 대답은 예수님을 좇겠다는 의지가 따른다, 따르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를 때의 댓가, 즉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즉 하나님만이 안정감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먼저 우리 삶의 안정감의 기반이 되었던 모든 것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59-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과 그의 반응.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음에도 자기의 계획과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 사람,
강한 의견을 주님께 피력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
혹은 주님과 타협하려는 사람

* 제자의 삶이란 두고 온 것에 대해 미련을 버리는 사람, 뒤 돌아 보지 않는 사람,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 주께서는 부르신 자들에게 타협하지 않으셨다. *

이 과정을 겪게 하시고 이 후에 70인을 따로 세우셨다.
(10: ) 많은 사람을 부르셨지만, 그들이 모두 주님의 기대치에 응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자들이라면, 아마도 자신의 삶을 온통 뒤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자, 먼저 이 부분에 대해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다시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나의 모든 삶의 태도, 생활 방식, 가치관, 관점등이 바뀌게 될 텐데, 이렇게 되도록 자신을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도록 결정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내 삶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받아 드려야 할 것이다.
제자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토라를 가르쳤던 율법학자들
왕하2: 학교를 시작했던 선지자들
그들의 랍비의 가르침에 자신을 헌신했고 위탁했던 제자들
요한(세례)의 제자들은 금식과 사는 방법등에 있어, 그 스승의 모든 삶의 모습을 따랐고 그에게 헌신되고 위탁되었다.
막 3:13 산에 오르시니... 제자를 부르신 이유, 목적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셔서 부르신 자들, 이곳에 있는 자들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선택은 탁월하셨고, 그 분의 안목과 주권과 계획을 가지고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이 선택기준을 만족시킨 사람들이 아니었다.

3.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
함께 있다는 것은 동거동락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을 살면 자연히 서로 끊끊한 교제를 갖게 된다.
서로의 장점, 단점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자라온 배경등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신 그 첫 이유는 그들과 함께 교제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단순한 사귐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것까지 이야기할정도의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깊은 교제와 관계를 계속 갖게되면 자연히 하나님에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반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방법은 그 분 보좌 앞에 머물러 있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단11:32절에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고 강하게 되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그것을 통해 우리는 강한 영적인 군사로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능력있고, 강한 삶을 살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만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단 둘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럴때 삶의 열매 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고 곤고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삶은 나약한 자의 삶일 수 밖에 없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점이 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앉는 시간이었다.
사역의 힘, 능력이 필요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 앉으라!
아주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 들어온 자들의 지속되어야 할 것, 바로 내 삶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역동적이고 실패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는 삶.
4. 보내사 전도도 하기 위해서 ; 나와 세상과의 관계
주님이 이곳에 나(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나를 이 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제자)를 보내기 위함이다.
전도하기 위해서, mission을 위해서, 잃어 버려진 영혼들을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넓은 안목을 갖게 하시고, 넓은 안목을 갖게 하셨다. Being하기 위한 이유는 궁극적 doing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세상을 구속하시고, 복음화시키고, 잃어 버려진 영혼들을 부르시기 위함이다.
사도행전을 통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회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 being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세상을 아는 길이다.
세상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교만을 꺾기 위해 더 강한 교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나라는 반대정신으로 사는 것.
5. 귀신을 내어 좇는 권세 ; 나와 사단과의 관계
하나님께로 부터 왔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중간지점은 없다. 결국 타협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사단은 우리를 계속 속이고 거짓을 말하며, 타협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고, 확실하게 우리가 소유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세, 바로 우리가 귀신을 내어 좇는 권세를 주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명령으로 사단의 권세는 깨어지고 쫓겨 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단의 견고한 진은 파괴되고 주님의 나라는 회복될 것이다.
content x process = result
강의, 중보기도, 성품공부
노동시간... (으로 심고)
진리로 심었는데 열매가 없다면, 과정에 문제가 있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두배, 세배가 아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앞에서 훈련 받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훈련받는 자들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근본적인 동기들로 인해 주님이 크게 쓰시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주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이 이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을 주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마8:18-22 ;세 종류의 사람 <무리와 서기관과 제자에 대하여>
(마8: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8: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마4:25 의 허다한 무리 7:28, 8:1, 13:1-2, 19: etc.
항상 예수님 사역의 현장에 있었던 아주 많은 무리의 사람들
11:7-10 무리들은 새로운 지도자들을 좇아 다니는 자들이다.
제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사람을 좇아 다니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마11: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마11:10)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2:23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놀라는 사람들
(마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마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14:13-21 무리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 예수님.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굶주려 있는 무리들. 회복과 안정 은혜가 필요했던 무리들이 항상 예수님 주변에 있었다.
9:8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나타날 때,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었다.
21:8-9 거의 맹목적인 열광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
27:20-23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무리들이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돌을 드는 자들이었다.
8:19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했던 서기관(종교적인 지도자),7:29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비교되었던 자들 중의 한 사람. 그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들을 경험하고 목격하므로 요청했던 말
21:23과 22:15, 25에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송사하려하고 변론하려 했던 자들의 결론은 34에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심.
8:19의 서기관의 근본적인 동기를 알았던 예수님의 대답에 의해 결국 예수님을 떠났던 자.
무엇인가 배우기를 원하고 사람의 영광을 취하려고 한 자들.
예수님의 기대치를 만족시킬 수 없던 자
:21 따르겠다고 하던 또 한 사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의 상황과 처지를 알았지만 예수님께서 놓아 주지 않았던, 예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삶을 위탁하시고 관심을 가지시고 부르시고 놓아 주시지 않는 사람이 제자이다.
내가 하나님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자가 되라. 그러한 삶을 사는 자들이 될 때 피곤치 않고 낙망치 않고 소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절망된 상황 속에 있다하더라도 주님의 부르심 속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은 평안이 나를 붙잡고 있을 것이다.
나만이 아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평안.
은혜와 평강이 있을 것이다.
12:1- 그의 제자들을 변호하시고 감싸시는 예수님. 제자는 예수님께서 보호하시고 감싸 주시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그의 담이 되어 주시고 안정감의 근원으로 존재해 계신다.
좋은 리더는 자기가 맡은 자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고 그의 부르심을 끝까지 좇아 가도록 그를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고 세워주는 자이다.
주께서 끝까지 책임지시는 자, 제자 안에 시작하신 일을 이루시는 자이다.
그분 안에 있는 그 분의 주권이 이를 이루실 것이다.
그 시기와 열매는 주님이 정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요구하시고 기대하실 때 그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가 제자이다.
12:46-50 제자란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자이다.
가족으로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이다.
주의 뜻대로 주를, 혹은 주의 부르심을 좇아 가는 자들이 제자이다.
13:10,36 24:1 비유에 대해 따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 배우는, 예수님이 특별하게 따로 시간을 내어서 가르쳐 주시는 자들이 제자들이다. ∴제자란 예수님께 배우는 자들이다.
14:19-20, 15:36 (요4:1,2)예수님께서 신뢰를 가지고 많은 권한을 위임하신 자들이 제자들이다.
예수님께 서 기회를 주실 때, 그 기회를 놓치는 자들이 되지 말라.
그 분의 기회를 사는 자들이 되라.
하나님의 모든 기회를 샀던 요셉, 어떤 상황 속에 나를 넣으시든지 그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요셉, 다윗...
그 상황 가운데 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내가 그것을 통해 배우기를 원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사는 것이고, 나를 훈련하는 좋은 훈련 장소, 기회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최고의 것, 최선의 것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시는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주의 큰일을 맡기 원하는 자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는 주님이 끝까지 붙드시고 신뢰하시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신)자가 될 것이다.
주님을 따라가는 자(주님이 붙드시는 자)는 역동적이고 생명력있는 소망함이 넘치는 자가 될 것이다.

광야를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배웠던 자들이다.
우리이 삶에 어려움이 오는 두 가지 이유
1. 불신앙 ; 하나님의 약속이 분명히 있음에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할 수 없을 때
2. 이해가 부족할 때 ;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주어지는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 이해함이 없을 때 어려움 온다.
( 내가 의지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할 때 )
*제자의 삶을 살려고 할때 가장 어렵게 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가족안에 이해함이 없을때이다
요7:1:5 에수님이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나 유대인들이 시기할 때, 예수님의 친형제, 가족이 에수님을 믿 지 않았다는 것.
세상에 그 사역을 통해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는 가족들. -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상황 속에 계셨다. (눅14:24,25)
행1:14, 예수님의 사역이 인정받음
행12:2 하나님 나라와 사단의 나라의 싸움 헤롯에 의해 그의 제자 중의 한 명이 처형 당함 :17,
15:13 예수님의 동생인 믿지 않았던 야고보가 교회를 대표해 말하고 있는 모습.
약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야고보가 됨.
유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였으며 믿지 않았던 야고보의 동생 유다.
예수님은 그의 생전의 사역기간동안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의 죽으심과 부활 후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내가 누구를, 가족을 변화시키려고 애쓰지 말라, 에수님을 좇아가는 삶을 살게 되면, 뒤로 물러서지 말고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 가족 안에 변화를 일으키실 것이다.
주의 부르심을 의심하지 말고 순종함으로 기쁨으로 나아갈 때 주께서 이루실 것이다.
고전9:4,5
요1:35-41, 45
눅5:8 베드로가 주께 헌신하기 까지 1-1년 반이 걸렸다.
베드로가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때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가족들에 대한 책임이었을 것이다.
마8:14-16 베드로가 어려움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 그의 가족 안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변화를 볼 수 있다.
베드로의 가정 안에 이 일을 행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족들에게도 그렇게 행하실 것이다.
어떠한 어려운 극복할 수 없는 상황도 우리의 헌신하고자 하는 결단 앞에 장애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눅14:27, 요19:17 주께서 먼저 자기 십자가를 지신 후에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목숨을 버릴 수 있다면, 버리지 못할 것이 없다.
참된 헌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자는 쉽게 장담하지 못하나, 주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까지, 그것까지도 주님께 맡기는, 그래서 그렇게 되어 지기를 바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요13:34 주께서 자기의 몸을 내어 주시면서 제자들을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지체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
주께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요13:1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어떤 사랑할 만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일순간 만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는 것
이 서로 사랑함,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삶은 제자의 삶에 있어 너무 중요한 것이다.
눅6:11,12 예수님을 죽이려고 처음으로 시도하는 장면. 이 때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을 예비하시면서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을 세우는 것이었다.
요18:8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지시며 보호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마음과 사랑을 제자들의 어떠함에 의지하지 않고 주셨던 예수님. 다만 주는 것으로 기뻐하며 만족하셨던 주님의 태도 눅22:61 세번 부인하는 베드로를 보시는 예수님;아무 것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러나 제자들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에수님
요17:20-23 예수님이 끝까지 간구하신 것 -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이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실 때 우리의 삶이 회복되고 강건해지고 세워질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자연적 속성(본질) 인격(하나님과 교제하는 부분) 도덕적 속성(하나님의 친밀함을 보이심)
전지, 전능 지성 = 하나님의 성품
무소 부재 감정 사랑, 자비, 충성, 온유, 절제,
↑ 의지 희락…
하나님만 갖고 계시며 ↑ ↑
은사를 통해 나타남 사람이 태어날 때 가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

벧후1:3-8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치
최종적으로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심. 하나님의 성품(성령으로 되어지는)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주님이 원하신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임하실 때, 열매와 은사가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임하실 때]
은사 열매
↓ ↓
사역 삶
↓ ↓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고전12:28-31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보이리라. = 사랑
사랑이 없을 때, 문제가 생긴다. 예) 고린도 교회-나타난 은사로 인해 가장 큰 소용돌이
속에 빠졌던 교회이다. 그릇과 같은 성품을 하나님께서 채워 쓰시려고 하실 때, 그릇을
시도록 준비된 심령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다.
요15:8, 8:29 풍성한 제자의 삶.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않으셨다. - 고독을 이길 수 있는 방법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만 참으로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제자의 삶은 풍성한 주님의
약속이 보장된 삶이다.
내 삶 속에 어떠한 씨를 뿌릴 것인가? 내가 뿌리는 씨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분노의 씨, 증오와 원망
의 씨를 뿌릴 것인가. 아니면, 사랑과 온유의 씨를 뿌릴 것인가.
진리의 말씀으로 씨를 뿌리라. 말씀에 삶을 두는 삶을 살라.
골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나타나는 열매, 결과)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있게 될 것이다.
눅12:32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 요15:26, 16:8-
주님께서는 그 때와 동일한 수준, 기대치로 우리를 부르신다.


주님 보좌앞에 머무르는 삶!
<본문 막 3:13∼15>
(막3: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막3:14)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막3:15)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막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3:23) 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
(막3: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막3: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막3:26) 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막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막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막3:29)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3:30)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주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하자. 여기에는 많은 관계가 있을수 있다.
많은 관계중에서 가장 우선되어져야 할 관계가 있다.
그것을 알아보자.
이 관계는 믿음으로 결정해야 하는 관계이다.
그렇지 않고 지식으로 알고 넘어간다면 아무런 변화나 회복이 없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을 알아보자.
그것은 주님은 나를 부르시는 자이며 나는 그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라가는 관계이다.
주님은 부르는 자, 나는 따라가는 자이다.
부르는 자는 필요해서 고르고 뽑는 명령하는 자이며, 따라가는 자에게는 그 부르심에 결정하는 사람이다.
주님은 무작정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신의 결정후에 자기의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이 원하는 댓가를 치룬후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이 관계형성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내 삶속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구체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 막 3:13 산에 오르시니... <제자를 부르신 이유, 목적>
주님은 부르시는 자로서 항상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해야 할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원하셔서 부르신 자들이다라는 것이다.
이곳에 있는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은 여러분들을 한사람 한사람 원하시기에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취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부르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탁월하셨고, 그 분의 안목과 주권과 계획을 가지고 선택하신 분이십니다.
문제는 이제 주님의 부르심이 무엇이고 그 부르심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이 선택기준을 만족시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즉 택하심은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부르심이십니다. 세상의 기준은 학벌, 출신, 재산등이 제일 우선되는 기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의 기준은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는 바보취급 당해야 하는 사람이 여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따돌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계신 분들은 한사람도 섞인 무리가 아닌줄 믿습니다.
우연히 되어진 사람들이 아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필요하셔서 부르셨음을 믿으십시오.

2.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자신과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해 부르셨다.
함께 있다는 것은 동거동락하는 생활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을 살면 자연히 서로 끊끊한 교제를 갖게 된다.
서로의 장점, 단점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자라온 배경등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르신 그 첫 이유는 그들과 함께 교제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단순한 사귐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것까지 이야기할정도의 관계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깊은 교제와 관계를 계속 갖게되면 자연히 하나님에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반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방법은 그 분 보좌 앞에 머물러 있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단11:32절에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고 강하게 되는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그것을 통해 우리는 강한 영적인 군사로 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능력있고, 강한 삶을 살려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어야만 한다.
나와 하나님과의 단 둘만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
이럴때 삶의 열매 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관계하지 않는 삶은 공허하고 곤고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삶은 나약한 자의 삶일 수 밖에 없다.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점이 내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할 수 없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 그 바쁜 가운데서도 결코 양보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앉는 시간이었다.
사역의 힘, 능력이 필요한 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 앉으라!
아주 많은 댓가를 지불하고 들어온 자들의 지속되어야 할 것, 바로 내 삶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역동적이고 실패하지 않고 낙망하지 않는 삶.

예)
1) 주님의 교제
한적한 곳에서의 교제는 주님의 능력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막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1:33) 온 동네가 문앞에 모였더라
(막1: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막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눅4:31∼42까지 주님의 사역은 회당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침. 시몬의 장모 열병을 고침(38-39), 해질적에 각색병든 자고침(40-41)
(눅4: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막1: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눅5:12∼16 벙자들이 몰려 오지만 그들을 피하였다.
주님의 우선 순위결정을 볼 수 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해도 먼저 하나님과 관계를 갖었다.
(눅5: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눅5: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눅5: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눅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눅5: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요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출33: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출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출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벧후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벧후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벧후1: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인내에 경건을,
(벧후1:7) 경건에 형제 우애를,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벧후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출처 : AMHAENG@SA With A Mission
글쓴이 : 바비 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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