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제목: 평신도 훈련을 통한 신유사역에 대한 연구
제목: 평신도 훈련을 통한 신유사역에 대한 연구
CHAPTER 1
Introduction
교회의 지상 존재 목적의 일차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하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의 마지막 말씀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대로 성령이 오순절에 이미 이르렀고 그후 복음은 세계를 향하여 치닫게 되었다. 이 말씀에서 본다면 예수께서 오늘날 교회에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성령의 권능은 비상한 능력을 가리킨다. 이 능력은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었고 복음의 증인으로 손색이 없도록 만들었다.1 이 능력을 받아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것이다.
Johannes Blauw는 이 구절이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로 번역될 수 있다고 하였다.2 그러면 성령의 권능을 받고 복음을 전파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전인적인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으며, 병든 자를 고치셨다(마 4:23). 여기서 병든 자라고 하는 개념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한다고 이해해서는 않된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라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마 4:24).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라는 말은 바사노이스( )로서 이 말의 의미는 'torment', 또는 'pain'으로서 두 가지로 이해 된다. 하나는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얻어지는 고통이며, 다른 하나는 정신적 괴로움,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을 포함한 육체적 질병으로부터의 치료를 의미하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 2장 17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병든 자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곧 건강한 자는 의인이요, 병든 자는 죄인이라는 결론이다. 병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예수의 사역이다. 김응조는 마태복음 4장 23절의 주석에서 “이것이 메시야의 삼중 임무니 생(생), 영(영), 신(신)에 관한 삼중 구원이다”고 했다.3 William Hendricksen 역시 24절의 주석을 통하여 “그들로 영 육간에 온전케 하시며”라고 하였다.4 따라서 예수의 사역은 전인 구원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렇다면 예수의 뜻을 수행하는 오늘날 교회들 역시 인간의 전인 구원의 관점에서 사역이 수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즉 영적인 관심과 함께 인간의 육적인 문제까지 사역을 확장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연구자는 이러한 예수의 신유 사역을 프로그램화하고 평신도들에게 적용하여 신유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본 프로잭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Setting
본 논문의 배경은 인천 백마장제일교회(Incheon Paek Ma Jang First Church)와 그 교회가 위치한 인천시 부평구이다. 백마장제일교회는 1982년 3월 23일 장년 2명 유아 1명의 구성으로 설립되었다. 백마장제일교회가 시작된 장소는 약 30평의 예배당 공간이 있고, 이 곳은 과거에 닭을 사육하던 축사였으며 그 후에는 소를 사육하였고 교회가 들어서기 전에는 낚시대 만드는 공장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교회주변에는 농사를 짓는 밭과 가옥으로 형성이 되었으며 2km 전방에는 자동차 공장부터 각종 공장들이 들어서 있는 공업단지가 있다. 또한 백마장제일교회 주변에 공장 근로자들이 가옥을 세 내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심신의 피로와 공해로 인한 질병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이 곧 선교의 대상이 되었다. 연구자 역시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결핵으로 1년 7개월 동안 투병생활을 한 경험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신유의 체험을 하게 되었기에 각종 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그들을 치유해 주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연구자의 기도 제목이었다.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지역은 원래 전형적인 도시 근교였으나 인천
광역시의 시계가 확장되면서 새로운 주거지로 부상되면서 새로운 아파트가 속속 새로이 세워지고 기존에 있던 재래식 주거단지가 재개발로 인해 신흥주택지로 바뀌어가고 있는 지역이다. 백마장제일교회가 있는 곳은 개척 초기에는 의식 수준도 농촌이나 별 차이가 없었으나 최근에는 인근 수도 서울에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속해있는 관계로 주민들의 의식 수준은 대도시의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서울이나 인천의 비싼 주택을 피해 내 집 마련 차원에서 모여든 중산층 주민이 대 다수이다.
따라서 교회의 멘버들이 공장과 함께 이주를 하게 되었고 개척 한 해 83년에 43명의 교인이 84년에는 13명에서 나중에는 3명으로 감소하게 되었다. 목회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에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작정 금식기도를 하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자에게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사야 61장 1절 말씀을 주셨다. 연구자는 그후 지역의 마음 상 한자를 위하여 신유 사역을 하기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인천광역시는 2000년대 인구 증가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여지는데 본 교회가 위치한 부평구는 현재 약 498,415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이다. 그 중에서 산곡 1동은 전형적인 자연 부락으로 인구 비율을 보면 원주민이 30 percent, 외부에서 유입한 주민이 70 percent 정도로 추산된다. 부평구의 교육시설은 유치원이 약 54개, 초등학교가 28개, 중학교가 16개, 인문계 고등학교가 7개, 실업계 고등학교가 3개 있으며 종교 현황은 기독교가 약 307개에 성직자가 615명, 성도 수는 약 73,263명, 카톨릭교가 10개 교회에 성직자 24명, 교인 수는 약 43,340명이다. 또한 불교도수는 약 116,170명으로 조사되고 있다.5
지금은 축사였던 곳에서 주거 재 계발지역인 곳으로 이주하여 대지 180평에 연건평 310평의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현재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담임목사 1인, 전도사 3인 장로 2인, 권사 16인, 집사 70인, 권찰 26인, 사무원 1인, 기사 1인, 유치원 교사 4인이며, 각 부서로서는 남전도회 2개, 여전도회 6개, 유치부 1개, 유년부 1개, 어린이부 1개, 학생회 1개, 청년회 1개, 성가대 2개, 중창단 3개, 장학회 1개, 선교회 2개이며 구역은 30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0여명의 멤버로 부흥하고 있다. 백마장제일교회의 교인 연령 별 분포는 20대가 10 percent, 30대가 40 percent, 40대가 30 percent, 50대 이상이 20 percent로 구성되어 6
주거환경은 일반 주택 50 percent, 아파트 40 percent 정도이며 상가와 공장이 10 percent로 되어 있다. 정부의 주거지역 환경을 변화시키는 차원에서 공장을 이전시키고 지역을 점차 아파트화 되어가고 있다.7
Statement of the Problem
한국 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졌으나 급 성장하였다. 교회의 크기로는 세계적인 교회도 있고 열심으로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새벽기도회, 금요철야 기도회 등으로 영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열심속에 교회는 부흥하게 되었고 그 부흥의 요인이 전도와 기도와 설교였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또 다른 부흥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배풀어 주신 신유의 역사이다.
본 연구자가 담임하고 있는 백마장제일교회는 예수교 대한성결 교단에 속해있다. 성결교단은 신유가 4중 교리 중에 3번째로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결교단의 속해있는 교회들이 오순절 교단에 속해있는 교회들에 비하여 신유사역이 활발하지 못함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모든 교회처럼 백마장제일교회는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구원의 길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연구자는 신유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였으며, 본 교회 성도들에게 성서적인 신유에 대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신유의 수용문제는 양분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교회가 이러한 신자들의 신앙지도를 말씀으로 해 주어야 할 백마장제일교회가 안고 있는 신유에 대한 문제점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백마장제일교회가 있는 지역은 원주민들이 아직도 많이 상주하고 있기에 타 지역에서 이주하여 온 사람들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원주민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문제점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되고 병들거나 사고가 나면 하나님께 잘못하여 벌을 받아서 일이 발생하였다는 문제점이다. 한국의 성도들이 가정이나 자신이나 가족에 어려움이 생기면 사찰이나 무당굿, 점쟁이를 찾아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의 현실을 해소하고 있다.8 이런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경험하고 있는 신자들이 질병이나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것도 샤머니즘적인 자세로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는 백마장제일교회 속한 교인들 중에서 일부의 High Class Man들은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신유에 대해서 대부분 방관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경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병 고침 받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믿으려 하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기적 자체가 있음도 알려고 하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
이다.
셋째는 신유 신앙의 이해 부족이다. 성서에 일어나고 있는 병 고침이나 많은 이적들을 받아들이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너무 지나치게 신비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는 성도들도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백마장제일교회는 대부분의 교인들이 신유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능력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은사를 받았다든지,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든지, 심방 하는 권사들에게) 나타난다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신 유를 행하는 사람과 그러한 능력이 없는 사람사이의 구분은 교회의 성장에 장애가 될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같이 당파가 일어나 분열을 가져다 줄 요소가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본 연구자는 신유를 평신도들에게 교육하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신유를 교육하므로 백마장제일교회의 성도들의 삶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낼 수 있음을 인식시키고, 성경공부와 기도훈련을 통해서 그러한 신유가 특별한 사람에게만이 아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믿도록 하였다.
Background and Significance
20세기의 과학문명은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 주었다. 특히 현대 과학문명은 성서가 제시하고 있는 신유를 중심으로 한 각종 이적들을 성서의 한 모퉁이로 몰아 넣었다.9 이 여파는 물론 연구자가 사역하고 있는 백마장제일
교회도 미치게 있었고, 이러한 문제가 교인을 교회에서 떠나게도 하며 어렵게 전도해서 믿음을 같게 되었던 신자들을 세상으로 빼앗기는 기현상도 있었다. 연구자는 목회 현장에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문제는 신자들이 각종 질병과 삶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교회가 그들을 위하여 무엇인가 도와주어야 하는데 때로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 날 때도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역시 사람들의 질병 문제와 그에 대한 치유문제였다. 백마장제일교회는 일러한 문제들 속에서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었다.
첫째는 교회의 구성원의 변화이다. 개척초기에는 교인의 연령이 50대가 많아서 고령으로 인한 질병의 환자가 많았다면 현재는 30대에서 40대가 70 percent의 교인으로 멘버가 교체 되면서 젊은 층에서 많이 질병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50대 이상의 신자들은 고령으로 인한 질병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기를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는 반면 배움이 있고 젊은 신자들일수록 성서의 기적을 거부하거나 믿음으로 치유 받는 다는 사실보다는 병에 대한 의학적인 치유가 그들에게 더 필요할 뿐이고 성서의 신유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이다. 여기서 목회자가 성경의 기적을 가르치면서 그들을 성경의 기적속으로 이끄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둘째는 교회가 세워진 주변 환경이다. 본 교회가 위치한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1동 87-927번지는 1983년도만 해도 전형적인 자연 부락이었다. 대개의 환자들이 낙후된 주거 환경과 변변치 않은 직업에서 오는 경제적인 열악한 조건 때문에 가정불화, 자녀의 가출, 심리적인 불안, 교육부족에서 오는 열등감, 식생활에서 오는 영양실조나 그로 인해 나타나는 질환이었다. 그런데 인천시가 직할시가 되고 곧이어 광역시가 되면서 시의 성장과 확장으로 말미암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부터 인근의 아파트단지와 함께 인구밀집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백마장제일교회가 위치한 지역이 인천중심지에서 보면 상당히 변두리이지만 지방 정부의 주택정책에 의해 택지가 인근에 조성되면서 인구밀집 지역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자 발생하게 되는 질병이나 질환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질병의 종류도 다양하게 발생하고 그 질병에 대한 기도 모임도 반복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40대 사망자가 가장 높은 나라이며, 또한 40대 환자의 질병 중 발생빈도가 가장 높은 것이 간 질환이었다는 것이다. 과로로 사망하는 자와 소화기 질환의 질병도 빈도가 높은 질환들 중의 하나였다.10 다른 하나는 도시화되면서 시간과 일에 쫓기는 날이 많아지고,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서 간 기능이 저하되고, 기타 여러 요인으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만성적인 질병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건강에 있어서 치료의학 보다는 예방 의학이 중요하므로 기독교 목회에서의 치유는 예방과 심리적 안정에 더 강조 점을 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성경이 직접적인 치유보다 예방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이야기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Lawrence J. Crabb과 같은 이는 ‘Effective Biblical Counseling' 에서 현대에 와서는 전인적(全人的)인 인격과 인간의 가능성, 그리고 자아의 자유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열망은 사라지게 되었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조차도 행복의 길이라고 생각되는 인간적인 관심사에 더욱 마음을 쏟고 있다고 하면서,11 모든 성도들이 더욱 주님과 같이 되도록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하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도록 권면 하는 것, 바꾸어 말하면 성숙이 기독교 치유상담의 책임이며 목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의 목적 및 한계, 그리고 방법에 대한 정의는 결국 우리는 어떤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냐는 문제와 상관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론에 있어서 어떤 한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질병을 보게되고 또 그에 따른 해결책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인간관을 견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을 삼분설로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12절과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을 근거로 하여 볼 때 인간은 영, 혼, 육의 구성을 가진다. 최근에는 영, 육, 혼과 같은 술어들이 인간의 분리될 수 있는 여러 영역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보는 여러 방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12
따라서 이러한 단어들이 인간을 구성하는 분리될 수 있는 부분들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 다는 것이다.13 다시 말하면 인간의 유기적 통일성을 강조하는 전인(全人)개념이 오늘날의 성경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구분될 수 없는 전인 (全人)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치유와 치유상담의 영역은 훨씬 확대될 수밖에 없다. 실제에 있어서도 선진교계에서는 복음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어서 의사가 목회를 하는 것인지 목사가 치료를 하는 것인지를 분별하기 어렵게 되고 있는 실정이다.14
그뿐만 아니라, 일부 신학교- 특히 풀러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육체와 정신, 그리고 영혼의 전인적 치유를 주장하는 이른바 치유목회(Healing Ministry)가 강조되고 있는데, 아직도 신유(Divine Healing)에 대한 성경적 근거에 대한 논쟁이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교계에서는 무분별하게 치유와 축사 사역이 오용되어 소위 가정 제단운동이니, 귀신파니 하는 잘못된 운동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분명히 하여 교우들에 대한 기독교적 치유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고 이를 프로그램화하여 개 교회 사역에 적용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치유사역은 본 교회의 목회 갱신 차원에서 볼 때 중요하다. 교회안에 치유 역사가 일어나게 되면 침체된 교회에 활력소가 불어 넣어 질 뿐 아니라 불건전하게 진행 되던 음성적인 사이비 치유활동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치유사역은 결과적으로 복음전파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초대교회 때와 같이 복음증거와 함께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더러운 귀신들이 쫒겨 나간 다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은 더욱 잘 전파될 것이다.
Hypothesis(가설)
본 연구자는 백마장제일교회 소속된 신자들에게 성서적인 근거를 통한 신유사역에 대한 인식과 그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연구자가 개발한 신유사역 훈련
프로그램을 누구든지 일정기간 동안 훈련을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가설을 세우게 되었다.
첫째는 1주일에 2시간씩 10주동안 20시간의 세미나를 통하여 신유 훈련을 받은 신자들은 그렇지 않은 신자들보다 신유사역과 전인치유에 대한 이해가 증대될 것이다.
둘째로는 성경적인 신유사역을 훈련받은 신자들은 그렇지 않은 신자들보다 실제적인 신유의 역사가 더 일어나며 이에 대한 확신도 더 깊어질 것이며 아울러 평신도들이라 할 지라도 실제적인 신유사역을 행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로 신유사역이 어떤 특정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라 믿던 신자들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훈련을 받게 되면 신유에 대한 인식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의식으로 향상될 것이다.
넷째는 훈련받은 모든 신자들은 신유에 대한 믿음의 변화를 통해 질병이 생기면 먼저 병원을 찾기에 앞서 신유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서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기도의 습관을 갖게 될 것이며 기도의 열기는 증진될 것이다.
다섯째는 신유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 기도와 함께 병을 고치게 되는 기쁨과, 간증을 통하여 훈련받는 신자들의 믿음이 모두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게 되고 이러한 체험된 사실들은 즉각적으로 복음 전파에 활용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활용은 신유사역을 실습하면서 진행되어질 것이며,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경험을 목격할 것이다.
여섯째는 이 훈련을 통하여 신유사역 훈련에 참여한자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삶이 헌신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치료에 대한 간증만 들었기 때문에 방관적인 입장이던 신자들의 변화가 예상된다.
일곱째는 이미 질병에 있는 신자들이나 가족 중에 병에서 고침을 받아본 신자가 있다면 훈련보다는 기도원이나 자신들의 기도를 더 선호 할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신유에 대한 사역이 평신도들을 통하여 활발하게 나타남으로 교회는 새로운 부흥의 동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백마장제일교회가 성장하며 나아가서는 본 교단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어 성결교회의 잃은 신유를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Definitions of Terms
본 연구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용어 다섯 가지의 정의가 필요하다.
첫째는 Divine-Healing(신유)의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신유를 말할 때 치유(Healing)라는 말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치유(治癒)라는 표현은 신유와 혼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치유는 의학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한 치료라는 개념을 희석시키는 말이다. 기독교회에서 사용하는 치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의한 치료만이 신유이다.
이것은 Faith Healing과 구분이 되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Divine Healing
이다.15
둘째는 Faith-Healing의 개념이다. 이는 다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믿음의 신앙으로만 하나님께 직접 치료 받는 것을 말한다16.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치료를 받는다는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믿음의 치유는 신유의 한 방법으로서 나타낼 때 사용된다.
세번째는 전인 구원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는 인간의 구성에 있어서 인간을 하나의 합일체로 보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 구성에 관한 이론이 다양하게 주장되는데 먼저는 이분설이다. 이는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17 다른 하나는 일분설이다. 곧 인간은 하나의 단일체로서 구성 부분으로 절단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18 마지막은 삼분설이다.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서 루터는 영과 영혼과 육이라는 표현을 하였다.19 본 논문은 삼분설을 지지한다. 인간이 삼분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사실 이 구분된 것들은 개체로써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의 사역은 전인 구원을 위한 사역이었고 그러한 개념에서 본 논문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네번째는 혼적 신유, 혹은 혼적 질병이라는 용어이다. 이 용어를 내적 치유라고 말하기도 하고 감정 치유라고 하기도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러한 용어보다는 혼적 신유라고 사용할 것이다. 전인 구원의 개념에서도 살폈지만 인간은 삼분으로 되어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죄 문제를 통하여 영적인 신유를 주셨다. 그리고 성경의 여러 기사들을 통하여 혼적인 신유를 베푸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감정, 또는 내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본 논문은 분명한 용어로서 혼적이라고 사용한다. 왜냐하면 감정은 혼의 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장종용은 “인간 구성 요소에 관한 연구”에서 혼의 기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혼은 자의식적 생명으로서 이 자의식은 육체를 통하여 현상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혼은 의지의 기능을 가지며 감정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20
다섯번째는 평신도 개념이다. 평신도는 영어로는 Layman, 독일어로는 Laie, ‘백성’을 의미하는 희랍어 라오스( )에서 유래된 것으로 목회자, 또는 성직자와 구별된 일반 교회의 신자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장로, 권사, 집사, 권찰, 입회인 등을 지칭한다.21
Limitations(한계)
한국의 성결교회는 4중복음을 교리로 삼고 이를 가르치는 교단이다. 즉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복음을 교리화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신유는 교회 내에서 일반화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에 대한 이해는 그리 확실치 않다. 따라서 본 논문은 평신도들에게 신유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훈련을 통하여 목회자 뿐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신유를 통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야 하겠다는 것이 본 연구자의 의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만으로 연구는 모든 것을 만족할 수는 없다. 특히 이러한 연구를 위한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한계를 만나게 된다.
첫째는 훈련 대상의 제약이다. 사실 실험을 통한 연구 분석이라 할 수 있는 본 프로그램에서 훈련의 대상이 백마장제일교회 신자만을 훈련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한계를 둔다. 그러기에 제한된 훈련생들을 가지고는 대외적인 효과 면에서는 아무래도 그 신뢰도가 약하다고 할 것이다. 비록 연구자의 교회에 한정된 전제를 갖기 때문에 한국 전체의 교회를 대표한다고는 하기 어렵다.
둘째는 교육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은 신유를 은혜로 인식하기보다는 하나의 성령의 은사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연구자도 은사로서의 신유를 가르쳐 왔다. 때문에 교육을 통하여 그들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깨뜨려 질 것인지는 사실 예측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지고 있다.
셋째는 본 연구는 신유역사가 기계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으므로 그것이 항상 과학적인 데이터로 산출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밝혀두는 바이다.
넷째는 백마장제일교회의 틀과 한국인의 사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형교회나 신유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진 교회는 적용을 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교회나 신유에 대한 계략적인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
다섯째는 본 연구는 신유를
Assumptions(가정)
본 연구자는 몇가지 가정을 해 보았다.
첫째로 연구자가 목회하고 있는 백마장제일교회에서 신유개발 프로그램을 제시하면서 신유는 은사도 있지만 보편적 은혜이기 때문에 누구나 체험 가능한 것이라고 제안한다면 많은 평신도들이 호기심을 갖고 참여 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둘째로 현대인들은 갖은 질병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신유를 위한 교육은 곧 신유를 체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함으로 흥미를 갖고 참여할 것이다.
셋째로 신유 훈련 중에 학습자 자신이 신유의 현장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체험할 것이다.
넷째로 신유 훈련을 하는 중에 어떤 이는 잃어버렸던 신유의 은사를 개발할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이들은 신유의 은사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은사보다 더 중요한 보편적인 신유 은혜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다섯째로 평신도들은 훈련을 받는 중에 신유는 결국 말씀과 믿음과 기도의 복합체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찾을 것이다.
Chapter 2
Theological, Biblical and Historical Basis
Introduction
신유를 다룸에 있어서의 문제는 우리가 어떤 인간관계를 가지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만약 인간의 구원의 길과 믿음의 길에 있어서 고행(苦行)이 중요하다는 중세적 인간관에서 보면 질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질병을 통하여 성도들을 성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인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구분될 수 없는 단일 신체인 전인(全人)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단지 영적인 구원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으로 부터의 구원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영적 문제나 정신적 질환뿐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 까지 치유할 수 있다고 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에 근거하게 될 때 육체의 치유는 의사에게, 영의 치유는 목회자에게 속하며, 정신의 치유는 정신 의학자의 영역이라고 하는 엄격한 구분은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적 질병과 정신질환 등이 상호 연관성이 있다면 확실하게 구분되는 독립된 치유 영역은 제한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인적 인간관과 전인구원의 측면에서 본다면 목회자의 치유사역과 교회의 치유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목회자의 목회영역은 확대될 수밖에 없으므로 교회 성장은 더 가속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신학적인 관점에 전인구원(전인치유)문제를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Theological Basis
신유의 정의 신유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유의 이해에 대한 관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병에 대한 개념의 정립이 각기 다른데서 오는 차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신유에 대한 정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고, 정의되어진 것들을 보도라도 신유의 한쪽만을 보는 경향으로 말미암아 본 연구에서는 먼저 신유를 이해하는 표현들과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던 것들을 살피면서 신유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밝히려 한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헌장에서 신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체의 질병을 고쳐 주시는 신유를 믿는다. 신유라 함은 하나님의 보호로 육신이 항상 건강한 것과 병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병 고침을 받는 경험을 이름이니 이는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약속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다.”22 김상준은 “신유란 의약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믿음으로 기도하여서 병 고침을 받는 것”23이라 하였고, 이명직은 “신유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신자가 질병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약속하신 성경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향하여 그 병을 고쳐 주실 줄로 믿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는 것이 신유”라 하였다.24
이러한 정의는 신유가 단순히 신체적인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Tom Marshall은 인간이 치료받아야 할 범위를 밝히고 있다. 감정의 치유와 영에 대한 치유,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치유, 그리고 관계적 치유가 그것이다. 그는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이 되어 있지만 이 셋은 단일 인격으로 기능 한다고 하면서 어느 한 부분이 손상되면 다른 부분도 역시 손상을 갖는다고 했다.25 뿐만 아니라 그는 치유를 구속과 병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26
이러한 이해를 따르면 이성주의 신유에 대한 정의는 정당하다. “Divine Healing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서 병에서 깨끗하게 낫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유는 육체적인 질병에서 뿐 아니라 정신적 결함, 영적인 정죄 상태에서 구원을 받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27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인간 개인에게만 국한된 신유로써 개인 외적인 신유는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 개인 외적인 문제로서는 사회적 신유와 인간 관계에서의 신유가 있는데 이것도 신유에 포함되어야 한다. 따라서 신유란 “육체적, 혼적, 영적 질병에서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세계와 그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질서 파괴로부터 온전한 회복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신유에 대한 신학적 논쟁
신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두 가지로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하나는 사도시대 이후로 신유를 포함한 기적들은 그쳤다고 보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이것들은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28
전자는 사도시대에 특수한 관련성을 가지며 그 때에만 독특하게 주어졌던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이 주장하는 기적들이 오늘의 시대에 완전히 그쳤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께서 활동하신 시대나 그 이후의 사도시대에 나타났던 능력만큼 오늘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복음 전파를 위한 목적에서 그리스도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해야 하고, 또한 처음 기독교의 확산을 위한 목적 속에서 그러한 것이 디모데의 위염에 대한 약물 치료를 권했던 것과(딤전 5:23), 바울의 육체적 가시에 대한 치료되지 않은 것(고후 12:7), 그리고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남겨두고 떠난 것(딤후 4:20),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에 보내지기 전에 심하게 앓았다고 보고된 것(빌 2:30) 등이다.29
반면에 후자는 그러한 독특성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와 같은 기적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전자의 주장과는 대조를 이룬다. 즉 오늘날에도 예수시대나 사도시대와 같은 형태의 기적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들의 중요 핵심구절은 요한복음 14장 12절과, 마가복음 16장 15절부터 18절, 그리고 마태복음 8장 17절 등이다.30 이 논문이 추구하는 바는 후자의 견해로써 오늘날까지도 신유의 기적들은 나타난다고 본다. 이러한 기적들은 성경에서 그 근거들을 가지고 있으며, 신학적인 배경 또한 확고하다.
Westminster신학교의 교수인 Richard B. Gaffin은 그의 저서 성령 은사론에서 신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현재의 신유는 예수와 사도 시대의 신유 기적에 나타났던 만큼 크고도 놀라운 주권을 가지지 못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능력으로 특히 믿음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의 믿음과 기도로써 모든 질병을 전부 혹은 거의 다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병고침 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이 최종 결정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결코 신유는 사람의 역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하나님은 모든 질병이 고쳐지기를 원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 교훈을 피상적인 것으로 왜곡한 것이다. 그것은 혼란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육체의 고통을 포함한 고난의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대한 축복을 잃기 때문이다.31
이러한 Gaffin의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모든 질병이나, 거의 모든 병을 고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육체의 고통을 통하여 축복을 주시기도 한다.
Francis MacNutt는 “하나님께서 질병을 보내셨다거나 그분이 사람들에게 그 질병을 견뎌 낼 것을 요구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거부 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강요하는 처사이다. ~~~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부지 중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희생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는 이방 신과 같은 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라고 반론을 제기한다.32 Ken Blue 역시 질병을 통해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신유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은 2~3세기에 발생했던 로마 제국의 교회 박해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헬라 철학에서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역시 종교 개혁의 영향하에서도 이어지고 있고, 따라서 오늘날에도 많은 교인들은 질병이 필요한 것으로 여기며 치유를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에 대한 반박에서 ‘고질적인 질병’을 들어 그들의 주장을 격하시키고 있다. 질병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다. 예수께서는 질병을 승인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하였다.33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약간의 무리가 된다고 본다. 성결대학교 교수인 이성주는 성경에는 질병의 목적이 있는 것들이 있다. 즉 징계(고전 11:29-32, 레 26:14-16), 회개(대상 21:16-17, 요 5:4), 그리고 연단(욥 33:9-11)을 목적으로 질병이 올 수 있음을 말한다.34 이명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괴롭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주께서 그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징책 하실 때 병으로 하신 즉 그 사람이 병을 인하여 깨닫고 회개하고 정의로 돌아와 완전케 되느니라” 고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병을 주어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느니라”고 하였다.35 그렇다고 모든 질병이 이러한 목적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즉 특별한 목적 속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R. B. Gaffin은 바울의 ‘육체적 가시’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육체적 가시는 어떤 종류의 질병이거나 육체적 고통이었고 그것은 만성적인 고통이었으며, 그 고통은 심한 것이었다”고 말한다.36 그러나 G. P. Duffield와 N. M. Van Cleave는 바울의 가시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고, 그러기에 그것이 반드시 질병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가시가 어떤 것이든지 간에 바울은 그것에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질병에 걸리지 않았었다고 한다.37 따라서 Gaffin의 인용 구절에는 문제가 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Gaffin이 설명한 부분에서 현재의 신유가 예수 시대나 사도시대의 신유 기적에 나타났던 것만큼 크고도 놀라운 주권을 가지지 못한다는 표현에 있다. .
Prinston 신학교의 교수였던 Benjamin B. Warfield는 그의 저서 Miracles: Yesterday and Today, True and False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하나의 기적을 행하던 교회였다. 그러나 특별한 기적의 은 사들이 사도들과 함께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증거이다. Origen 에 의한 단 한 번의 기록만을 제외하면 사도시대와 그 이후 4세기 사이에 그런 것들에 대한 증거가 하나도 없다. 도리어 바울은 이러한 기적들 보다는 믿음, 소망, 사랑의 보다 높은 은사들이 훨씬 탁월한 방식으로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을 바랐다.38
역시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도 연구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Warfied의 말 자체에서 놀리적 모순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Origen에 의해 단 한 번의 기록만을 제외한다면 다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그의 말에서이다. 한 번이라도 나타난 현상은 곧 있을 수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전혀 일어나지 않았어야 그러한 기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이 그쳤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행전 28장 28절을 사용하는데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는 말씀이다. 그러기에 표적은 끝났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39
에버딘의 그리스도 대학의 J. S. McEwen은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133호에서 "The Ministry of Healing"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역시 치유의 역사가 과거의 한 시기에 발생했었다고 주장한다. 다음의 그의 글을 보자.
과거에 교회가 지녔던 모든 미덕을 오늘날 교회가 명백하게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지성의 일반적 착각이다. 세속의 인간은 그의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므로 자신의 개화를 정당화하고 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그 이상적인 과거를 꿈꾸므로 그의 교회를 정당화하려 한다. ~~~ 교부들은 때로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치유의 기적이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과 같은 것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말을 삼가고 있다.40
McEwen은 기독교에서 나타나야 할 기적들을 도리어 부정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전혀 기독교는 기적을 보일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는 그의 글은 문제성이 심각하다 할 것이다. 예수 시대나 사도들의 시대의 기적들이 오늘날에는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견지인 것으로 생각된다. 만일 그의 표현대로라고 한다면 오늘날에 신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진 것 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순환론적 역사관이란 역사 과정을 순환하는 수레바퀴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수레가 일회만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면 역시 역사는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순환론적 역사관은 중국, 인도, 중동, 그리스-로마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것이다. 순환론적 역사관은 이상적인 과거를 꿈꾸며 미래에 그날이 올 것을 기다리는 사상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기독교적 역사관에 배치되는 것이다. 기독교적 사관은 일직선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창조로부터 시대의 종말을 맞는 것까지의 역사관이다.41 이는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주는 표현이다. 교부들이 말하지 않았다고 기적이 없다고 하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이 전혀 말하지 않았다고 그가 과연 자신할 수 있겠는가를 되묻고 싶다. 앞에서 워필드가 지적한바와 같이 비록 한번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Origen은 분명한 표현을 하였다. 물론 McEwen은 자신의 글에서 Origen의 표현은 당대의 현상으로서 실제로 목격한 목격자였음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42 여기서 Origen의 표현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가진다. McEwen의 말대로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은 해석의 문제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Origen은 자신의 표현을 분명히 했다. 변증적이며 논쟁적인 그의 작품인 켈수스 반박론에서 “병든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한 행위”와 그외의 사실들을 통하여 켈수스가 최고의 경멸로 조롱하던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에 대하여 변증하고 있다.43
영국 기독 의사 연구회에서 활동하였던 V. Edmunds와 C. Gordon Scorer가 연구회에서 토론되고 논평되었던 신유(信癒)를 공동으로 편집한 Some Thoughts on Faith Healing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4
바울 자신도 육체적 질병을 가지고 있었으나 치료되지 않았고, 또한 위염을 앓 고 있는 디모데에게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 약물을 복용할 것을 권면하고 있 다. 신유의 은사가 교회의 태만과 불충실 때문에 상실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실 체화 할 수 없다. 특별한 은사는 그 주요 목적을 이루고 그치게 되는 것이다. 병고치는 은사는 사도들과 그들이 위임해준 사람들이 죽은 후에는 여전히 행해 지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가 별로 없다. 교회사 시대에 역시 악한 영들을 몰아 낸 사례일 뿐이며, 오순절 운동이나, 카리스마적 운동 쪽에서의 주장들을 평가 하려 할 때 이러한 현상들은 현대에 와서 두드러진 것으로 보고 접근하여야 한 다. 그러나 오늘날 병 고침의 현상이 주님의 그것과 같다거나 또는 모든 병 고 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주장은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45
역시 기독 의사 연구회의 견해도 받아 들이기 어렵다. 특히 디모데가 약물을 복용할 수 있도록 바울이 권면했다는 것은(딤후 5:22-23)바울이 신유를 통하여 고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역사는 때로는 의술을 통하여, 때로는 약물을 통하여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고 의술이나 약물 자체가 하나님의 치료하심은 아니다. 이성주는 의술에 의해 치료를 받더라도 계속적인 기도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46 뿐만 아니라 디모데에게 사용하라고 권면한 포도주에 대해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이명직은 여기서의 포두주는 약물이 아니고 음식조절에 관한 권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에베소에는 수질이 나쁘기 때문에 냉수보다도 부드러운 포도주를 마시라고 한 것이며 포도주는 음료수와 같은 것이므로 약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다.47 그렇다고 포도주를 음료수로 즐겨 마셔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회복되었을 때에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상처에 약을 썼다는 것은 당연한 일 중 하나였다(왕하 20:7). 그렇다고 히스기야가 신유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오늘의 병고침이 주님의 그것과 차이가 있다는 표현 역시 받아 들일 수 없다. 성서적 기초에서 다루겠지만 주님은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셨다. 도리어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요 14:12).
이들의 주장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이들이 신약을 중심으로 한 신유의 사건들을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구약의 시대에 나타난 신유의 기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려면 구약에서의 신유를 역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이들은 구약에서의 신유에 대해서는 너무 약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48 그러나 이들도 분명히 구약의 기사들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시대로부터 사도시대까지 신유의 역사가 지속되었다면 그래서 약 4천여년의 신유 기적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그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그쳐야만 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이들의 큰 약점이라고 본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 첫째, 성경시대보다 오늘날의 신유는 현격히 그 크기에 있어서 감소되어 나타날 뿐이다. 둘째, 초기 사도시대 이후 3세기간의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표적이 끝났다. 셋째, 오늘날 신유를 주장하는 자들은 과거 기독교의 이상을 꿈꾸며 그것들을 이용해서 교회의 정당화를 꾀하려 할 분이다. 넷째, 신유에 대한 주장은 현대의 두드러진 현상일 뿐이다. 성경에서 조차도 신유의 은혜가 없던 경우도 있다.49
로마 카토릭의 신부인 Francis MacNutt는 오늘날의 신유 역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기독교의 살아 있는 전통안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에로의 복귀를 보고 있는 중인데 2천년 전 에수님이 그의 치유사역 안에서 행하셨던 것에 대한 보다 생생한 깨달음으 로 우리를 다시 인도해 주고 있다.50
신유의 기적들은 일시적 현상으로서 끝난 것이 아니다. 즉 단지 교회를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시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를 특징지웠던 치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계속 일어나야 한다. 홰냐하면 여전히 오늘날에도 병든자들은 있으며, 여전히 인간은 온전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M. T. Kelsey는 현대의 신학이 전반적으로 신유데 대한 주제들을 다루는 것을 피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독교적 신유에 대하여 깊이 있는 학문적 연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 아래 오늘날의 진정한 치유 목회를 위한 신학적 근거들을 세우고자 Healing and Christianity라는 저서를 남겼다.51 이 책에서 그는 그릇된 신유관에 대하여 현대 기독교의 견해를 네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종교적인 신유는 피상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 질병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훈계적인 선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셋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견해이며, 넷째로는 자연볍을 깨뜨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52 그는 이러한 반론들에 답변을 하면서 결론적으로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는 신유가 성행하고 있는데 “신체적 치유는 살아 있는 과정이며, 관련된 세포들과 그러한 세포들을 창조하신 분에게만 알려지는 내적인 신비이다. 의학적인 것을 통하여 신체적으로, 정신 의학을 통해서는 정서적으로, 성례전적인 행위와 영적인 지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하였다.53
Healer로서의 삼위 하나님의 사역
구약성경에서 치유의 주체는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의 신유는 하나님이 직접 치료하신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신유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직접적인 사역이셨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기사를 통하여 두 번에 걸쳐 제자들을 사역자로 삼으시기도 하셨다.(막 6:7-13, 눅 10:1-17). 그리고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교회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유의 은혜가 성령의 사역으로 이해되어지며 성령의 사역에서는 직접적인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인간을 도구로 사용함으로 성령의 치유 사역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각기 다른 시대에만 사역을 수행하셨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즉 구약의 시대에도 성령의 사역은 함께 이루어졌으며, 신약의 시대에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Tom Marshall은 네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성령은 예수의 사역 가운데 치유를 나타내시는 여호와의 능력(Greek)이셨다(막 5:30, 눅 5:7, 6:19, 8:46). 둘째, 성령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손’ 이셨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이들과 또한 함께 계신 것이었다(요 14:26). 넷째, 이들은 동일한 능력이 동일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들에게 역사된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받았다(눅 24:49, 행 1:8).54
성부 하나님의 사역.
인간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완전자에서 불완전자로 전락하였고, 따라서 인간은 그 죄의 결과 중 하나로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이 질병에서 치유되기를 바라고 인간이 그들의 믿음을 통하여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기를 원하신다. 인간이 믿음을 갖을 때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질병을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치유에 있어서 주체자이시다. 하나님의 치유가 아니면 그것은 진정한 치유라고 알 수 없다. 물론 사단의 영역에서도 치유의 기적들은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치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보이시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과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여 내 계 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빌 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니라 이 구절에서 분명한 두가지 표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치료하시는 주체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치료를 받기 위한 인간의 반사 조건으로서 하하님의 말을 청종하고, 말씀을 지켜햐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다시말하면 치료자는 하나님이시오, 치료를 받고자 하는 자는 인간으로서 인간은 믿으으로 순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치료의 주체라는 것은 신명기 32장 39절에서도 나타난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자 없도다”라고 기록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직접 치료자(Healer)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이 치료의 주체자라고 해서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를 하나님이 직접 보이신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를 행하시지만 어떤 경우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치료하신다는 것이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예수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완전케 하는 사역이셨다. 홍성국은 예수의 치유사역에 대해서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는 당시의 사회제도 현상으로 생겨나는 멸시받고 천대받은 사회의 소외계층들에 대한 것으로 사회와 관련된 질병의 치유, 둘째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육체적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신체와 관련된 질병의 치유, 셋째는 각종 귀신들과 악한 영 혹은 마귀에게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영혼과 관련된 질병의 치유이다.55 이러한 신유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일부분이었다. 인간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들을 파괴하는 것은 예수의 세상에 오신 목적이었다.56 A. B. Simpson은 “신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일부분이다. 신유는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것 중의 하나로서 그 주춧돌은 갈보리의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대의 육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셨으니”라고 하였다.57
치유의 주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신약성경 가운데 4개의 복음서에 나타나는데 26회의 개인 치료와 15회의 집단 치료인 41회의 신유를 기록해 놓고 있다. 마태복음에 25회, 마가복음에 18회, 누가복음에 24회, 요한복음에 5회씩 나타나는 이 기록은 같은 사건이 서로 중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58 그러나 이러한 분류의 찾음은 인간이 지니는 육체적인 질병에 국한 된 것일 뿐이다. 앞서 홍성국이 지적하였듯이 “소외 계층에 대한 사회적 질병의 치유”나 “감정의 상함에서의 치유”같은 것들은 치료 기사를 선별함에 있어서 제외되었다. 본 논문은 이러한 것까지를 질병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더욱 확장되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여리고로 가던 강도 만난 사람(눅 10:30-36)이나,59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요 4:7-29), 나인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기사는 두 질병을 동시에 치료하신 것으로 이해 될 수 있다(눅 7:11-17). 즉 죽은자를 살림심으로 치료하셨고, 다른 하나는 과부의 상한 마음에 대하여 그 아들을 살리심으로 치료하셨다. 또한 죄인인 한 여인이 눈물과 향유로 예수의 발을 씻기심으로 평안을 얻은 기사(눅 7:37-50)도 있다. 이러한 모든 치유의 기사들은 예수계서 신유의 주체로써 행하신 것들이다.
치유자 성령의 사역.
사도를 통한 성령의 사역.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교회에 신유의 은혜가 내려진 것은 성령의 갖가지 사역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사역은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 사역이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사영과 동일시 된다. 성령의 사역은 사도행전 이하의 신약에서 나타나는데 성령은 사도들을 도구로써 사용하셨고, 또한 사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초대교회 당시의 교회 일꾼들을 도구로 사용하셨다. 이렇게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기인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권능을 부여 하셨으며(마 10:1, 8), 제자들을 위한 대 위임령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위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하신다(행 1:8, 눅 24:49).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신유이다. 예수 승천 이후 교회에 처음 보여진 기사화 된 신유의 은혜는 행 3:2-8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유의 은혜가 나타나기 이전에 사도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았다는 기록이 앞서 있다(행 2:1-4). 권능을 받은 사도들은 기사와 표적을 많이 보였다(2:43). 사도들이 보인 기사와 표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할 수 는 없으나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바대로 “예수께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이셨다”(행 2:22)는 것에서 예수의 사역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신유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여기서 사도들 역시 기사와 표적을 보였다는 것은 신유도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6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후 오늘날까지 신유의 주체는 성령의 사역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신유의 주체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이전인 공적 사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Marshall은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했다.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고(마 3:13-17, 요 1:32-33),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들어 가셨으며(눅 4:1, 막 1:12),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돌아 오셨으며(눅 4:14),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셨고(눅 4:18),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 내셨다(마 12:28).61 은사를 통한 성령의 사역. 이제 성령의 사역에서 특이할 만한 한 부분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 사역으로서의 신유 은사이다. 신유 은사는 예수 그리스도 승천 이후에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이라는 특색을 가진다. 즉 하나님의 사역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의 조건을 가진 신유의 사역이었다. 다시 말하면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과 불순종에 의해 치료의 역사가 각기 나타났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그 축복으로서 질병에서 해방을 얻을 뿐 아니라,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축복이다. 반면에 말씀에 불순종하면 모든 질병이 인간에게 내려질 것을 경고한다.62 그러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를 믿는 조건이 함게 함으로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으며,63 또한 치료를 받고자 예수께로 다가선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믿음과 상관없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났다. 병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고쳐주셨던 일들이 복음서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증거는 무리들을 고치시는 사역에서 찾아진다. 예수님은 어떤 누구도 질병을 칙료 받기 위해 온 사람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는 순종을 치료의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으셨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 하시지도 않았다(마 4:23-24, 9:35, 14:35-36, 15:30, 눅 6:17-19, 9:11 등). 예수께서 결코 그들의 믿음을 보고 고치셨다는 보고를 하지 않는다. 물론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고치셨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숫적 계산을 해 볼 때 그것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64
성령의 시대에 성령의 치료 사역은 이제 은사로써 나타난다. 은사로 주어진 신유의 역사는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니요,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다. 또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역시 건강을 회복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아니요, 믿음이 없다고 모든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것은 모두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은사를 받는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성령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고전 12:4-11)이다. 따라서 은사 시대에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믿는 자 안에서 개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고한 목적을 따라 은혜를 입는 것이다. 그렇다고 질병이 있으면 은혜가 없고, 건강하면 은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65
Biblical Basis
신유에 대한 성서적인 기초에서는 먼저 용어들을 살피려 한다. 용어들이 갖는 의미를 통하여 신유가 나타나는 의미가 있다. 또한 구약과 신약에서의 신유를 찾을 것인데 각각 질병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사례들을 통하여 신유의 사실들을 고찰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지금가지 연구되어졌던 육체적인 질병에 관한 기사만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의 신유까지를 포함하여 살필 것이다. 성경에는 그러한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신유에 대한 연구들이 사례를 찾음에 있어서 기적과 표적들과 같은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언급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실례로 정신용은 그의 논문에서 성경에 기록된 질병 고침의 사실들을 도표로 작성하였음에도 정신적인 질병의 문제는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 물론 항목상 정신적 질병을 내포한 구약의 사례 셋을 제시했다. 신명기 28장 28절에서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로서 미치게 하겠다는 것을 사례로 제시했는데 그것은 경고일 뿐이지 미쳤다가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부류에 넣을 수 없다. 그렇다면 두 번의 기록인데 다니엘 4장 33절의 느브갓네살의 증상과 고침,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14절 이하의 기록에서 사울 왕의 정신 분열증이다.66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의 눈에 보여지는 질병이었을 뿐이다. 스트레스 같은 증상이나, 심적 고통에 대한 신유 기사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스트레스가 많은 질병을 유포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제명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아드레날린, 코티숀과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이 생산되어 특별히 우리 몸의 면역 세포인 T임파구를 약하게 함으로 외부에서 병균이 침입을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병균이 몸에서 번식하여 염증을 일으켜 폐렴, 장염, 기관지염 등의 병에 붙잡힌다”고 하였다.67 이러한 스트레스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갈등이나 휴식을 갖지 않는 피로, 고민, 긴장 등이다. 특히 휴식을 충분히 취하지 않을 때 스트레스는 더욱 많이 쌓이게 된다. 성경은 안식일을 통하여 인간이 일주일에 한 번은 쉬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휴식을 빈번히 넘어가고 있는데 그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건강을 헤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유형의 정신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치료는 어김없이 나타나고 있다. 사례분석에서 살피겠지만 한나, 나오미, 수가성의 여인, 간음하다 잡혀 예수께 끌려온 여인 등에서 보여지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러한 사례들까지를 성경을 통해 추적해 보고자 한다.
성서에 나타난 치유에 대한 용어 이해
성서에서는 치유에 대한 용어들이 곧 잘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치유라는 말 그 자체가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질병이 낫는다는 표현들일 뿐이다. 이러한 표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띈다.
구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쓰인 표현은 하루카와 마르페, 그리고 라파이다.
아루카( הוּר )는 건강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치료, 고침, 회복, 병이 점차 나마감, 의 뜻으로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건강함을 나타낸다.68 그리고 이 단어의 의미는 의사가 상처를 고치기 위해 사용되는 긴 붕대라는 뜻으로서 예레미야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렘 8:22, 30:17, 33:6).69
마르페( הּר )는 치료(렘 14:19), 고치심(렘 8:15), 몸과 마음의 양약(잠 12:18, 13:17, 16:24), 그리고 재앙에서 구원 받는다는 뜻을 가진다.70 그리고 이 단어는 원기 회복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라파(אפר)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정상으로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71 곧 그 행위는 하나님께서 전형적으로 수행하시는 행동이다. 꿰메어 고치다(렘 19:1), 상처나 병을 낫게하다(창 22:17, 욥 5:18), 위로하다(렘 8:11, 겔 34:3), 치료받다(레 13:37, 사 54:5), 본래의 상태로 회복 시키다(대하 7:15, 시 30:3)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고대나 현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로써 약 65회가 기록되어 있다.72 라파의 수많은 용법들이 민족의 회개까지 수반되어야 하는 고침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회개와 고치심으로 이끄는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호 6:1). 이방 도시와 권세들이라도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받을 수 있다(렘 51:8-9).
이외에도 할람( :회복케하다 -사 38:16), 샤마하( :치료하다 -사 58:5)등이 있다.73
신약에서의 치유에 대한 용어는 대체적으로 네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테라퓨오(Θεραπεύω)로서 이는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소중히 시중들다는 말로써 이것이 성경에 사용된 의미는 병에서 고침 받다라는 뜻이다.74 Kelsey는 이 단어가 의료적 처방이나 치유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단어가 ‘치료하다, 회복 시키다, 또는 병을 고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75 둘째는 이아시스(ϊασις)로서 치료, 또는 치료 행위, 치유의 뜻을 가지며 이는 이아오마이(ϊάομαι)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아오마이는 동사로서 치유하다, 온전케 하다, 영적으로 고치다, 죄와 정죄의 상태에서 회복되다는 뜻을 가진다.76 따라서 이 단어는 죄가 곧 질병을 의미함을 나타내며 거의 의학적인 용어로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다. 셋째는 소조(σωζω)이다. 보존하다, 상하지 않게 지키다, 구제하다,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다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써 고전 희랍어에서 의료적인 의미를 비롯하여 다양한 의미들로 사용되고 있다.77 그것은 치료의 의미는 물론 한 사람을 질병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헬라의 개념에는 몸을 구원한다는 것이 전 존재의 구원을 향하여 내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단어의 의미상으로는 완전한 구원 개념과 연결되는 동시에 신학적인 용어인 구원론(soteriology)이라는 말이 유래된다.78 넷째는 휴기아이노(δγιαιξω)이다. 이는 몸이나 정치적 또는 종교적인 일들의 건강한 상태를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79 이러한 단어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체를 통해서 예수와 후대의 다른 사람들의 사역에서 치료가 발생하는 것을 이야기 할 때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완전하게 지으셨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고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건강한 삶을 주님이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질병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다양한 치유 방법을 제시하고 계신다.80
구약에서의 신유
질병의 근원
구약 성서는 너무나 많은 부분들을 질병과 치유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질병의 근원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기인한다. 이것은 곧 질병과 죄가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련성은 구약의 곳곳에서 찾아지는데 켈시는 19회의 근거를 제시했다. 바로가 사라를 취했을 때 재앙이 내렸음(창 12:17). 롯의 집 문 밖에서 롯을 위협하는 자들에게 내려진 질병(창 19:11).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려 했을 때 그의 집 여자들의 태를 막으심(창 20:18). 오난이 땅에 설정(泄精) 했을 때 죽임을 당함(창 38:9-10). 모세의 손이 문둥병에 걸렸다가 회복됨(출 9:8-10).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에게 내린 문둥병(민 12:10).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거역했을 때, 그리고 후에 그들이 바알브올을 섬겼을 때 내려진 질병(민 14:11-12, 36-37, 17:12-15, 25:3-9, 17-18, 31:16). 광야에서 백성들이 폭식을 함으로 내려진 재앙(민 11:33). 블레셋 인들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할 때 얻어진 질병(삼상 5:6-6:12). 하나님의 궤가 돌아왔음에도 기뻐하지 않은 여고냐의 자손들에게 내려진 질병 (삼상 6:19). 다윗의 무모한 인구 조사로 인한 질병(삼하 24:10-15). 불충한 여로보암의 아들을 죽게 하기로 하나님이 결정하심(왕상 14:10-14).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에게 자문을 구함으로 그의 병을 치유시키지 않으심(왕하 1:16). 게하시의 탐욕으로 인한 문둥병(왕하 5:26-27). 엘리사의 기도로 인한 하나님의 역사로 적들의 눈을 멀게함(왕하 6:18-20). 유다왕 웃시야의 교만으로 인한 문둥병(대하 26:16-20). 산헤립의 군대가 하나님께 죽임을 당함(왕하 19:35). 여호와를 버린 여호람은 창자에 불치의 병이 생김으로 죽음(대하 21:14-15).81 그외에도 유다왕 아사랴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함의 죄로 말미암아 문둥병으로 죽음(왕하 15:3-5)도 찾아진다.
신명기적 유대교는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즉 질병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들 가운데 하나였다.82 죄를 범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지는 질병은 그 종류가 끝이 없었다. 따라서 질병의 근원은 곧 죄라 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찾아지는 또 다른 질병의 운인은 죄와 상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질병이 올 수 있다. 욥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죄와 관계없이 사단의 계략에 의해 질병을 얻었다. 하나님의 허락하에 사단이 질병을 가져다 준 것이다(욥 2:6). 죄와 상관없는 다른 질병의 원인이 찾아지는데 그것은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하나의 경우이다. 한나는 성경에서 고통을 받는 원인을 찾을수 없다. 그러나 결과적인 것을 놓고 말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고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이 없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심으로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선지자였음을 볼 때 추측할 수 있다.
구약에서의 신유 사례및 분석
구약성경에서 신유의 사례는 상당히 많이 있다. 본 연구에서 그것들을 다 찾아 살핀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다만 몇가지 유형의 사례들만을 살펴 보고자 한다. 그 유형은 집단 신유와 개인 신유로 나눌 수 있다. 개인 신유는 다시 육체적인 질병의 신유와 정신적 질병의 신유로 나누어 살피고자 한다. 또한 본절에서는 단순히 사례들을 열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례들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질병에서 치료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유의 방법은 어떤 것인지 등을 분석한다. 뿐만 아니라 시편에서 치유를 위한 하나님의 신유를 구하는 기도를 살피고자 한다.
집단 신유. 하나님의 신유는 집단에게 나타날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집단을 치료하신 하나님의 치료 사건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게 함으로 그것을 쳐다보는 순종의 사람들을 치료하신 사건이다. 질병이 나타나게 된 경위와 신유의 경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벡성들은 호르몬산에서 발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을 향아여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 길의 험악함을 인하여 백성들은 마음이 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했는데 그 원망은 애굽에서 살게 할 것이지 왜 인도하여 광야에서 죽게하려는가? 나는 것과 다른 하나의 원망은 식물과 물이 없음을 원망한 것이다. 이러한 원망에 따라서 하나님은 불뱀들을 백성중에 보내셔서 그들을 물게 하시므로 죽은자가 많이 나타났다. 이러한 고통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원망한데서 범죄가 드러났고,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고통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이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한다. 모세는 백성들의 간청을 마다않고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물린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살 것이라고 가르치셨으며 그대로 순종한 자들은 살아났다(민 21:4-9). 이 기록을 요약하면 질병의 원인은 원망에서 비롯된다. 그 원망은 곧 죄이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질병을 제공하셨다. 비록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질병을 가졌을지라도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긍휼을 베푸신다. 그러나 그 긍휼에는 조건이 따른다. 말씀에 순종하라는 조건이다. 따라서 그 과정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의 범죄요, 둘째는 하나님의 징계인 질병이요, 셋째는 죄의 자복 및 간구, 냇째는 순종을 요구하심이며, 다섯째는 순종의 행위요, 여섯째는 질병의 치료이다.
개인 신유. 역시 하나님의 신유는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신유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들 수 있다. 육체적이라함은 인간의 육신에 나타난 질병을 말하는 것이요, 정신적이라함은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마음의 질병이다. 인간이 육체와 마음, 또는 육체와 정신,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영혼과 육이라는 것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에 질병이 있는 것은 곧 육체적인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요, 역시 반대로 육체에 질병이 있다는 것은 마음도 질병에 시달린다고 본다. 구약에서의 개인에 대한 신유의 기사를 살펴봄으로 그 이해를 돕고자 한다.
육체적 질병의 신유. 첫째는 나아만의 문둥병 치료 기사이다. 열왕기하 5장에는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나아만은 자신의 문둥병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계집아이를 통하여 선지자 엘리사에게 소개되고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씼으면 깨끗하리라고 권고한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친히 손을 상처에 흘들므로 자신의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으나 요단에서 씼으라는 말에 노를 발하였다. 그 때 그를 따랐던 종이 재차 권구하자 나아만은 요단에서 몸을 일곱 번 씼으매 지니고 있던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 그 후 나아만은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다는 고백을 한다(왕하 5:1-15). 이렇게 나아만의 질병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되었음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셨다. 명령을 통하여 그의 순종 여부를 살피셨고 나아만의 개인적 생각은 83그의 질병 치료에 큰 장야였으며, 오직 순종만이 그를 치료할 수 있게 했고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고백하게 했다.
둘째는 히스시야의 질병 치료기사. 히스기야가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우리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다만 그에게 나타난 질병은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알 뿐이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히스기야의 질병에 대하여 이제 그 생명이 끝났음을 알리게 하셨다. 이 때에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며 통곡하였다. 히스기야가 절실하게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가 미처 성읍을 빠져 나가기도 전에 다시 이사야를 부르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 눈물로 인하여 질병에서 낫게하리라고 하셨다. 그 뿐 아니라 생명을 15년간 연장시키셨다. 이사야는 즉시 달려가서 히스기야의 종처에 무화과 반죽을 하여 놓으므로 질병에서 회복되었다(왕하 20:1-7). 히스기야의 질병이 하나님의 은헤로 고쳐짐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질병에 걸려 죽게된 히스기야의 모습, 선지자를 통하여 죽음을 경고받게 되며, 그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인정해 달라고 간청함, 하나님께서 그 기도와 눈물을 보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질병에서 치료 받음.
셋째는 욥의 질병 치료 기사. 욥의 질병 치료 기사는 욥기 전체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만큼 방대한 기사를 갖고 있다.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이었다(욥 1:1). 그런 욥을 시기한 사단은 하나님과의 천상대화에서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그가 의로운자로 사는 것이지 결코 그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의로운 자로 살지 않을 것“(1:9-11)이라고 말한다. 1차 시도를 통해 소유물을 쳤으나 사단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1:12-22), 2차 시도를 통해 욥의 몸을 치는 계획을 시도했다. 욥에게 주어진 질병은 악창이었다(2:7-8). 의인이었던 욥은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논쟁을 하면서 결국은 “스스로 의로움을 얻은 것 처럼”말하므로 그것이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었음을 시인하게 된다(40:8, 42:6). 그리고 욥은 신유의 은혜를 입어 강건하여졌고, 소유물도 이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으며, 나이 늙어 기한이 차서 죽었다(42:10-17). 욥의 이 기사를 통해 그가 지녔던 질병의 근원이 밝혀진다. 욥은 자신의 죄 때문에 질병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는 사단의 흉계에 의해 무고한 가운데 질병을 얻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84 하나님의 섭리에 다라 욥은 사단을 통하여 질병을 얻었고 역시 하나님의 역사로 질병에서 치료를 받았다. 욥의 경우에서도 신유의 절차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음을 볼 수 있다.
사단의 시기로 인하여 질병이 발병되고, 사단이 질병을 가져다 주고, 하나님이 허락한 질병이심을 볼 수 있고,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심, 신유의 은혜 입음.
정신적 질병의 신유
구약성경은 육체적인 질병에 관한 신유의 은혜만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정신적인 질병까지를 다루고 있다. 두드러진 정신적 질병의 치료는 룻기의 나오미와 사무엘서에서의 한나 기사를 통하여 찾을 수 있다.
첫째 나오미의 신유 기사. 나오미는 과부로서 많은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산 여인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 둘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모압지방으로 이주를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 남편이 죽게 되었고, 두 아들이 모압여인을 취하여 결혼을 하였는데 역시 두 아들이 죽고 말았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좋은 소식이 있으므로 모압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두 자부를 각기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 갈 것을 권면한다. 나오미의 마음은 상당히 괴로운 가운데 있다.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룻 1:13)고 고백한다. 그녀가 마음이 아픈 것은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남편을 둘 수 없음이요, 혹이 남편을 둔다하더라도 언제 아들을 낳아 그가 자라기를 기다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1:12-13). 며느리들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이 나오미의 마음이요,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녀의 정신적 고통은 계속해서 남게 되는 것이다.
나오미의 정신적 고통을 알리는 표현은 1장 20절에도 나타난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나오미는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것을 부탁한다. 도리어 “마라”라고 불러 달라고 요청한다. 마라라는 말은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전능자가 괴롭게 했다는 이 뜻을 나오미는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풍족하게 나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징벌로 자신을 괴롭게 했다고 말한다(1:21).
나오미의 또 다른 정신적 고민은 며느리 룻의 안식할 처소였다(3:1). 그것이 자신이 며느리에게 최소한의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금가지 돌보아준 보아스를 기업무를 자로 여겼고 보아스의 아내가 되게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룻은 아들을 얻었다(4:13). 아들을 얻음으로 이제 나오미의 정신적 고통은 끝나게 되었다. 비록 룻이 낳은 아들이지만 그것은 결국 나오미가 낳은 아들이 되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정신적 질병을 치료하시는 신유의 은혜였다. 아들의 이름은 오벳인데 나오기가 아들을 낳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4:17).
나오미의 신유의 은혜 기사를 통하여 질병의 근원과 신유 역사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게 된다. 징벌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주어지고, 그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이었으며, 그의 정신적 질병은 자손의 그침에 있고, 하나님께서 신유의 은혜를 베푸셨고, 정신적 질병의 고통에서 자유함을 얻음.
한나의 신유기사. 하나 역시 하나님의 신유의 은혜를 입은 여인 중 한 사람으로 선별할 수 있다. 이 여인의 정신적 질병은 역시 자녀 생산이 되지 않음에 있다. 남편이 아무리 사랑을 한다해도 그녀 자신에게서 얻어진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지 모른다. 당 시대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아무리 위로해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브닌나의 괴롭힘으로 더욱 한나는 정신적 곹을 지닐 수 밖에 없었고 눈물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삼상 1:6-7). 그녀의 정신적 괴로움을 남편 엘가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위로한들(1:8) 한나의 마음이 밝아질 수는 없었다. 한나의 정신적 고통을 재변해 주는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나다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1:10-11). 하나의 간절한 괴로움을 호소하는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제사자의 꾸짖는 소리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오니”(1:15). 이러한 정신적 고통속에 있는 하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녀를 생각하사 잉태케 하셨고 아들을 낳게 하셨다(1:19-20). 정신적 질병에서부터 치료함을 받은 한나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기도하기를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2:1). 한나는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의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혼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나는 자신의 정신적 질병에서 구원 받았음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무자함의 심적 고통에서 자녀 생산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지금까지 골칫거리로 지니고 있었던 정신적 질병이 치유된 것이다.
한나가 어떤 이유로 인하여 무자했었는지, 그리고 그 고통을 겪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아들을 얻음으로 고통이 사라졌음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는 정신적 고통을 가지고 있었고, 그 원인은 자녀가 없었음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그녀는 자신의 정신적 질병을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게 되었다. 하나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표현하였다.
치유를 위한 기도
시편에 나타난 신유와 관련된 기도 가운데 본 연구에서는 6장 2절, 41장 4절, 103장 3절, 147장 3절의 네 부분만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 구절들을 분석하여 볼 때 질병의 근원을 역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곧 범죄함으로 인한 것이다. 시편기자는 범죄로 인한 질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다(시 41:4). 치료의 주체는 역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질병만을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질병에 대해서 치료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시 103:3). 그리고 그것은 육체적인 질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질병까지를 포함하고 있다(시 147:3). 더 나아가 영혼의 질병 문제까지 신유의 은혜로 이해하고 있다(시 6:2).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Keil과 Delitzsch는 6:2절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려 마땅하신 벌 대신에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친절함과 상냥한 자비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곹옹이 이미 극에 달함으로 육체적인 병까지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의고 지쳐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치료를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뼈가 떨리고 있다고 탄원한다”85 그렇다고 한다면 곧 육체적인 질병은 영혼의 문제로부터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탐 마샬은 “육체의 장애를 일으키는 원인은 영적인 것에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 말하면 신체적 상태의 여하에 따라 영적 정서적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다.86 다시 말하면 영혼의 문제는 육체적 질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므로 육체적 질병을 지닌자는 영혼의 문제를 짚어 보아야 할 것이고, 따라서 영혼의 문제는 결국 죄의 문제이므로 구약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질병의 근원이 죄라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게 만든다.
신약에서의 신유
질병의 근원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약성서에서도 질병의 근원은 다각도로 나타난다. 첫째는 질병과 죄의 관계성이다. 중풍병자에게 예수께서는 죄 문제를 지적하셨다. 중풍병을 고치기 위해 다가선 사람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하는 영적인 문제를 진단하셨다. 이 사람을 치료하실 때 예수께서는 육체적인 질병에 관해서는 전혀 말씀하시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람의 질병의 문제는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87 그 뿐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요 4:),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요 8:3-11) 등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질병이 나타나는 경우이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1-3).88 셋째는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질병이다. 이성주는 딤후 2:2절의 말씀을 통하여 과로하지 않고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바울의 말을 인용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역시 김경래도 딤후 2:22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질병을 말한다.89 이러한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질병은 약을 써도 무방한 것이다.90 넷째는 마귀와의 관계성이다. 신약성경은 마귀가 질병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이해하게끔 만든다.91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병자를 예수께서는 고치셨고(눅 13:16), 많은 귀신들을 내어 좇으셨으며(마 8:16),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셨다(마 12:22). 팔래스틴 지방에서는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의 질병은 마귀의 짓으로 돌렸고 여러 가지 정신적 질병은 더욱 그러하였다.92 따라서 복음서들은 정신병을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93
신유의 사례 및 분석
신약의 신유 사례를 살핌에 있어서 신유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구분하지 않고 고찰하고자 한다. 라서 선택된 본문만을 분석한다.
집단 신유.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서 집단적인 신유는 15회나 된다.94
그리고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사도들을 통한 집단적 신유의 기사 역시 수회 나타난다.95
이러한 많은 기사 가운데 예수께서 보이신 눅 17:11-14의 기사를 살펴 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지나실 때 열며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를 만나 멀리서 자신들의 형편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 하셨고, 그들은 가다가 자신들이 깨끗함을 얻었음을 발견하였다. 10명의 신유를 얻은자 중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께 돌아와서 사례를 하였고 예수께서는 오직 한명만이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지 않음을 한탄하시면서 이방인이 이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면서 돌려 보내셨다. 이것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문둥병자들이 어떻게 질병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② 그들은 예수께 간청하였다. 이는 기도로 이해된다.
③ 신유의 은혜가 이들에게 베풀어졌다.
④ 신유의 은혜를 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⑤ 육체적 질병과 함께 영혼의 구원까지 얻었다. 이는 영육의 구원으로서 전인치유이다.
개인 신유. 신약성경에서 개인에게 신유의 은혜가 주어진 것은 상당히 많다. 육체적인 질병에서의 신유와 정신적 질병에서의 신유와 귀신에 의한 질병에서의 신유이다. 그리고 인간의 부주의로 인한 질병에 대한 신유는 신약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이성주와 김경래가 몇몇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을 부주의로 인한 질병에 대한 설명으로 확정하기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 싶다. 그러므로 부주의로 인한 것은 여기서 취급하지 않는다.96
예수께서 보이신 개인적 질병의 치유 사례는 복음서에 41회 나타나 있고, 성령의 사역으로서의 치유 사례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9번 기록이 되어 있다.97 그러나 이러한 통계는 정신적인 질병으로부터의 신유를 제외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신유의 기사는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1) 육체적 질병의 신유
마가복음 2장 3절에서 12절에 중풍병에 시달리는 사람을 친구들이 예수께 데려와서 치료받은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통하여 우리는 질병으로부터 치료 받는 과정을 제공받게 된다. 예수께서는 네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다. 그리고 죄사함을 선포하셨다. 따라서 이 중풍병자의 질병은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와 함께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사도행전 3장 2절에서 10절에는 성전에 있는 앉은 뱅이를 베드로가 치료하는 기사가 실려있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이 치료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는 베드로의 믿음이다. 환자는 일어섰고, 결국 하나님께 찬미를 드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모던 백성이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았다. 이 기사를 통해 사도들의 시대에는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치료됨을 보여준다.
2) 정신적 질병의 신유
요한복음 8장 3-11절에서 간음중에 잡힌 여인의 정신적, 영적 질병의 치료 기사가 나온다. 이 여인은 상당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결과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헨드릭슨은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간음 중에 잡힌 이 여인은 결혼한 여인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여인은 도덕적으로 암흑속에 행하고 있는 자였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어두움을 쫓아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12절 이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빛이다 라는 말씀은 곧 이것을 뒷받침한다. 여인을 고소하려는 자들은 지금 이 여인이 공중에 조출됨으로 초래되는 치욕감이나 공포감 따위는 생각지 않고 있다. 다만 자신들의 목적을 위할 뿐이었다. 그러나 여인에게 누구도 정죄하지 못했고 예수께서도 정죄치 아니하셨다. 다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고 하셨다.98
즉 이 본문이 치료의 기사를 다루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여인이 가지는 수치감과 공포감으로 말미암은 불안은 분명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고통을 해결해 주신 것이다. 풀핏주석 요한복음 하권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의 사명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치료하는 것이다. 형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위로를 주는 것이다.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의 사명이다. 죄가 용서 받았다고 하지 않으셨으며, 그녀의 믿음에 의한 구원도 아니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만 하셨다.99
여인은 상처를 갖고 있다. 비록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상처이기는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여인의 상처를 감싸 주셨다. 여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전폭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였다. 이러한 예수의 치료는 여인으로 하여금 육신도 살고 영혼도 살게 된 치료였다.100 여기서 우리는 이 여인의 치료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있는데, 첫째 이 여인의 고통은 죄의 결과였다. 둘재 그 고통은 육체적이기 보다는 정신적, 즉 수치와 모멸, 공포, 그리고 죽음에 대한 불안이었다. 셋째 여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예수의 자비를 받는다. 넷째 정신적 고통에서 뿐 아니라 영혼의 파멸에서 치료의 구원을 받았다.
3) 귀신들림에서의 신유
예수께서 보이신 치유 가운데에는 많은 육체적 질병자들이 있었다. 마가복음 9장 17절에서 29절에 귀신들인 아이를 그 아비가 예수께 데려와서 치료받은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분석해 보면 당사자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아비의 노력으로 예수의 능력을 받아 치료하게 된다. 첫째 왜 아들이 질병에 걸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둘째 아비가 긍휼을 구하지만 믿음은 없다. 셋째 예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셨다. 넷째 믿음을 가짐으로 치료를 받는다. 다섯째 병자 자신의 믿음이나 기도가 필히 요구되지는 않는다. 여섯째 기도만이 능력을 보일 수 있다.
또 다른 기사를 보면 가나안 여인의 믿음으로 치료의 기적을 보이신 기록이 있다(마15:21-28). 이 기사를 통해 찾아지는 것은 이방인도 예수만 빋으면 치료를 받을수 있다는 사실이 첨가 된다.
Historical Basis(역사적 기초)
신유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을 고찰함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 신유를 방해하는 여러 주장들은 역사적 근거들이 희박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요, 또한 오늘날에는 신유의 은혜가 과거의 것과 차이가 있다는 주장들을 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의 주장과 같이 신유가 한 시대에 국한되었던 것인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어야 하는데 사실 교부들의 글에서도 신유의 은혜 체험은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전혀 그들의 주장은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다. 이 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신유가 나타나고 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일들은 허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미 성경적 배경에서 성경에 나타난 역사성은 다루었기 때문에 본 절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고 사도들 이후의 초대교회사에 속하는 속사도 교부들의 글과 몇몇의 교부들의 신유에 대한 언급을 찿고, 중세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는 신유 행적에 관한 사실들은 간단히 살피면서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에서의 신유 사역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교부들의 시대 (주후 430년의 Augustine까지)
로마의 Clement 속사고 교부로 불리우는 Clement는 95-96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로마인들의 편지로 명명된 클레멘트 1서101 16장 5절에 보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는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우리의 허물들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온 채찍이 그에게 떨어졌습니다. 그의 상처들에 의해서 인류는 나음을 입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56장 6-7절에 보면 “그는 고통스럽게 하시나 다시 건강하게 하신다. 그는 상하게도 하시지만 그의 손이 치료하신다”고 언급한다. 59장 4절에서는 치료해 달라는 기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64장 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영들의 주인이시고 모든 육체의 주라고 말한다.
저자가 분명치 않으나 설교 혹은 권면으로 분류되며 Clement
2서102라고 부르는 글 9장 5-7절에서는 온전히 육체가 치료를 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만일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셨다면 그리고 그 상태에서 부르셨다면 역시 우리의 보상을 이 육체안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여전히 치료받을 시간이 있는 동안에 의사이신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맡기고 그에게 합당한 것을 드립시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역시 14장 3절을 통해 육체가 부패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이 구절에서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육체는 영의 복사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사본을 부패시키는 어떤 사람도 언본을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성령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고 단호히 말한다. 즉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완전치 못한 것은 영을 소유할 수 없다. 또한 성령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몸을 온전히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안디옥의 감독 Ignatius. 주후 11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속사도 교부인 Ignatius의 편지들 가운데 Policap에게 보낸 편지를103 보면 Ignatius가 Policap에게 신유를 베풀도록 권면하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1장에서 그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관심사들을 계속적으로 돌보면서 당신의 직책을 감당하라”고 권면하면서 “완전한 경기자로서 모든 사람들의 질병을 감당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2장에서는 모든 상처를 똑같이 다루어서는 치료가 되지 않기 때문에 염증과 같은 것들은 차가운 압박붕대로 통증을 완화시키라고 권면한다. 이같은 표현은 실질적으로 신유의 은혜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치료법을 통해 돌보라고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질병을 감당하되 외과상 같은 상처는 의학적인 방법을 동원하라는 가르침으로 이해된다.
속사도 교부 이후의 교부들. 순교자 Justine Marter(100-165년)는 신유를 영적인 은사로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이것은 사도시대와 아울러 교부들에게도 주어진 영적 은사라고 생각했다. 저서인 The First Apology, On the Resurreection, The Second Epistile of Clement 등에서 신유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다.104 리용의 감독이었던 Irenaeus(140-203)는 Against Heresies(이단 논박)에서 이단은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할 수 있었던 신유의 기적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105 곧 기독교는 당시대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신유를 베풀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Tertullian(155-230)은 병 고침 받은 사람들의 이름까지 밝히기도 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귀신으로부터 구출을 받았으며 질병으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안토니우스 황제의 아버지인 세베르투스도 성직자를 찾았으며 기름을 발라 그의 병을 고쳐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시했으며, 죽을 때까지 궁정에 남아 그의 곁에 머무르게 했습니다”106
Origen(185-254)은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은 계속 역사하고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켈수스 반박문에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료하는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07 Ambrose(339-397) 역시 신유의 은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Augustine(354-430)은 초창기에는 신유에 대한 반대를 하였지만 자신이 죽기 3년전에 입장을 바꾸었다. 자신이 체험한 70여개의 기적들 가운데 몇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 눈먼 사람의 시력이 회복되었으며, 둘째 카르타고의 한 주교는 직장의 누관을 치료 받았으며, 셋째 역시 카르타고의 한 의사는 응혈을 치료받았다. 넷째 한 배우는 중풍과 탈장을 치유받았고, 다섯째 이웃의 한 사람은 악령에 의해 생긴 병을 치유 받았으며, 여섯째 어린 소녀가 귀신으로부터 구출을 받았다. 일곱째 눈먼 여인의 치료와, 여덟째 마차에 치인 한 소년이 치인 상처도 없이 치료받았고, 아홉째 한 여인의 유방 종양을 치료받았다.108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기적들은 우리 시대에는 계속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만 항상 요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기적들에 익숙해지게 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주어 열광하게 만들었던 그러한 일에 냉담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그러나 내 말이 그 어떤 기적들도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으롷 이해되어져서는 않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집필할 그 당시에 나는 이미 한 맹인이 밀라노의 두 순교자들의 시체에 가까이 감으로 그의 시력이 회복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고 이와같은 종류의 또 다른 일들이 너무나 많이,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109
이와같이 초대교회의 교부들 시대에는 사도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신유의 역사들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에 명명하지 않았던 다른 교부들도 역시 신유의 은혜를 체험, 또는 현장들을 목격하고 신유를 베풀었다.
신유의 암흑기
교회의 신유 사역은 초대 기독교사에서 성황리에 나타났던 것에 비하여 중세시대에는 신유사역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후 590년부터 604년에 이르기까지 교황 Gregory가 등장하면서 질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단련이라고 보았다. 이후 교회는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사상을 그대로 전수 받았으며 따라서 신유사역은 공적 사역에서 제외되었다. 이 시기에는 병든 사람의 치유를 위한 기도보다는 임종을 위해 성사를 했다. 그렇다고 이 암흑의 시대에는 전혀 신유사역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예배나 모임을 통해서는 시행될 수 없었지만 수도원적인 영성 가운데 신유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었다.
St. Francis of Assisi. Francis(1181-1226)는 프란시스카 교단의 설립자이다. 그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활발한 신유목회를 한 사람이다. 그의 신유 역사를 살펴보면 수 많은 기적의 사건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Toscanella에서 절름발이를 고쳤으며, Narmi에서 중풍병자를 고쳤고, 구신들린 여인을 치료하였으며, Ancona로 여행중 San-Severino에서 Acto라는 젊은이의 문둥병을 치료하였다. 또한 Citta Della Picve에서 귀머거리요 벙어리인 거지를 고쳤다는 기록을 보여 준다.110
Vincent Ferrer. Vincent Ferrer(1350-1419)는 도미니칸 교단의 설교가로서 발렌시안에서 출생하여 심판의 천사로 알려졌다. 그는 실의에 빠져 병이 들었을 때 환상중에 성 도미니카와 성 프란시스가 만났던 주님으로부터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1399년 11월에 그는 아비뇽(Avignon)을 떠나 20년간 사도직 설교를 하였는데 때로는 성령에 이끌려, 때로는 초청에 의해서, 스페인과 남부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와 스위스 등지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리고 설득력을 가지고 회개의 필요성과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서 설교를 하였으며 저연과 은혜의 질서 속에서 신유의 기적은 항상 그의 뒤를 따라 다녔다.111
신유의 르네상스(종교 개혁기-1800년대)
중세시대에 신유사역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암흑기에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맞아 다시 신유사역은 활기를 찾기 시작했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기에 이 시기를 신유의 르네상스라 할만하다.
Martin Luther. 종교 개혁가 Luther는 기적이나 교회의 신유사역을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다. 그는 95개 논제에서도 교황은 신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천명하였다.112 그리고 그는 야고보서를 비록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평가했으면서도 1545년 죽기 바로 전에 야고보서의 말씀에 기초하여 신유예배에 관한 지침을 썼다. 그는 생전에 친구의 병을 고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친구 Miconius가 결핵 말기로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시여 제가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네를 나보다 더 오래 살게 하실 것일세. 나는 이 일로 열심히 기도하고 있네. 분명코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을 믿네. 아멘.”하고 편지를 썼다. Miconius는 보내온 편지를 읽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Miconius는 병고침을 받았고 Luther보다 더 오래 살았다.113 뿐만 아니라 친구 Melanchthon이 여행중 병들었을 때에 역시 기도해 줌으로 고침을 받았던 기록도 있다.
John Wesley. 감리교의 설립자이며 유명한 설교가인 Wesley는 많은 신유 역사에 관한 글들을 남겼다. 그 글들은 대부분이 자신이 직접 신유목회를 통하여 체험한 사건들이다. 한예로 그는 1746년 3월 17일의 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다운스씨와 쉐퍼드씨와 함께 뉴케슬로 떠났다. 그러나 우리가 스메톤에 이르렀을 때 다운스씨가 몸시 아파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말도 간신히 땅 위에 발을 세웠다. 말을 타고 7마일쯤 갔을떄 나는 몸시 피곤했고 몇 달동안 아팠던 것보다 더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수단을 사용하셔서 혹은 아무 수단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사람이나 짐승을 치료할 수 없는 것일까?라고 생각했다. 즉시 나는 피곤과 두통이 사라지고 동시에 내가 탄 말도 더 이상 절지 않았다. 말은 그날도, 그 다음날도 절지 않았다. 이것 또한 매우 이상한 사건이었다.114
반면에 John Calvin에게 있어서의 신유사역은 애매하다. Calvin은 신유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초대교회에만 한정적으로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사로 보았고, 따라서 더 이상 우리는 기적의 시대를 살지 않고 있으며 믿음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런 권능은 나누어주지 않았다고 말한다.115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신유사역은 인정되지 않았다. Calvin에게 있어서는 신유사역이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였지만 그 뒤를 이어진 George Fox나 Charles H. Spurgeon은 신유사역에 열중하였던 인물들이다. Fox는 기적의 사례집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 가운데 나타났던 150건의 신유 사례를 자세히 수록하고 있으며, Spurgeon의 전기 작가인 럿셀 콘웰은 교인들이 교회에 신유를 위한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으며 무수한 신유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고 말한다.116
근대의 신유사역(1800년대 이후 현대까지)
런던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쳔 헤럴드 편집인의 부인인 Michael Baxter와 미국 성결 운동의 지도자인 William E. Boardman이 세운 “안식의 집” 집회에서 신체적 질병을 치료받았던 Andrew Marry목사이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성결과 신유의 메시지를 증거하였다. 자신의 질병에서 치료받은 그는 신유라는 책을 썼다. 다른 한 사람은 A. J. Gordon이다. 그는 치유 사역이라는 고전적인 책을 썼다. 그는 여기서 예수의 지상 사역은 병 고침과 죄용서 두 가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보고 영혼과 육신의 회복과 치유가 병행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신 소원이라고 말한다.
A. B. Simpson은 19세기 신유사역에 있어서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38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유사역을 수행했다. 자신의 응접실에서 금요 집회를 하였으며 이 집회는 특히 신유의 은총을 강조한 설교와 기도의 사역을 한 것이다.117 그의 사중의 복음이라는 저서에서 신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유는 의학적 치유가 아니며, 형이상학적 치유가 아니다. 최면술 적이거나 강신술도 아니며 의지력도 아니다. 또한 기도 그 자체가 병을 고친다거나 믿음 자체가 병을 고치는 것도 아니다. 신유는 인간의 육체속에 하나님이 주입하시는 초자연적 신적 능력이며, 인간의 논리적 사고나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증거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의 일부분이며, 육체를 소생시키는 성령의 하시는 일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지며 교회 역사의 모든 사실들과 일치한다.118
Simpson은 자신의 체험을 통한 신유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썼다. 그의 영향하에 카우만과 길보른이 복음이 전파된 일본이나 한국은 그대로 신유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한국보다 먼저 이 복음이 전파된 일본은 동양 선교회를 조직하고 도쿄 성서학원을 설립하였는데 그 학교의 입학 안내에서 특색으로서 사중복음을 말하고 있다. “그 특색 : 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구원, 성결, 신유를 얻고 또 주의 재림도”라고 하였다.119 그뿐 아니라 동양 선교회의 목적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본회의 목적은 ~~ 구원, 성결, 주의 재림, 신유를 주장합니다. ~~ 신유란 어떤 병이라도 낫게 되는 일입니다.”120
이성봉. 이성봉 목사는 한국의 Moody라고 불리우는 인물로써 1900년 7월 4일 평안남도 강동군 간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가족은 그가 6세 되던해에 개종을 하였으며 20세가 되던 해까지는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하였다. 우연히 병이 생김으로 의료 행위로 치료하지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던 중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기도 3년만에 신유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후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과 동시에 수원교회를 개척하였으며 1931년 목사 안수후 목포로 전임하였고, 그후 신의주로 전임하였다. 교단내에서는 그를 따를 만한 이가 없을 정도로 명실공히 능력있는 목회를 하였다.121 그는 자서전에서 황해도 송화 무초교회에서 집회 인도중 몸에 이상이 생겼는데 “나는 입으로 설교를 못하면 죽음으로 하리라”고 함으로 또 한번의 신유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해남에서 집회중 급성 맹장이 발생하였을 때도 역시 신유 경험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22 자신의 경험뿐 아니라 그는 전국을 돌아 다니며 복음과 함께 신유의 은혜를 전하였고 경험케 하였다. 그는 신유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 성지(聖旨)임을 믿어 치료받는 것이요, 직접적인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였다.123 첫 개척지 수원교회에서 그는 주님의 권능으로 병자를고치고 귀신 들린 자들을 놓임받게 했으며, 7개월 동안 몸져 누워있던 무당에게 예수를 믿게하여 병을 고쳤다. 그가 시무한 교회들은 신유의 역사로 넘쳤고, 부흥사로 활동면서도 신유의 이적을 많이 행하였다. 김진환은 이성봉 목사의 부흥회를 “그의 부흥회는 특히 신유의 이적으로 유명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4 1965년 8월 2일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응조. 김응조 목사는 1896년 12월 3일에 경상북도 영덕에서 출생하였다. 12세때에 부친과 함께 개종하였다. 1917년 4월에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1920년 졸업하였다. 그후 5년간의전도사 생활을 하다가 1926년 4월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해 10월에 북선지방의 감리 목사로 파송되었고 부임후 3년 6개월을 사역하였는데 그가 부임할 당시의 북선 지방은 10개처 교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북선 지방을 떠나 1년 6개월 후에는 10개처의 교회가 40개처의 교회로 성장되었다.125 이러한 부흥에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온 힘을 쏟은 결과이다. 김응조는 북선 지방에서의 사역 기간동안 내내 신유 사역을 수행하였다. 왜냐하면 북선 지방은 특히 사귀병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북선 지방은 남선과 달라서 사귀병이 많다. 어느 교회에서 집회를 하던지 한 두 사람은 의례히 사귀병자이다. 풍토와 기후의 관계인지 문둥병자는 없는 대신 사귀들린 병자가 허다하다. 여기서 나는 사귀의 셰계의 비밀과 행동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 나는 여러곳에서 집회하는 가운데 많은 사귀들린 병자를 고쳐주었다.126
그러나 이러한 수고와 함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병을 얻게 되었다. 그는 북선 지방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사역을 회고한다.
나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폐병자와 동거도 하고 열병자와 한방에서 뒹굴고 사귀병자와 철야도 해 보고 몇백리 길을 도보로 걸어서 가기도 하였고 교회에 사건이 있을때에는 동역자와 같이 철야기도도 하였고 박해와 환난이 있을 때에는 진두에 서서 지휘도 하였고 .... 일천여리의 거리되는 광범한 지방을 나의 활동 무대로 삼았다. 이렇게 활동하는 동안 유한한 아늬 육체는 외강내허의 위험한 지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르게 되었다. 신경쇠약에 소화불량, 불면증에 폐렴으로 시작한다. 4대병의 급습을 당하여 나는 병의 포로가 되었다.127
김응조 목사는 북선을 떠나서 서울 외곽에서 기거하면서 자신이 세가지 무서운 시련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심령상 고민이요, 둘째는 육체상 병고요, 셋째는 생활상 고통이 그것이다. 여기에 그는 머물수 없었다. 따뜻한 곳에서 요양과 함께 사역을 할 수 있기를 본부에 요청하였고 그는 목포교회로 부임되었다. 목포교회는 당시 개척교회로서 장년, 유년 합하여 15명뿐이었다. 요양은 커녕 도리어 다른 질병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할 수 없이 그는 유달산으로 올라가서 기도하였다. 은혜를 주시든지 죽음을 주시든지라는 각오로 백일 특별 기도를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30일만에 들으셨고 응답하셨다.128
김응조 목사는 자신이 신유를 직접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능력을 받아 백일 대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15명의 신자를 120명으로 성장 시킨 것도 하나님게서 육신의 구원을 통하여 영혼이 새힘을 얻게 된 결과라고 그는 고백한다.129 그는 신유 체험과 함께 신유 사역을 수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술된 많은 책들 가운데서 유독 신유에 관한 글은 제외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따라서 그의 신유관은 정확하게 말할 수 없겠지만 그의 고백속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신유가 육체적인 치유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의 건강까지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CHAPTER 3
Review of Related Literature
Introduction(서론)
이미 앞장에서 본 연구자는 성결교단의 목회자가 교회성장의 측면에서 문제시 되고 있는 신유의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성서적 및 역사적면에서 연구해 보았다. 그러므로 이제 본장에서는 성결교단의 신유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시켜 이를 통한 신유목회의 재인식과 실제로 개교회에서 신유로 사역하는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또한 유사 연구 및 신유사역에 대한 이론적인 면과 실제적인 신유사례들을 실제를 중심으로 연구해 보고자 한다. 또한 개교회에서 신유에 대한 연구나 사역 혹은 교육을 프로그램화 하여 성공한 사례들을 언급해 보고자 한다.
Similar Research(유사논문)
Hong Suk Choi는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이다. 그는 귀신들림과 관련하여 치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목적으로 신학지남에 교수연구 논문을 발표 하였다. Choi는 질병이란 하나의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 지평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교 윤리적인 측면, 생리 심리학적인 측면, 유전적 측면, 사회 문화적 측면, 의료 기술내지 의학적 측면, 하나님의 경륜적 측면, 혹은 생태 윤리학적 측면등 다양한 국면과 연결되어 있다.130
이말은 지금까지 기독교계가 질병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지 않은 나머지 질병의 치유를 단지 의학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깊어졌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주고 있다. 이로인해 귀신들림이나 치유의 문제를 둘러싸고 교회나 혹은 믿는 자들이 양극으로 태도가 나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현대 사조의 결과가 교회안에 깊숙히 침투해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현대 사조라는 것은 결국 Aritoteles의 형상학 즉 폐쇄적 세계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Peno Decart를 거쳐 18세기 영국의 자연신론(Deism)으로 발전하게 되어 우리에게 이르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현대 사조의 영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할 때 올바른 이해와 치유에 대한 기독교적 실천이 나올 수있다는 것이다.131 Choi는 기독교 안에서 이적적인 칭를 반대하는 4가지 입장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신체는 의료적인 그리고 신체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으며 종교적인 도움은 피상적일 뿐이라는 유물론적인 견해, 둘째, 질병을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훈계적인 선물로 보는 섭리론적 관점, 셋째, 하나님이 원래 교회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치유와 같은 사역들을 잠시 동안만 행하셨다는 특별시대 경륜론, 넷째, 자염법을 깨뜨릴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실존주의 신학의 입장 때문이라고 했다.132 이에 대해 Choi는 개혁신학의 전통을 이적과 관련하여 특별시대 경륜론을 일반적인 입장으로 받아 들이지만 그러나 조심스럽게 치유에 대한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절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신유가 일어날 수있다는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Kwang Suk Joo는 1996년 Oral Robrts University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 한국 침례교단 소속 목사로서 새소망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모델은 예수님의 목회 방법인데,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것은 치유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치유사역의 모범을 따르지 못하고 또 그가 속해 있는 한국 침례교회 목회자들도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치유사역의 이해를 증진 시키기 위하여 연구를 하게 되었다.133 Joo는 치유사역에 대한 능력과 인식이 부족한 목회자들에게 7주간 21시간에 걸쳐서 치유사역에 대한 교육과 영성훈련을 하였다.134 그랬더니 21시간동안 치유사역에 대한 교육과 영성훈련을 받은 목회자들은 그렇지 않은 목회자들에 비해 몇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첫째 Control Group 보다 Treatment Group이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가 더욱 증진됨으로 입증되었다. 예를 들면 교육을 받기전에는 9명(50 %)만 훈련을 받으면 치유사역이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으나 교육을 받은 후에는 17명(94.4 %)이 신유은사 없어도 훈련받으면 치유사역이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해가 증진된 것이다. 둘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치유사역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향상되어서 치유사역을 하지 않았던 목회자들은 치유사역을 하게 되고 소극적으로 치유사역을 하던 목회자들은 적극적으로 치유사역을 하게된다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연구결과 교육을 받기전에는 8명(44.5 %)만 치유사역을 하겠다고 했으나 교육을 받은 후 17명(94.4 %)이 치유사역을 하겠다고 의사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셋째는 이 논문에 참여하게 되면 중지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도 은사주의 신학사상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는데 연구결과 18명의 Treament Group중 치유사역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있으나 극단적인 중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Pretest 와 Posttest에서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지역교회에서 치유사역을 실습하는 중에 실지로 병든자를 치유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연구결과 교육기간 중에 5명이 병든자를 치유한 경험을 한 것으로 나타나서 가설이 맞았음을 보여 주었다고 밝혔다. 다섯째는 지금까지는 안수하는 방법만을 사용하여 치유역사를 하였었는데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치유사역을 시도하게 되는 것으로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이 지역교회에서 치유사역을 적용하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시무하는 교회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었는데 그것만은 시간적으로 측정하기에 너무나 어려웠음을 밝히고 있다.135
Joo는 결론 부분에서 예수님이 중점적으로 하셨던 제자 훈련과 설교, 성경교육 그리고 신유 사역들은 주의 종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신학대학에서 부터 필수 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 있는 신학대학에서는 제자훈련과 설교학 그리고 교육학과 같은 과목은 가르치고 있지만 치유나 신유를 가르치는 신학대학은 전무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대학에서 부터 치유학을 배우고 치유 사역자로 훈련을 받고 졸업한다면 목회 현장에서 병든자를 만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치유사역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Joo는 말하길 ‘치유사역은 어느 특정한 카리스마적인 부흥사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어느 목사만 할 수 있도록 한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할 수 있도록 주님이 허락한 것이며 또한 교회 성장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고 결론적으로 말했다.
Sang Kil Bae는 기독교 한국 감리회 서울 목양교회의 담임 목사였다. 그가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자 한 것은 한국내의 지역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신유에 대한 편견 문제였다. 그래서 한국내의 지역교회 목회자들을 치유나 신유에 대해 편견을 깨고 이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이해 증진을 시킬 목적으로 연구하여 논문을 썻다136고 했다. 목회에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 중에 질병이나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하여 하나님의 신유가 필요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응 방법이나 치유의 실제적인 모습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개교회 목사들은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또 섣불리 이를 목회 현장에서 적용함에 있어 장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에 대한 이유를 알고자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러한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신학적으로 점검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137 그는 신구약 성경 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또 모든 사람들이 병으로 부터 자유케 되어 온전해 지는 것을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에서 부터 자유케되고 온전케 되는 것으로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예수님께서 확증하신 것이다. 그것이 표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질병에 걸리는 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죄의 결과라는 것이다.
Bae는 그의 이러한 성경적 확증을 증명하기 위해 미국 이민 교회중에서 감리교회 두개와 장로교회 한군데서 치유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다. 그리고 세미나 전후에 설문지를 통하여 반응을 조사하였는데 총20개의 문항들로 구성된 설문지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설문 평가를 통하여 그가 세웠던 세가지의 가설이 증명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른 나라의 교회들보다 치유사역에 대한 이해나 그 실천이 부족함으로 이를 실천하는 사역이 필요하다. 그리고 치유사역은 교육 수준이 낮은 남자나 여자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수정되어야 한다. 둘째로 치유란 특정한 교파뿐만 아니라 본래의 전통적인 교파들도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대부분 증명해 보임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한국교회에 반항을 불러 일으킬 연구를 하였다.138
Dal Ung Song은 경기도 하남시의 풍성교회를 1992년에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는 현직 목사이다. 그는 작은 교회 운동을 통한 가정치유 목회에 대한 연구를 하였는데, 교회는 가정과 유기적 생명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가정은 건강한 교회를 만들고,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가정을 육성 한다고 했다.139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화 되어 가면서 맘모스 예배당과 거대한 구조로 성장해 가고 있는듯 하지만 실상 그 안에서 소외된 교인들과 병든 가정의 초라한 모습은 한국교회의 어두운 면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작은 교회 운동과 함께 가정회복을 위한 치유사역을 실행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40 그는 현재 갈등을 겪고 있는 가정들을 사례별로 분석 연구 하였다. 정신적 심한 갈등과 불신으로 별거하고 있는 부부의 가정, 날카로운 신경질환으로 자녀를 학대하며 폭행을 일삼고, 심한 중노동을 시키며, 자녀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감시하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 늙은 어머니가 중풍병으로 누워 있는데 전혀 돌보지 않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정. 사업에 실패하여 엄청난 빚을 지고 거의 날마다 채권자에게 시달리고 있는 가정들의 현실 속에서 이들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하여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병든 가정의 치유를 위해 가정의 본질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에 노력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전 교우가 성경의 말씀 아래에서 가정 치유사역을 함께 감당하기 위해 같은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전체 교인들을 상대로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 다음 생겨진 평신도 가정 사역자들과 함께 이들 문제 있는 가정들을 섬기며 치유 하는 쪽으로 사역을 진행하여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다.141 그리고 풍성교회 안에도 짝믿음 가정이 있는데 이들 가정의 문제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가족 즉 아내들을 통하여 말씀을 가르치고 영성훈련을 시켜 소귀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142 Chi-Jun No는 이러한 가정치유 목회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치료할 대상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치가 고안되지 않고서는 쉽게 성공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도울 수 있는 잘 훈련된 가정치유 사역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때 유능한 가정 치유 사역자의 조건은 상처가 있는 자라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였다.143
Gary L. Harber는 Oklahoma 주 Tulsa에 있는 Trinity Unnited Methodist Church 교회의 담임목사이다. 그는 1990년 Oral Roberts University에서 목회학 박사 논문으로 연구하였는데, 그의 관심은 그 자신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부족한 부분 곧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교인들의 관심과 믿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다.
Harber는 왠지 모르게 하나님의 치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관심이 적은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중심으로 새로이 가르치면 그들이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가설을 세웠다. 그래서 예수님의 삼대 사역인 설교 가르침 그리고 치유 중에서 치유를 비중있게 가르친 것이다. 그 동안 소흘하게 다루었던 치유에 대한 성경 본문이나 구절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나아가 그것들의 중요성을 꾸준하게 강조했을 때 현저한 변화들을 감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Harber는 실제적인 치유사역을 위해서 첫째, 주일학교 시간에는 관심있는 교인들을 대상으로 치유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쳤고 둘째는 치유에 대한 설교를 연속적으로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셋째, 치유 전도운동과 수련회 그리고 치유를 목적으로하는 성찬식을 거행했다고 한다.144 세미나 전후에 두 번의 설문을 실시하였는데 결과는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신유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치유사역에 대하여 목회자를 돕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15명으로 구성된 교회내의 교육과정 평가위원들은 치유사역을 교회내에서 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치유사역은 가급적이면 주일예배가 아닌 별도의 시간을 내어서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교회내에서 사역을 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론적인 연구(Theoretical Constructs)
본 논문의 목적은 성결교회가 네가지 교리중의 하나로 내외에 천명하고 있는 신유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성결 교단내에서는 목회자나 교인들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실제적으로 교회의 사역에 많은 손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성결교단 목회자들에게 이러한 치유 사역의 중요성을 설득 시키기 위한 근거로 본 연구자가 섬기고 있는 백마장 제일교회를 통한 임상 실험의 결과를 가지고 그들에게 발표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의 논문의 목적에 부합되고 또 이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할 문헌들을 살펴 보았다.
질병의 원인과 대책
왜 사람들은 질병에 걸리고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가? 하나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아는 것은 결국 치료하는 것과도 관계된다. 이것을 알게될 때 신유사역의 장애물도 제거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속에 존재하는 장애물이란 결국 신학의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죄
Sung Chung-Oh는 장로회 신학대학 교수이다. 그는 특히 치유와 영성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실천 신학전공 박사이다. Oh는 질병을 영의 질병, 정서적인 질병, 육체적인 질병, 귀신에 의한 질병으로 분류한다. 영의 질병은 개인적인 죄가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 주님께서 침상에 눞혀 나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고 하신 말씀은 그 병이 죄에 기원하고 있음을 암시함이 분명하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포함하여)가 파괴된 인간은 흔히 정서적인 질병을 앓게되며 때때로 신체적인 질병까지도 일으킨다. 감정의 질병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가운데서 입게되니 마음의 상처가 원인이 되는 병인 것이다. 그 다음 육체적 질병은 사고나 심리적 스트레스 등의 신체적인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질병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신이 일으키는 질병이 있다. 성경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라고 했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선포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병들었거나 신체적으로는 잠재적인 환자이며 결국 그 병으로 죽어갈 것이란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죄의 삸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145
불순종
Stephen Hill은 “불순종은 질병을 가져오고 순종은 치유를 발생시킨다” 고 하였다. 인간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 위에 머물러 있게 되고 그로 인하여 인간의 영혼과 심령은 약하게 되고 점점 하나님과 거리가 생겨나서 결국은 그 틈을 타고 병균이 침투하게 되어 사람을 파괴하는 것이라 했다.146 결국 질병은 죄라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 이 점은 T. L. Osborn 도 강조한다. Osborn은 말하기를 “교인들 75 percent가 병들어 있다”고했다.147 그 이유는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병들어 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지지하는 손길이 떠나버린 결과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치유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앞에서 의를 행하며 그의 계명과 유례를 지키면 재앙들과 질병들을 멀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출15:25-26; 레26:14-16; 신7:12-16; 28:22,27) 주님께서도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 지셨도다”라는 말씀(사53:4)이 성취 되었음을 선포 하셨다.(마8:17) 그러므로 모든 치유는 영적 치유 즉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도록 하는 것이 항상 우선되어 져야 한다.148 그리하여 죽은 영을 다시 살리는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롬8:10)
구원의 완성
그러면서도 Hyung Ryl-Park같은 이는 전인과 전환경 치유하는 Total Healing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신유나 치유에서 한걸은 더 나아간 것으로 전인(Wholeness)과 전환경(Environment)의 질병을 치유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를 건설하는 Total Healing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Park은 이것이야 말로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치유하셨던 주님의 목회를 온전히 계승하는 것이라고 한다.149 그러므로 Park은 그의 연구에서 특히 교회와 신학교, 병원의 연합적인 사역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효과적인 치유사역 구조는 포괄적이고 동시적인 네트워크 구조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 연구자가 속해 있는 예수교 대한 성결교단은 그 설립 이념중의 하나가 신유이다. 그러나 신학에서 그것을 제대로 배우거나 강조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교리를 잃어버리고 살아 온 것이다.
선교의 창
그러므로 신유 사역은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창(Mission Home)이 되도록 하는 사역이다. 그 사역의 중심은 교회의 본질과 깊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개개인이 복음으로 회복되고 건강한 육신이 될 때만 가정이 가정다울 수 있고 이런 가정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다움의 갱신이 있기 때문이다. 신유의 축복을 교회에 허락하시는 것은 그리스도가 통치하시는 천국 이전의 천국을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복음의 현장(Mission Home)을 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 나라 건설이 궁극적 목적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있어 신유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목회와 신유, 신앙생활과 신유,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요일 4:11) 하신 것처럼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교회의 교육적 책임은 교인들로 하여금 신유에 대한 많은 통찰력과 이해를 경험하도록 돕는것이다.
오늘날에도 신유는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세가지의 주요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하셨는데, 그 분은 가르치셨고, 설교를 하셨으며, 병자를 고치셨다.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가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그러므로 가르치심, 설교, 그리고 치유(teaching, preaching, healing), 이 세가지를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예수님은 여전히 이적적인 치유를 행하시는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사역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도시대에 종결 되었는가? 만일 오늘날에도 이적적인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사역을 실행하는 가운데서도 치유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유는 무엇이며, 만일 종결 되었다면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치유현상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그에 대해서 가장 부정적이었던 사람중의 한 사람은 결혼생활을 해오면서 아내의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Benjamin B. Warfield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언제나 초자연적으로 치료하신다는 것을 증험적으로(testily)부인했다.150
그러나 James Packer는 이러한 Warfield의 견해가 틀린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적적으로 치유를 하신다고 말했다.151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많은 속임수와 착각의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지금도 현실적으로 많은 치유의 이적이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다.
내과 의사이면서도 기독교와 심리학,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과 심리학적 원인과의 관계규명을 통하여 완전한 치유를 시도했던 스위스의 아마추어 심리학자 Paul Tournier박사도 신유의 기적이 종종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으며, 심리요법에 있어서도 기적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효과가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더욱이 신유는 부인 할 수 없다고 말한다.152
따라서 치유의 가능성 그 차체를 길게 논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다. 그것은 실제로 치유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치유가 특별한 은사 소유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가? 하는점이 문제가 될 뿐이다.
치유는 기도의 응답인가? 은사자의 능력인가?
이에 대해서 John F. Walvprd는 하나님이 아직도 그가 원하신다면 병자를 치유하시고 죽은자를 살리실 수 있으나, 이러한 기적들은 인간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영적 은사로서 수여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고 하며153 총신대학의 박아론 교수는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마찬가지로 이적와 신유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은사로서가 아니라 기도의 응답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다.154
그렇다면 오늘날 현상적으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 장기간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신유의 능력은 기도응답의 연속, 혹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개별적인 사역의 연속으로만 보아야 할 것이가? 그렇다면 특정한 사람에게만 소위 신유에 대한 기도의 응답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해서 둘 다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때로는 은사의 결과로서 치유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신유의 원인을 오직 특정인의 신유 능력만으로 혹은 기도의 응답으로만 들리는 것은 모두 극단론일 뿐이다.
치유의 영적 배경
그러나 이적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치유의 이적을 이방종교에서도 볼 수 있고, 공공연히 악령의 힘을 빌어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사실상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치유도 많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러한 경향들에 대해서 제자들과 사역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혀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영적 배경을 가진 기적적인 병고침은 성령이나 악령적 배경을 가진 것 중의 하나로 해석될 수 있다.155 따라서 이러한 치유의 영적 배경을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믿음의 치유-신유
치유(Healing)는 흔히 신유(Divine Healing), 또는 믿음의 치유(Faith Healing) 등의 용어로도 사용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신유는 치유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이 강조되는 반면에 믿음의 치유라는 말은 인간의 믿음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방법론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든다면 Stephen Hill은 치유를 받기 위해서 필요한 다섯가지 단계를 소개하는데, 그 중의 마지막 단계가 행동하는 믿음이라고 말하며 A. B. Simpson도 치유를 위한 일곱가지 실적 방안을 제시하면서 믿음안에서의 행동을 강조했다. 환자는 믿음으로 일어나 마치 건강한 사람이 된 것 처럼 믿음으로 걸어야 한다는 말이다.156
흔히 ‘Faith Healing'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몇가지의 충족되어야 할 요건과 공식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157 이러한 ‘신앙 공식적’ 사고는 신앙과 치유사이에 엄밀한 인간 관계가 있다는 이론에 기초하는데, 이 이론은 건강과 부요함과 같은 모든 하나님의 복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속적이고도 충분하게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믿음의 능력’을 하나님의 보물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러한 ‘신앙 공식적’ 사고의 특성은 인간 중심적이라는데 있으며, 이런 부류의 사고는 스스로를 Arminians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된다.158 이러한 사고의 근원은 19세기 복음주의자인 칠스 피니에게 까지 소급되는데 오늘날에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 널이 확산되어 있는 형편이다.
스코틀랜드의 신학자이자 카리스마적 부흥의 대변자인 Thomas Smail은 알미니우스와 찰스 피니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 개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는 ‘성결’에 대한 감리교의 가르침에서 시작하여 현대 오순절파에 까지 철저하게 파고들어와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세례와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조건들을 우리가 성취하는데에 달려 있게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고 충분히 회개하며 충분히 기도 한다면, 성령세례를 받고 온갖 은사들을 소유할 것이지만,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게 될 것이다.159
이러한 인간 중심적 신학이 치유에 적용될 경우, 결국 “당신이 충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들을 성취한다면 하나님께서 치유하실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치유하시지 않을 것이다” 라는 공식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치유의 실패는 항상 신앙의 결핌으로 귀결된다.160
‘믿음의 치유’ 주창자들은 치유가 일어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둘째로 필요한 경우 그 사람은 죄를 고백해야 한다, 셋째로 기름을 발라야 한다, 넷째로 다소간 생활이 거룩해야 한다, 다섯째로 그 사람은 일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치유자이신
그리스도께 그의 믿음을 두어야 한다, 여섯째로 치유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로 마지막으로 치유받은 것 처럼 행동하면 치유된다는 것을 믿고 치유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만일 치유를 위하여 실제로 이러한 모든 조건들이 요구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요건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므로 분명히 치유는 소수인에게 제한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며, 혹시 병이 낫지 못하더라도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예수님 자신이 치유를 위해서 어떤 사람이 제자여야함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예수님의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마 4:24, 14:35, 막 1:32-34, 눅 17:11-19)
또 주님 자신이 어떤 사람이 치유 받기 전에 죄를 고백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결코 기름을 바르지 않고도 치유해 주셨고, 사람들이 생활에 거룩함에 이를 때까지 치유를 미루지도 않으셨다. 그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어느정도의 믿음이 이르기 전에도 가장 어리석고 무지한 요청들에 자주 응답하셨다.(막 9:25-27)
이와같이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행적을 보면 기적적인 신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시한 신유를 위한 필요 조건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거룩함이 있든지 없든지, 특별한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간에, 주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은혜와 목적에 따라 신유를 베푸셨다. 신유는 공식이나 요건, 법칙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은혜에 기초한 주권적인 역사인 것이다
신유와 영적 싸움
신유란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 하나를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처음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져다준 사탄의 세력에 대한 것이다. 이 악한 영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몸이 의의 병기가 되지 못하도록 전신에 공격을 가하고 함정을 놓으며 그리고 우리를 질병과 신체장애로 고생하도록 획책한다. 그러므로 신유 사역을 영적인 싸움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모든 형태의 병은 사탄의 거짓 왕국의 특성이다. Ken Blue 는 Michael Green의 말을 인용하면
병과 죽음은 모두 첫 번째 사람이 사탄의 유혹에 “예”한 댓가로 사탄이 준 거짖된 거래의 일부분이요 꾸러미임. 신비하게도, 죄와 죽음과 병은 모두 불순종의 유산의 일부이다.161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과 피조세계가 언제까지 그렇게 허무한 것에 굴복하도록 내버려 두실 하나님이 아니신 것이다.
그 분은 파괴되고 악한 권세가 판을 치고 있는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권세로 침투해 들어오신다. 우리 주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선포는 신유에 의해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게 귀신을 쫒아내는 일에 의해 특징 지워졌다. 그 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 하셨다. 그리고 그 분은 사람들을 사탄의 속박으로부터 건져 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명해 보이셨다. 마태복음 12장28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으므로 이미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 나라의 권세가 긴장 가운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유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권세적 측면에서 이해 해야 한다.
신유사역의 장애들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유사역이 개교회에서 적용되는데에는 몇가지의 이유로 장애물이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의 온전한 교회적용을 위해서는 목회자가 상황을 잘 인식하고 이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을 설교 혹은 말씀공부를 통하여 해 놓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병을 통하여 성화시킨다? 는면 -Ken Blue는 하나님이 만약 병을 통하여 사람을 성화 시키시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인간의 가족관계에서 어린이를 학대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했다.162 어떤 어머니나 아버지가 자기들의 딸의 교만을 고치기 위해 그 딸에게 암을 주겠는가? 병든자들에게 그들의 병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을 이방인의 신과 같이 보는 것일 뿐이다.
신적 운명론- 흔히 칼빈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오해중의 하나이다. 병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낫기를 원하신다면 우리가 기도하든 기도하지 않든 치유가 일어 날 것이라는 것이다.
한 예로 처음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중 많은 사람들이 병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근거에서 끔찍한 천연두 예방접종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실제로 천연두를 막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63 이러한 신적 운명론은 오늘날 목회에서 문제로 나타난다. 사람이 병이 들었을 때 적극적으로 의사를 부르고 나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려야 한다. 신적 운명론은 낙심과 신유에 대한 수동적인 자세를 불어 넣어주기 때문에 기도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치유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하려면 이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잡아주기 위하여 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디모데전서 2장2절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또 베드후로서 3장9절에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다.
적극적 사고방식의 위험- “할 수있다”라는 식의 미국식 낙관주의가 기독교 근본주의와 결합하여 승리 주의적인 신학적 잡종을 낳았다고 Ken Blue는 통렬하게 지적한다. 예컨데 아이가 갑자기 위급하거나 호흡 곤란을 일으킬 때 적절한 의학적 조치를 취하기 보다 그저 붙들고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된다는 식의 사고는 극단적 신유 반대주위자들 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64
세속적인 세계관-신약성경에 나오는 제1세기와 같이 오늘날의 대부분의 비서구적인 문화는 초자연적인 치유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들의 세계관은 기적을 허용한다. 그러나 서구 세계는 세속적인 세계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이유 때문에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신세대 혹은 젊은 세대들은 신유사역이 일어나는데에 장애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기적은 자연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들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 분의 말씀으로 지어진 세계가 역시 그 분의 말씀안에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신유는 1세기 신약시대에만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에도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확장과 성숙의 표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이 신유의 사역을 진행하려면 무엇보다 교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해야 할 것인을 다시 한번 확증하게 된다.
신유의 방법 치유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신유사역을 목회의 한 측면으로서 교회에 시행하고자 할 때 그 방벙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를 살펴보자.
예수님의 치유 방법을 보면 크게 두 가지의 방법으로 나누어 진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말씀을 통한 치유이며. 둘째는 기도를 통한 치유이다. 말씀을 통한 치유라 함은 누가복음 5장 12-13절에 나와 있듯이 “예수가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저에게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게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중병이 떠나니라...” 또 중풍병들린 친구를 지붕을 뜯어 달아내린 이야기에서 주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면서 말씀으로 저를 깨끗게 하셨다.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들판에서 베푸실 때에는 아이가 가지고온 작은 음식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눅9:16)
그 외에도 만져 주셨다든지 아니면 진흙을 발라 주셨다든지 하는 것은 이러한 큰 두 맥락속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과 배려에서 나온 행동임을 John Tuner는 말하고 있다.165
Practical Applications(실제적인 적용)
이제 이러한 신유에 대한 이론적인 면들을 어떻게 목회현장에 적용할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한국의 경우는 이에 대한 이해나 실제적인 사례의 모범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세권의 책을 참고하여 그들이 밝히고 있는 신유사역의 사역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Moo Nam-Cho는 한국의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L. A. University에서 신학석사를 마친 목사이다. 그는 서울 창조교회와 분당제일기도원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사역을 하고 있다. 그는 개척후 오랜 기간의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신유 사역을 발견하고 부터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어 교회 부흥의 획기적인 전환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분당제일기도원 뿐 아니라 전국의 교회와 기도원에서 신유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내의 현직 목사들을 대상으로 신유에 대한 세미나를 실시하면서 이의 보급과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Cho는 밝히길 모든 목회자들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그도 신유
은사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은사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만 특별히 주는 것으로 이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은사를 구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40일을 금식하며 다시 하나님께 은사를 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똑 같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가운데 신유에 대한 특별한 은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나라의 권세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함에 있어 모든 은사는 자신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교인들을 붙들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결과 한 두사람이 낫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이제는 목회자들까지도 모여들어 일약 한국에서 가장 신유에 대한 확신있는 목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166
Cho는 그의 책에서 대략적으로 밝히길 치유사역에 있어 예비적 단계가 중요하다고 했다. 즉 교인이든 목회자이든 하나님의 신유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이므로 이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적 신학적 토대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유
사역이라고 하는 것은 치유에 대한 집회나 모임도 중요하지만 성경공부를 통하여 올바른 성경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볼 수있다.
Cho는 신유사역을 영성 운동이라고 했다.167 그의 사역은 철저한 성령을 의지하는 사역으로 요약될 수있다. 즉 신유사역은 어디까지나 신유의 근원되시는 성령의 나타남과 도움이 없이는 안되는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해 주시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흐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우리자신의 모든 장애 요소를 제거하고 성령의 나타남에 민감하도록 우리의 영성을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168
Sung Ho-Cho는 육군7557부대 내에 있는 ‘천마군인교회’에서 시무하는 군목이다. 그는 군인의 목회사역에 시간을 내어 아세아 연합신학연구원에서 전인적인 치유사역에 대하여 연구하였는데 이는 대부분 그의 군목회 현장에서 경험되어지고 행하였던 사역의 결과들이었다. 그는 군목회의 경험을 살려 신유사역에 있어 팀사역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즉 현대의학은 인간의 전인성을 망각하고 있다. 이는 현대의학이 과학적인 방법에 지나치게 의존한 댓가이며 인간의 전인성을 무시한데서 기인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전인적 치유를 혼자서 감당하셨지만, 인간에게는 주어진 은사가 다양하므로 효과적인 치유를 위해서는 전인치유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으로 전문인들이 모여 팀을 조직하여 사역함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의료인, 목회자, 심리상담자, 사회사업가, 경제인 그리고 자원봉사들이 연합으로 사역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누가복음 9장1-2절, 마태복음 10장5-8절, 마가복음 6장7절은 이러한 치유사역의 팀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169
- 청소년을 위한 -
┌─────────────────────┐
│ [1] 청소년 교육목회의 접근방법 │
│ 1. 세가지 유형의 활동들 │
│ 2. 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결정 │
│ │
│ [2] 세가지 접근방법 │
│ 1. 모임중심의 방법 │
│ 2. 사건중심의 방법 │
│ 3. 개인중심의 방법 │
│ │
│ [3] 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개발 │
│ 1. 접근방법 선택 │
│ 2. 참여자의 범위 결정 │
│ 3. 핵심활동 결정 │
│ 4. 보충활동 결정 │
│ 5. 프로그램 작성 │
│ 6. 지도력 결정 │
└─────────────────────┘
청소년 교육목회란 교회가 청소년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행동하는 모든
것이며, 또한 청소년이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행하는 모든 것이다.
이것은 청소년 교육목회 지도자가 목회를 조직할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효과적인 교육목회가 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교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조직하여 개발해야 한다. 따라서 각 상황에 맞는 세가지 유형의 접근방법을 설명하
고, 각 교회의 교육현장에서 얻는 것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여 그 방법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소개하는 것이 청소년 교육목회의 개발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1]. 세가지 유형의 접근방법
1. 새가지 유형의 활동들
청소년 교육목회를 활성화하는 여러가지 활동들은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진다.
첫째, 교회학교, 성가대, 성경연구그룹, 아침기도회 등과 같은 모임중심의 활동이
있다. 이것은 한 그룹이 보통 1주나 2주마다 규칙적으로 모임을 갖고 활동
하는 것이다.
둘째, 여행, 수련회, 기금운동, 학생총회, 봉사활동, 축제등과 같은 사건중심의 활
동이 있다. 이것은 한 그룹이 정기적으로, 보통 한달이나 두달마다 한 사건이
나 계속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모임중심 활동보다 특수한 활동
에 촛점을 둔다.
세째, 스낵코너 모임, 상담, 예배지도자 훈련, 교회위원회에의 참여, 스포츠 관람등
과 같은 개인적 활동이 있다. 이것은 1 대 1 로 행해지며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가는 정해져 있지 않고, 그룹보다는 개인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교회는 청소년 교육목회에 있어서 이 세가지 유형의 활동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각 교회에 가장 적합한 어느 한가지 유형의 활동을 쥼심으로 하고, 다른 활
동을 보충함으로써 효과적인 교육목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2.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결정
그러면 어느 유형의 활동을 중심으로하는 접근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첫째, 교육목회의 목적을 성취 할 수 있는 접근방법 이어야 한다.
둘째, 접근방법은 교육의 대상이 청소년이 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째, 교회공동체나 가정, 학교등의 교육환경에 맞는 접근방법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등을 염두에 두고 다음의 질문지를 작성하여 해석함으로써 각 교회에 적합
한 접근방법을 결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지: 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결정>
제 1 부. 우리 교회의 일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대답에 V표 하라.
. 어떤 청소년을 교회의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시키고자 하는가?
1. -----교회에 속해 있는 가정의 청소년
9.-----교회에 속한 청소년과 그렇지 않은 청소년 모두
. 교회가 참여하기를 원하는 청소년은?
2. -----교획 밖의 비기독교적 운동에 비교적 자유로운 청소년
10.-----교회밖의 비기독교적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청소년
.청소년들은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3. -----아주 잘 안다.
11.-----별로 알지 못한다.
. 청소년들은 서로 얼마나 화목한가?
4.-----매우 화목하다.
12.-----별로 화목하지 않다.
. 청소년들은 어떤 학교에 다니는가?
5. -----대부분 같은 학교
13. ----- 대부분 다른 학교
.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교회로부터 얼마나 멀리에 사는가?
6. -----도보로 또는 차타고 가까운 거리.
14.-----걷기에는 너무 멀고 차를 타야 하는 거리.
. 함께 모이는 것A 대해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7. -----규칙적으로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15.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자주 모일 수 없는 상황이다.
17.-----함께 모이기를 즐기지 않는다.
. 청소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성인들은 어떻게 생갹하는가?
8. -----기꺼이 응하고 규칙적으로 참석한다.
16. ----- 청소년 그룹과 함께 활동하고자 하나 규칙적으로 시간을 할애
하지 못한다.
18. ------많은 수의 성인들이 청소년과 함께 하기를 원하고 그것이 가능하나,
중고등부 프로그램을 지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제 2 부. 우리 교회의 실정을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모두 골라 V표하라.
----- 1. 청소년은 규칙적인 모임을 통해 그들의 신앙을 배우고 경험해야 한다.
----- 2. 청소년들은 거의 매일을 함께 시간을 보낸다.
----- 3. 교회건물에 청소년 모임이나 리크레이션을 위한 공간이 따로있다.
----- 4. 교회는 청소년의 모임장소이다.
----- 5. 청소년은 중고등부 프로그램의 다양한 변화를 원한다.
----- 6. 특별한 활동을 위해서 청소년 자치회비나 교회교육비 지출이 가능하다.
----- 7. 여러가지 활동을 위한 많은 시설과 자원이 있다.
----- 8. 청소년과 성인은 계획과 활동에 기꺼이 시간을 할애하고자 한다.
----- 9. 청소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요구 보다는 개인적인 특수한 요구에
응답하는 데 중점을 둔다.
-----10. 교회교육의 우선적 관심사는 청소년들이 교회의 전체 활동에서 꼭 필요
부분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11. 교회가 청소년 프로그램에 사용할 자원이 별로 없다.
-----12. 어떤 그룹을 형성할 만큼 청소년이 많지 않다.
<결과를 해석하는 방법>
┌──┬──┬──┐
│ A │ B │ C │
제 1 부와 2부에서 ┌─────────────┼──┼──┼──┤
아래의 각 그룹에 해 │ 제 1 부 1 - 8번 │----│----│----│
당되는 V표가 몇개 │ 9 - 16번 │----│----│----│
인지 세어서 ----칸에 │ 9 - 14,17,18번 │----│----│----│
기록하라. ├─────────────┼──┼──┼──┤
│ 제 2 부 1 - 4 문장 │----│----│----│
│ 5 - 8문장 │----│----│----│
│ 9 -12문장 │----│----│----│
├─────────────┼──┼──┼──┤
│ 합 계 │----│----│----│
└─────────────┴──┴──┴──┘
A, B, C 중에서 ┌──────────┬────────────┐
합계가 가장 많은 것이 │가장 빈도가 큰 항목 │ 가장 적합한 접근 방법 │
우리 교회에 가장 적합 ├──────────┼────────────┤
한 접근방법이다. │ A │ 모임 중심의 접근 방법 │
├──────────┼────────────┤
│ B │ 사건 중심의 접근 방법 │
├──────────┼────────────┤
│ C │ 개인 중심의 접근 방법 │
└──────────┴────────────┘
이 질문지에 의해서 일단 접근방법을 선택했으면 이것이 정말로 가장 적합한가를
다시 한번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 장에 소개 된 세가지 접근방법 중 우리
교회가 선택한 것을 읽는다.
[2]. 세가지 접근방법
1. 모임중심의 방법
이것은 1주나 2주 간격으로 규칙적인 모임을 갖고 만나서 서로의 관심사나 요구를
나누고 배우며, 리크레이션이나 선교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장점 : 계속적인 그룹유대감과 친교가 가능하다. 청소년들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깊이 있게 주제를 연구하거나 기획을 실행하게 한다.
계획과 모임이 복잡하지 않다.
약점 : 청소년과 성인들에게 빈번하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한다. 지속적인 흥미
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교회내의 청소년을 위주로 하고 그들의 연대의식이
강하여 외부 청소년이 참여하기 힘들다.
모임중심의 접근방법의 기본적 모델은 아래의 것들을 포함해야 한다.
(1) 주일아침 45분 내지 1시간 동안 모여 교과과정을 배우는 교회학교,
(2) 주일저녁(또는 평일저녁)에 1시간 반동안 규칙적으로 만나서 그룹 프로그램
을 실행하는 청소년그룹
(3) 기타 수련회,리크레이션,캠프,특별예배 등 다른 유형의 황등들도 때때로
실행되어야 한다.
2. 사건중심의 방법
이것은 한달 또는 두 달 간격으로 주요 경험을 나누는 것으로, 새롭고 다양하고
흥미로운 사건(활동) 자체에 중점을 둔다.
장점 : 시간을 빈번하게 소요하지 않고도, 특별한 활동에 열심히 참여한다.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활동한다. 특히 청소년에게 호감을 준다.
약점 : 지속적인 출석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만남이 빈번하지 못하다. 새롭고
흥미로운 사건들을 매번 개발해 내기가 쉽지 않다.
사건중심의 접근방법은 아래의 활동들을 포함해야 한다.
(1) 의미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깊이 있게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집중적인 시
간을 제공하는, 1년에 3-5회의 수련회.
(2) 성탄절, 학기말 등의 절기를 축하하는 파티나 저녁식사등의 사교적 모임.
(3) 방학중의 캠프여행이나 선교여행.
(4) 타교회 청소년들과의 연합활동.
(5) 기타 중고등부 교회학교나 개인들의 사적인 사간도 적당히 첨가한다.
3. 개인중심의 접근방법
이것은 청소년과 성인 또는 청소년 간의 1대1의 관계에 기초하여 개인적 관계개
발에 중점을 두며, 장소가 자유롭다. 이 상호작용은 상담, 기술습득, 오락, 연구
대화, 또는 세례문답 공부일 수도 있다. 청소년은 분리된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교회가족의 한 부분으로 격려 받는다.
장점 : 청소년이나 성인의 흥미와 관심사가 교육자원으로 사용된다. 밀접한 관계
를 형성한다. 비기독교인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 한두명으로도 활동이
이루어진다. 개인의 요구를 존중하며 개인을 교회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다. 교회로부터의 경비지출이 요구되지 않는다.
약점 : 또래집단이 함께하는 기회가 없다. 성인지도력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1명의 청소년에 1명의 성인이 이상적이다.)
개인중심의 접근방법은 아래의 활동을 포함해야 한다.
(1) 취미, 교회에서의 역할등에 같은 흥미를 갖고 있는 성인과 청소년 1명씩을
짝짓기
(2) 예배에의 적극적 참여.
(3) 목사나 교인들과의 비공식적 만남.
(4) 기타 교회학교 활동이나 또래집단 활동도 적절히 첨가하고 보충한다.
[3] 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개발
세가지 방법중에서 가장 적합한 것으로 하나를 선택했다 해도 우리 교회의 실정이
나 요구와 차이가 있을 수가 있다. 따라서 각각의 교회의 상황에 따라서 그것을 수
정하고 개발해야 한다.
1. 접근방법 선택
1장에서 제시된 질문지('우리교회에 적합한 접근방법 결정')를 다시 해보고 충
분히 검토하여 우리 교회에 필요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룹으로 햄께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도 좋다.
2. 참여자의 범위 결정
(모임중심과 사건중심 접근방법의 경우)
(1) 청소년 교육목회 프로그램을 우리 교회가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타
교회와 연합하여 할 것인가?
(2) 중고등부를 하나로 합할 것인가 아니면 둘로 나눌 것인가?
장단점을 잘 고려하여 이 두 문제를 결정한다.
중고등부가 연합되어야 할 경우에는 이점을 유의한다.
첫째, 프로그램이 활동적이어아 한다.
둘째, 흥미위주의 프로그램이 많은 것을 걱정하지 말라. 이것은 상호관계를 위해
필요하다.
세째, 같은 연령 그룹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네째, 4-5명 이내의 소그룹 참여를 위한 프로그램이 제공되어야 한다.
다섯째, 청소년 스스로 참여를 선택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주인의식을
높여준다.
여섯째, 개인적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3. 핵심활동 결정
핵심활동은 교육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중심이 되는 활동으로, 각 접근방법에 따
라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모임중심 활동 : 교회학교, 친교그룹, 성서연구 그룹, 성가대, 스포츠 팀,
아침기도회, 연극 그룹, 리크레이션, 연구그룹, 신문발행.
사건중심 활동 : 수련회, 철야기도회, 여름성경학교, 여행, 봉사활동,
노회단위 행사, 사교모임, 축제, 세미나, 기금운동, 하이킹,
캠핑, 스포츠 경기, 타교회 방문, 절기 축하행사, 공연,
상견례.
개인적인 활동 : 스낵코너 모임, 병원방문, 가정 방문, 상담, 학교 방문,
예배 참여, 특별활동 참석, 생일축하 활동, 특수기술 습득,
사적인 대화, 교회지도자와의 관계, 같은 흥미와 기술을
지닌 성인과 팀 이루기.
핵심활동 결정은
(1) 선택한 접근방법의 목록을 읽고 같은 유형의 여러 다른 활동을 첨가한다.
(2) 교회에서 효과적이고 가능성 있는 활동들을 고른다.
(3) 호라동들의 이점과 문제점을 평가한다.
(4) 핵심 프로그램이 될 한 두가지의 활동을 선택한다.
(5) 활동을 구체화하여 적는다. (누가,무엇을,언제.....)
(6) 검토한다.
4. 보충활동 결정
한가지 유형의 활동만으로 부족한 것을 다른 두 유형의 활동으로 보충할 필요
가 있다.
(1) 두 영역의 목록을 읽고 여러 활동을 첨가한다.
(2) 효과적인 활동을 고른다.
(3) 핵심활동에서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는가, 자원이나 시간이 가능하고
흥미로운가를 평가한다.
(4) 교회의 실정에따라 활동의 수를 조절하여 보충활동을 선택한다.
5. 프로그램 작성
이상에서 결정된 것들에 의해 프로그램 계획서를 작성한다. 교육목적, 활동
(핵심,보충), 참여대상, 활동시간과 정소등이 기록되어야 하며 프로그램이 전
체적으로 균형이 맞는가를 검토한다.
6. 지도력 결정
지도자는 2,3인 이상의 팀으로 구성되는 것이 좋다. 성인 지도자는 신앙의 의미
를 삶으로 보여주는 모델이며, 청소년을 안내하고 돕는자이고, 그룹의 개발을
증진시키는 자이고, 상담자, 조언자, 지지자이며, 문제가 있을 때에 중재자이고,
청소년들의 변호자인 동시에 그들의 행동에 대한 감독자이다.
청소년 지도력 체계에는 두가지가 있다. 이러한 임기로 선출된 임원(회장,부회
장,서기,회계)으로 구성되는 내각제는 책임분담과 유지가 지속적이지만 유동성은
적다. 특별한 직무(예.수련회 계획)를 위해 선발된 보통 6,7인 이하의 그룹으로
구성되는 직무분담제는 유동성은 있으나 지속성이 부족하다. 이 두체계를 다양하
게 결합시켜서 새롭고 효과적인 청소년 지도력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교회의 중고등부 교육은 대부분이 교회학교제도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개된대로 세가지 유형의 다양한 활동들을 적용함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교회목회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Jeffrey D. jones & Kenneth C. Potts, Organizing a Youth Ministry
---------------------------
to Fit Your Needs. Valley Forpe : Judson Press, 1983.
-----------------
<민경미 편역>
* 청소년 이해와 신앙지도 *
1. 청소년은 과도기에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유년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동시에 청년기에 접근하고 있으며 성
년에 이르는 길에서 배회하는 자들이다그래서 때로는 의타심이 많은철부지
잣을하가 하면반대로 아주어른스러운 침착한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
한 과도기에 있자들에게는 그들의 행위를 전적으로 긍정하여 줄 수는없다
하여도 충분히 이해하여 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2.십대는 생의 규모가 구체화 과정에 있는 자들이다.
쉬운 말로 말하면 "아교"와 비숫하다. 그래서 그럴듯한 생의 형태를 취
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틀이 잡혀지고 있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이들은
현재 어떤 감명받은 것이다 각오 같은 것들을 그들의 인격형성을 위하여
채택 중에 있다.
3. 십대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자들이다.
십대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공장이며 능력의 보고이다. 십대는 내일의 주
인공이므로 그들의 잠재적 욕구는 성년기에 들어가서 꽃필 수 있도록 훈련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들의 성격과 영혼 문
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영원히 변화시켜야 한다.
4. 십대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청소년에게는 유토피아가 현실로 생각한다. 그래서 진리에서 털끝만큼
이라도 허위를 발견할 때에는 마음이 크게 상하게 되고 이러한 것을 인류
의 안녕에 크게 저해되는 요소로 여긴다.
5. 십대는 능력은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자들이다.
십대가 약속을 충실하게 지킬 수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많은 헨디켑을
안고 있는 것이 십대들의 생리이다. 미성숙, 미혼, 경험부족같은 것들이
청소년들의 길이 놓여있는 방해물들이다.
6. 십대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급진적 성숙기에 있는 자들이다.
어제의 소년이 갑자기 어른의 골격을 갖추기 시작하고 아직 꼬마 소녀라
고 생각되었던 아이에게서 숙녀다운 담백한 사랑스러움이 나타난다. 어떠
한 품위있는 태도는 그러한 급진적인 현상에 수반되는 모든 결점들을 보완
하여 주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이련한 때에 청소년에게는 자신을 제어하
는 힘이 서툴다. 이들은 자신의 육체적 성장에 자연히 호기심이 생기며 자
신의 의문을 풀려고 지나치게 과열되기도 한다.
7. 십대는 도전적인 것에 감흥되는 자이다.
이들의 생각은 자신을 자극하여 주는 자들에게 사로잡힌다. 일을 할 때
에 도전받는 것이 없을 때에는 솔직히 실망하고 만다. 이들은 오지에 의료
선교사로 헌신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듣지 못한 장글 속의 부족들에
기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하고 싶어 한은 자극을 받기도
한다. 이들은 생각하기를 만약 자기를 안내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
이 가치있는 목적을 향하여 인도되도록 자신을 훈련시키고 격려하여 주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의 젊음 마음을 사로잡는 그 일을 하려고 하는것이다.
8. 십대는 알고싶어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순수한 지식에 목말라 있다. 십대는 자기들을 능력있게 가르치는
자들에게 매혹된다. 그리고 답변을 잘 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의 지배를 받는 신실한 사람들이 가르
쳐 주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 앞에서 이들은 감화를 받는다. 그리고 성경이
제공하여 주는 확고한 토대를 소중히 생각한다.
9. 십대는 자제가 필요한 자들이며 자제하게 될 때 가장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다.
십대는 규율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품행에 대한 좋은 규율을 세워주는
아버지를 가진 친구를 부러워한다.
10.십대들은 하나님이 필요한 자들이다.
십대는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모실 진공관을 가지고 있다. 십대만큼 하나님께 접근하고 또 하나님에 대
한 강한 인상을 받는 순간이 더 없을 것이다. 십대는 막연히 주님을 필요
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지금 주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십대가 하나
님의 음성을 듣고 가장 감응이 잘 될 수 있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Francis S MacNutt는 하바드 대학에서 학사를 미국의 카톨릭대학에서 석사학위 받고, 그리고 아퀴나스 신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원래 카톨릭에서 설교학 교수로 지냈짐만 하나님은 그를 성공회 평신도 사역자로 부르셔서 지금은 치유사역자로 봉사하고 있다. MacNutt의 치유사역은 초교파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큰영향을 주고 있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함께 1992년 7월 자신들이 운영하는 기독교 치유 봉사회(Christian Healing Ministries)의 여러 동역자들과 함께 한달 내내 영국과 아일랜드의 성공회 및 여러 교파의 교회에서 치유집회를 인도했다.
MacNutt는 원래 의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신부가 되었던 그는 1956년 7월 한 친구가 자기 아들의 부분적인 실명상태를 치유해 달라고 왔을 때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가기를 거절하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구를 실망 시킬까 두려웠기 때문에 가기를 두려워 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1966년 미국연설협회에서 소개 받은 Jo Kimmel을 소개 받고 그와의 대화후 계속된 만남 가운데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 못하였던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 즉 하나님께서 기도에 기적적인 신유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를 따라서 참석해본 신유 집회에서 실제로 그녀의 기도와 믿음 가운데에 일어서는 수 많은 병자를보고 그는 하나님의 신유를 믿게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다.170
MacNutt는 지금까지 본 신유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4분의 3정도가 치료되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그 자신도 신유사역자가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1977년 “치유기도의 능력”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 있는 성 빈센트 병원에서 찍은 것이다. 이 영화는 팀의 의료진의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24명의 환자를 두고 이틀동안 기도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의료진의 수석 전문의인 스티프 박사가 20명의 환자들이 자신의 상태가 호전 되었음을 느낀다고 보고하는 것으로 결과를 요약하고 있다. 약 20명중 15명은 그 변화가 의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청각 자료들이 그들의 신유사역을 확산시키는데에 큰 기여를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연구자는 여기서 신유 사역에 있어서 믿음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된다. 대개의 신유자들은 처음부터 은사가 나타나서 이를 행하는 가운데 신유 사역자가 되었다기 보다 현장을 보는 가운데 아니면 신유 사역자들과의 대화 가운데에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이에 대한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된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신유사역을 교회내에서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실제적인 사역의 현장을 보여 주면서 해야하는 것이 중요한 것을 보여준다. 실제 사역의 현장으로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세미나중에 아픈 자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기회를 가지든지 하는 것이 필요하다. 믿음은 들음과 봄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이 나타나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신유가 나타나는 곳에는 성령의 임재와 함께 감동이 일어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사람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