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
碩士學位論文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
목 차
국문초록
Ⅰ.서론 ----------------------------------------------------
1
1. 연구의 목적 ------------------------------------------
1
2. 연구의 범위 ------------------------------------------
2
Ⅱ. 죄에 대한 성경적 견해 ------------------------------------
3
1. 죄의 기원 --------------------------------------------
3
2. 성경에 나타난 죄의 결과 -------------------------------
6
1) 인간관계의 파괴 ------------------------------------
7
2) 가 난 ---------------------------------------------
8
3) 질 병 ---------------------------------------------
10
4) 귀신들림 -------------------------------------------
18
Ⅲ. 십자가를 통한 치유 -------------------------------------
33
1. 죄인의 구원 ------------------------------------------
33
2. 치유의 이해 ------------------------------------------
37
3. 예언의 성취 ------------------------------------------
43
4. 예수와 하나님 나라 -----------------------------------
48
5. 악의 정복 --------------------------------------------
49
Ⅳ. 결론 --------------------------------------------------
53
참고문헌
Ⅰ. 서 론
1. 연구목적
오늘날 과학의 발달과 의학의 발달, 정보화 시대에 살면서 사람들의 마음은 물질 만능주의로 더욱 빠져 들어가고 황폐화 되어가고 있으나 이 시대를 변화시켜야 할 교회는 무기력해져 가고 있다. 시대가 악할수록 복음의 능력이 빛을 발하여 많은 사람이 빛을 보고 나아갈 바를 찾아야 하는데 교회조차도 무기력해져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교회 성장이 눈에 띄게 둔화되어가고 아니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선포되는 목회자들의 메시지나 신학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치유, 은사, 능력, 기적, 이적 등의 단어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이들 주제를 다루는 사람이나 내용을 무속적인 것으로 취급해 버리고 말씀(이들이 강조하는 말씀은 오로지 문자화된 지식 또는 정보로 인식되는 것만을 말함)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 복음의 능력보다는 큰 무기력과 상실감을 안겨왔고 말씀의 능력이라 하는 것은 수사학적 기법의 사용이나 정보를 수집해서 적당히 배열하고 가끔 유머를 썩어가며 전하는 말씀이 은혜요 진리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다 보니 역동적인 부분은 모두 제거되고 능력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양육되어 온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은 단지 문자화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능력이요, 생명이다. 거기에는 눌린자를 자유케하는 것과, 치유와 기쁨이 있다. 오늘날 목회의 현장에는 이러한 사건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장하는 자들간에 대립과 갈등을 많이 격음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를 돌아보면 시대가 아무리 험악할 지라도 믿는 자들에게는 능력이 있었고 역동적이었다. 그들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현장에는 병든자가 나음을 얻고, 악한 귀신에게서 자유함을 얻고, 죄사함을 받는 전인적인 치유의 능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그들의 삶을 다드리는 전폭적인 헌신이 있었다. 믿는다는 것은 다른 불신자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창세기는 천지가 말씀으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고 했고,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의 수많은 곳에 말씀으로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어쫓으며 죄인들을 자유케한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말씀은 곧 능력이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치유가 일어나고 능력으로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권세와 권능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목회의 현장은 말씀이 실현되는 현장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능력으로 확장되는 현장이어야 한다. 그러한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통치 그리고 그분의 무한하신 은총과 십자가를 통한 구속사역의 상징으로서 초대교회가 그랬듯이 오늘날의 우리로서도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지상과제가 된다.
이 논문은 오늘날 교회와 초대교회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극히 제한된 복음의 해석과 적용에 있다고 전제하고, 그 중에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를 살펴 봄으로 복음의 해석의 차이를 줄여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모습을 회복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2. 연구의 범위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를 살피기 이전에 인류에게 질병과 저주가 어떻게 임하였으며, 인간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기 이전에는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를 연구하는 것이 객관성을 잃기가 쉽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크게 두 단원으로 구분 되는데 첫째는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미쳐진 죄과로서 치유 받아야 할 인간의 상태를 다루었고, 둘째는 그에 따른 십자가상의 사건이 치유 받아야 할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보았다.
이 논문은 본론에서 인간의 질병의 통로가 된 죄의 문제를 그 기원에서부터 그에 따른 죄의 결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 즉, 인간관계의 파괴, 가난, 질병, 귀신들림에 대한 연구와 십자가의 사건이 하나님과 단절됨으로 인해 치유 받아야 할 인간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의 ‘치유하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지 연구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나타난 치유의 의미를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단순히 죄사함이나,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치유만을 다루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인간이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말미암아 나타나게된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측면에서의 장애와 그 모든 측면에서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십자가의 사건을 연구하였다.
Ⅱ. 죄에 대한 성경적 견해
성경에 따르면 인류의 문제는 죄에서 비롯되며, 죄의 문제는 반드시 거기에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데 있다. 더구나, 그 죄과는 죄악된 행동의 결과로서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차원에서 전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Gary S. Greig, 「하나님 나라의 능력」, 명성훈 역(서울 : 나단출판사, 1997),
pp. 149-150.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그 죄된 현상은 말과 생각, 행동, 태도로 나타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다”(렘17:9). 그리고 예수님은 “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방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1)라고 말하였다.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의 사악한 자기 중심성이다. 모든 죄는 예수님이 ‘가장 크고 첫 째되는 계명’ 이라고 부르신 그것을 어기는 것인데, 이는 단지 우리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요 주님으로 인정하고 순종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 계명을 범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피조성 속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존적 위치를 거절하고, 도리어 독립을 얻고자 노력하였다. 더욱 악한 것은, 우리가 감히 우리의 자존 (self-dependence), 우리의 자율성을 선언했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점유하신 위치를 주장하는 일이다. 죄는 전통적 표준에서 그저 유감스럽게 탈선한 정도가 아니다. 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으로(롬8:7),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반항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John R. Stott, 「그리스도의 십자가」, 황영철외 역(서울 : 한국기독학생출판부, 2000), p. 121.
1. 죄의 기원
죄가 언제, 무엇으로부터 유래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단지 성경상에 최초의 죄의 모습이 드러난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부터 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창2:16-17, 3:6-7). 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신학사전」, p. 647.
구약이 보여주는 죄의 역사는 창세기 3장의 인류의 범죄로부터 시작된다.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마귀를 통한 뱀의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 의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하고 만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심으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스스로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만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죄의 전형적인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그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본질로 하고 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에 순복하기를 거부하였다. 이 최초의 시험과 범죄는 하나의 특수한 사건이면서 전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한 중대한 역사적 사변이었다. 그의 범죄를 분석하여 보면 지성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고 뱀의 말이 사실일 것이라는 판단이었고, 감정에서는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써 얻는 불결한 만족이었고, 의지에서는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죄는 우리의 정신적 태도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도 변화를 가져 왔으며 관계를 파괴시켰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뱀과 남자와 여자에게 그 죄로 말미암은 심판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심판은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죄는 그들이 벌거벗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죄로 말미암은 수치를 느끼게 되어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창3:7).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창3:8). 자연계 또한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어 인간이 수고하여 땀을 흘려 땅을 일구고 경작해야만 겨우 땅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3:17).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그 후 남편 아담도 먹도록 한 하와는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 남편에 대한 사모와 복종해야 했고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다(3:16,17).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3:19). 박철우, “구약성서에 나타난 죄개념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대학원, 1992), pp. 7-8.
성경은 인간의 범죄함에 앞서 사탄의 타락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된 말씀중 이사야 14장 4-21절의 말씀과 에스겔서 28장 12-19절의 말씀이 예언의 대상인 바벨론과 두로의 왕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더 이상의 해석이 필요 없다고 한다. 그 왕들은 부유했으며, 매우 교만했다. 그리고 예언자의 예언에서 보여지듯이 오만 때문에 그들은 모든 권세와 부를 빼앗기고 비천해졌다.
어떠한 구절에서도 사탄에 대해 참고할 만한 내용이 없고, 심지어 2차적인 의미로 해석한다 해도 영적인 것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는 개체적인 악마와 그의 추종자들이 실존함을 믿지 않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몇몇의 복음주의 주석가들에 의해서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유명한 많은 신학자들을 포함한 다른 신학자들은 이러한 예언적인 구절들이 사탄의 원상태와 그를 타락하게 한 죄에 대해 매우 귀중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두 학파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견해가 정당함을 입증하려고 결렬한 논쟁을 벌인다.
이 말씀은 시적, 문학적인 의미로 해석한 다 하더라도, 이러한 말은 이방인 왕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전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당대를 뛰어 넘는 사건을 볼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순전히 일시적인 현상들로만 보이는 것 뒤에 있는 강력한 영적인 존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Oswald J. Sanders, 「사탄의 정체」, 김문기 역(서울: 보이스사, 1987), pp. 26-28.
또한 메시야의 도래를 암시하고 있는 신약성경에서 입증된 구약성경의 구절들은 보통 매우 정상적인 환경하에서 나온 것들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탄-“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니”(유1:6)- 바로 이 천사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지위를 원했으며 결국 이러한 교만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을 유혹함으로 인간 또한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인간의 타락이전에 사탄이 타락한 것과 인간의 타락의 배경에는 사탄이 깊이 개입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함으로 사단의 권세아래 있게 되고 사단으로 말미암은 질병들과 귀신들림 등에 시달리게 되고 사망에 종노릇하게 되었다.
2. 성경에 나타난 죄의 결과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는 마귀를 통한 뱀의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유혹에 의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하고 만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심으로,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이 스스로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범죄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죄는 그들이 벌거벗은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죄로 말미암은 수치를 느끼게 되어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창3:7).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 서는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게 되었다(창3:8). 자연계 또한 인간에게 가시덤불과 엉컹퀴를 내어 인간이 수고하여 땀을 흘려 땅을 일구고 경작해야만 겨우 땅으로부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3:17).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고 그 후 남편 아담도 먹도록 한 하와는 잉태의 수고와 해산의 고통, 남편에 대한 사모와, 복종해야 했고 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다(3:16,17).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3:19). 즉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고 동물들이 인간과 사이좋게 지내며, 땅이 인간에게 손쉽게 먹을 것을 제공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평등한 관계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며, 죽음이라고는 도무지 알지도 못하던 원래의 피조된 세계가 인류의 타락 이후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Gary S. Greig, op. cit., pp. 150-51.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악한 자의 행위는 자기 자신의 머리 위로 돌아가게 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결코 범죄와 형벌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창4:13절은 “가인이 여호와께 구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의 죄벌은 그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죄의 형벌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다가 오히려 벌로 추락된 노예상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결정적인 것이었다. 박철우, op. cit., p. 26.
어거스틴은 인간은 탐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온전성, 통일성, 안전성, 즉 행복을 잃어버리게 됐으며, 명예욕, 권력욕의 필연적인 결과는 무서운 질병과 같은 전쟁으로 인류를 괴롭힌다고 했다. 또 정욕이란 죄를 지은 결과인 동시에 죄에 대한 벌로 인간은 정욕의 샘에서 뒹굴게 되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는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신상균, “죄에 대한 현대 신학적 이해” (석사학위논문, 감리교신학대학교대학원, 1997), p. 68.
이와 같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는 죄로 말미암아 영적 죽음과 정신적 황폐화, 육체적 질병과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고, 마귀의 지배아래 놓이게되어 평생 마귀의 종노릇하다 죽을 인생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죄의 결과적 측면을 자세히 설펴 보고자 한다.
1) 인간관계의 파괴
죄는 이렇게 구약이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죄의 결과는 인간관계의 파괴이다. 아담과 하와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이후로 인류는 죄의 씨앗은 무섭게 번지기 시작하고, 인간 심성 깊숙이 파고들어 인간관계에서 나타나게 된다.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의 자녀인 가인이 아벨을 쳐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게되고, 그 이후 창19장을 통해 소돔의 죄로 인해 하나님이 그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죄는 확산되었는데 죄의 확산은 곧 인간관계의 파괴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으로 소돔의 죄는 그 도시의 파멸을 가져 왔고, 이이야기는 롯의 딸들에 의해 행해진 근친상간에 관한 일화로 끝맺게 된다.
시편과 예언서들에서도 죄과로서 인간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의 파괴 즉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를 푸대접하고, 히브리 노예들을 놓아주지 않고, 당시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었던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폭력과 간음이 증가하는 등의 예를 발견하게 된다. Gary S. Greig, op. cit., p. 152.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은, 사회 기강이 문란하게 되는 현상이 인간의 죄로 인한 것이라 보고 있다. 로마서 1장 18절-32절은 이 같은 현상을 철저히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의 상태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더 이상 창조 때의 온전한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죄에 빠져 있음을 강조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지 않으면 도저히 구원에 이룰 수 없는 현실적인 비극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에는 유대인의 죄를 논하기에 앞서 이방 세계에 범람하는 다양한 죄와 그로 인한 타락상이 기술되어 있다. 즉 이 부분에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하여 충분히 계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경배의 대상을 우상으로 바꾼 종교적 사악함(18-32절)과 도덕적 방종으로 인한 성적 타락(24-27절) 그리고 완고함으로 저지르는 모든 죄악들(28-32절)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죄 가운데 거하는 인간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죄악된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즉 ‘유기’였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에서의 저주이며 형벌인 것이다. 로마서, 「그랜드 종합주석」(서울 : 제자원, 1999), p. 65.
우상숭배는 남녀간의 부정한 성 관계와 동성연애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사회 기강의 문란을 시사하는 각종 악행들-살인, 기만, 분쟁, 불효 등-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들이다.
2)가난
김종걸 교수는 ‘가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라는 논문에서 “19세기 이후의 자본주의 체제는 활발한 경제 활동을 가져 왔는데 이는 엄청난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사고는 성경적인 경제원리를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심각한 걸림돌이 되어왔다. 심지어 축복이란 것이 단순히 부유해 지는 것, 건강해 지는 것, 사업에 성공하는 것, 지위와 명예가 높아지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특히 전통적인 기복신앙에 젖어 있는 우리의 현실은 인간욕망 중심적인 본질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고, 교회도 사회처럼 세속적인 경제주의에 침식당하고 있다” 김종걸, “가난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 「실천하는 신학」, 6호 (1996), pp. 52-53.
고 지적한 것처럼 단순히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난은 저주라는 이원론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신약성경에는 물질적 부에 대한 부정적 측면이 자주 어급되어 있고 예수께서는 재산이자 소유, 곧 부 그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부가 가져올 수 있는 영적 위험성과 기만성에 대해서는 계속 경고하셨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6-21)와 부자 관원의 이야기(마19:16-30; 막10:17-31; 눅18:18-30)는 재물이 가져올 영적 위험성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하고 물질적으로 부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부의 소유가 이 세상의 어떤 것들을 추구하도록 유혹하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영적 위험성을 지닌다는 지적이다. Ibid p. 55.
이와 같이 인간의 타락이후의 가난과 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단순하지 만은 않은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타락이 없었다면 가난으로 고통받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요함을 누리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부요함은 이 땅에서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주님의 일에 힘써 참여함으로 재물을 하늘 곡간에 쌓아 두는 믿음을 소유함으로 천국에서도 부유케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루는 가난의 문제는 죄의 결과로서의 가난의 문제를 다룰 것이며, 그에 따른 그리스도의 부요케하시는 치유의 사역을 다루고자 한다.
구약에서 죄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가난이다. 신명기 15장4-5절에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에덴 동산의 땅이 최초의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었듯이, 팔레스타인 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해 주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그 누구도 궁핍한 삶을 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그 반대의 경우, 즉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죄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죄의 결과인 가난은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폐기를 뜻했다. 이 같은 일은 때로는 예언자 아모스가 경고한 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강대국의 억압과 약탈에 의해,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징벌로 간주되었던 기근을 통해 이루어지곤 했다. Gary S. Greig, op. cit., pp. 152-53.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시리라”(신28:23,24). 하나님은 “만일 네가 우상을 숭배하고 죄에 빠지게 되면, 너로 인하여 가뭄과 기근이 밀려오리라”고 말씀하시고, “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 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삼하21:1,3)고 기록하고 있다.
메릴린 히키에 의하면 “이러한 저주는 이유 없이 까닭 없이 임하지 않는다. 어슬렁거리다가 우연히 당신에게 저주가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저주는 항상 죄로 인해 임한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너는 이 땅을 깨끗케 하라고 말씀하신다. Marilyn Hickey,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최기운 역(서울 : 베다니출판사,1998), p. 108.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자연적인 재앙을 가장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엄청난 기근과 일련의 자연적인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재앙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지은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자기들이 행한 살인과 마술과 음행과 도둑질에 대해서도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음을 누누히 강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요한계시록 기자가 죄와 그 결과-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연적인 재앙-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음을 알 수 있다. Gary S. Greig, op. cit., p. 157.
신약에서의 가난은 인간의 궁핍한 상태가 죄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신약에는 하나님께 순종했을 경우의 풍요로운 삶에 대한 분명한 약속의 말씀이나 불순종했을 경우의 궁핍한 삶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하지만 신약에는 구약의 관점이 여러모로 반영되어 있는데 첫째, 야고보는 사람들의 궁핍한 상태를 부자들의 착취 행위와 관련시키고 있다(약5:1-6). 둘째, 신약에는 신구약 중간시기의 ‘청빈한 삶’에서 오는 경건성이라는 개념이 이곳 저곳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축복을 받고 부자들은 저주를 받고 있으며 (눅6:20, 24),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가난한 부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약1:9-11). 셋째,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풍요로운 곳-그 나라가 하늘에 있는 나라이건(눅 6:21; 계 7:16), 현세에 서의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의 표현이건(막10:29-30)-으로 묘사되고 있다. 죄가 없는 세상(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는 가난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Ibid., p. 158.
3) 질병
(1) 죄와 질병
죄로 인해 초래되는 또 하나의 결과는 질병이다. 병은 [히](choli) [그] novso"(nosos) [영] Disease, Sickness 생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정상을 벗어난다든가, 혹은 생명에 위험이 생기는 등의 상태에 있는 경우의 총칭을 말한다. 또한 병이란 일반적으로 건강상태로부터의 이탈이고 구체적으로는 특수한 증후, 증을 수반하는 생의 과정으로 평안함이 결여된 상태 또는 몸의 건강이 장애를 받고 있는 상태이다. 박대익, “목회적 관점에서의 치유와 하나님 나라 소고” (석사학위논문, 총회신학대학교대학원, 1994), p. 5.
트루나이젠( Eduard thruneysen)은 많은 질병의 뿌리가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데 있다고 보고 용서받지 못한 죄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영혼과 육체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으로 보았다. 즉 질병과 죄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영적인 삶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또 이러한 영혼의 질병은 다른 질병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죄를 영적인 목표를 잃어버린 상태로 이해 할 경우에는 질병과 영혼의 밀접한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서에 보면 많은 육체의 질병에 대한 치유가 죄의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53장에 보면 인간의 모든 병을 짊어지신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에게 하나님 자신이 죄를 부과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의 죄를 담당케 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박종배, “영적 치유를 위한 목회 상담에 관한 연구”(석사학위논문, 서울신학대학교대학원, 1994), p. 94.
물론 죄와 질병의 밀접한 관계성을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이 한사람의 자연인으로서 신 불신 사이에 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디모데는 위장병과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했다. 그밖에 신앙인들 가운데는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경우가 있다. 디모데전서 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라고 디모데에게 바울은 건강에 대하여 주의를 당부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부주의로 질병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인간의 상대성을 인정할 때 건강함과 병약함은 자연스러운 두 가능성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질병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전 우주를 하나님께서 섭리해 나가시듯 타락이후 생겨난 질병 또한 하나님께서 섭리하여 나가신다. 그 대표적 일례가 욥기에 보면 욥은 까닭 없이 질병으로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사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민수기 12장은 미리암이 하나님께 불순종 하다가 문둥병에 걸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으며,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가리키면서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는가를 질문할 때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라고 명백히 말씀하신다. 송태승, “치유목회의 신학적 이해에 관한 소고” (석사학위논문 : 장로교신학대학교대학원, 1993), p. 13.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질병 자체는 죄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들어온 것이고,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혼탁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질병에 노출되어 있어서, 한 개인의 직접적인 죄로 말미 암지 않았다 하더라도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그 전쟁은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았다 할 지라도 피해를 당하는 어떤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전쟁의 원인과는 상관없이 목숨을 잃거나 다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질병을 논할 때 사단과의 연관성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죄는 바로 마귀로 말미암았다. 죄에 순종한 인간은 바로 마귀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었는데 이 마귀는 인간을 병들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도널드 G. 블러쉬는 주장하기를 신약성경은 병의 근본 원인이 영원한 하나님의 대적 마귀에게 있다고 한다. 즉 질병과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마귀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치유를 어두운 세력에 대한 승리로 간주 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치유는 성령이 병자의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종합해보면 질병의 ‘유발자는 마귀이다’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되기까지는 질병의 가능성에 놓여 있다고 볼 수 가 있다. 성경에는 귀신이 직접 그에게 들어가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태복음 8:28-32에 보면 귀신들린 자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무덤 속에 거하면서 심히 사납고 비이성적인 상태로 괴로워하게 된다. Ibid., pp. 11-12.
따라서 질병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죄의 결과로서의 질병과 사단의 역사로서의 질병, 프란시스 맥너트는 영의 질병, 정신, 육체의 질병, 귀신에 의한 병과 사회적인 병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여러 요인에 의하여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가 있는데 이는 이러한 질병의 원인을 질병 자체가 죄로 인하여 인류에게 들어 왔고, 그 죄란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대가로 치루게 된 결과로 크게 볼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이 사는 세계는 저주 아래 있게 되고 서로 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화되고, 인간의 심성이 악해 지므로 말미암아 직, 간접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질병이라 볼 수 있다고 하겠다.
(2) 질병의 원인별 유형
게리 R 콜린스(Gery R. Collins)는 질병은 여러 가지 원인들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 병을 전염시키는 식물이나 동물과의 접촉, 영양이 적은 음식물, 운동이나 체력관리 소홀, 상처, 유전적 결함, 해로운 물질의 섭취, 신체기관의 노쇠와 약화, 매우 뜨겁거나 차가운 것과의 접촉 등으로 질병에 걸리게 된다고 하였다. 박종배, op. cit., p. 43.
질병의 원인에 대해 이명수 박사의 병인론에서는 유전적 요인과 정신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들의 복합적 현상이라고 하였다.
첫째, 유전적 요인으로 알콜중독이나 마약사용(예를 들면 니코친, 환각제, 피임약 등) 자궁내감염, 정신적 충격 등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한다. 둘째, 영양부족, 신진대사 및 내분비장애, 종양 등의 후천적, 물리적 요인을 들 수 있고 셋째, 걱정, 불안, 외로움, 슬픔, 죄책감 등의 후천적, 정신적 요인과 진리, 정의, 사랑 결핍 등으로 오는 사회 환경적요인으로 분리한다.
폴 튜니어(Paul Tournier)는 “질병이란 장차 다가올 죽음의 표시요 모든 질병은 그 안에 죽음의 싹을 내포하고 있다”고 봄으로서 철학적 종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삶의 자세, 그릇된 식이요법, 폭주, 과로 문란한 성생활, 도덕적 가책 등이 수년간 쌓여서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 활력을 상실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인간의 죄성과 타락이 그 원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건강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로 생의 양태라 보았다. 자신의 단점과 그를 지배하는 열정과 고충, 반항과 의혹 그 저변에 깔린 불안등으로 인하여 저항력이 약화되고 삶의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며 아울러 이 때 질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는 질병을 이해하길 질병 그 자체로만 보지 않고 인격과 삶을 연관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질병이란 의학적 치료만으로 완쾌될 수는 없으며 그 원인에서부터 치료를 해야 완치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질병관은 전인적 인간 이해에서 본 것으로, 즉 마음, 몸, 영혼의 연관 관계에서 그 상호 관계성이 파괴될 질병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Poul Tournier, 「성서와 의학」마경일 역(서울 : 전망사, 1979), p. 50.
트루나이젠(Thurneysen)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균형이 깨어질 때 불순종은 질병을 가져오게 되며, 반피득은 올바른 인간관계의 균형을 잃음으로써 마음의 평안이 깨어지고 질병이 일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구성요소의 평형이 파괴되어질 때, 혹은 가족이나 더 큰 공동체 안의 병든 관계에서 어쩔 수 없는 삶의 형태가 질병의 원인이 되어진다고 하였다.
위의 견해들을 간추려 보면 질병은 크게 세 가지의 유형으로 볼 수 있다.
① 육체적인 요인에 의한 질병
만물의 메카니즘(mechanism)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탁월성과 전능성을 보여 주는 바 너무나 체계적이며 정교하게 잘 짜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특별 사역인 인체도 대단히 과학적이고 조직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의 수작인 인간은 하나님과 자연법칙과 생리작용에 동시에 유기체적으로 지배받는 사뭇 그 복잡성에 있어 경이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있었으나 자연과의 관계 혹은 생리작용에 있어서 그 관계성이 너무나 부수어지기 쉬운 연약성을 동시에 수반하고 있다. 우리의 인격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게 되면 결국 육신 속에 내재된 자연법칙도 허물어져 그 결과 질병이 발병되어 육체가 파괴되는 결과가 오고야만다. 다시 언급하면 우리 인체 내에 내재된 법칙이 파괴되면 면역기능이 장애가 오게되어 많은 병균에 노출되고 침투한 바이러스 등으로 인하여 병이 발병하게 되는 것이다. 과로 또한 육체적 피로를 야기하며 이 피로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박대익, op. cit., pp. 7-8.
② 심리적 요인에 의한 질병
현대 병리학자들의 대부분은 말하기를 질병의 요인중 80% 이상이 심인성 질환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앓고 있는 질병의 거의 대부분은 심리적 요인과 매우 밀접한 상관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쁜 감정들 즉 공포와 염려, 질투, 시기심, 좌절, 분노, 수치, 후회, 충격, 혼란 등등의 요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트레스를 일으키며 이 스트레스의 증가는 신체의 각 신경계통에 악 영향을 끼쳐 그 신경 세포와 맞물려 있는 조직 세포에도 나쁜 영향을 주어 세포 조직이 파괴, 부패, 통제 불능의 이상증식 현상이 피부병, 소화기 계통의 병, 비뇨기 계통의 질병 그리고 갖가지 암 등으로의 변화로 결국 병적 증세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대의 생리학자, 의학자, 심리학자들은 정신과 육체가 상호 통전적으로 작용(Whole interaction) 하는 심신 통일체(Psychosomatic disorder or Psychosomatics)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심인성질환은 증상적 치료와 원인적 치료를 동시에 해야 치료가 가능하며 설사 치료가 되었다 해도 심리적 요인의 악화로 인해 재발의 반복이 계속되어 완치가 어려운 것이다. 현대의 복잡한 생활 패턴은 사람들에게 갖가지 심리적 불안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날로 이러한 심인성 질환의 발병을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Ibid., p. 8.
③ 영적 요인에 의한 질병
스테판 힐(Stephen Hill)은 죄로 말미암아 발병을 설명하길 “불순종은 질병을 가져오고, 순종은 치유를 발생시킨다”고 하였다. 성경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과정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신 것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파기하고 사단의 유혹에 빠져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의 발아래 복종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그 결과 인간의 완전타락과 그 죄책의 영향력은 전 인류에게 영구히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질병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인간 회복을 선포하셨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발병되는 열 다섯 가지의 병을 나열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결국 사탄을 따르는 것이므로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 이상 궁극적으로 죄는 질병에로 이르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치유시켜 주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 형식으로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는 죄의 차단 즉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과 놓임을 의미함으로 결국 질병의 원인이 소멸하게 됨으로 치유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Ibid., p. 9.
(3) 질병의 성경적 이해
성경적 관점에서 질병 문제를 다룰 때는 죄와의 관계성을 검토하여야만 한다. 고대 그리이스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혼돈이 신체적 혼돈의 근원이었지만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신체적 질병의 근본 원인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원인에 있다고 보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질병은 죄의 결과요,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생각하였다.
구약 성경을 보면 죄와 질병의 관계가 밀접함을 볼 수가 있는데, 욥기 4:7에 “죄 없이 망한 자가누구인가?”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히브리인들의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송태승, op. cit., p. 9.
성서시대에는 병은 개인 또는 부모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로 일어나는 것(출 9:8 이하, 민 11:33, 12:9-11, 신 28:21 이하, 60이하, 삼하21:1, 24:15, 왕하 5:27), 혹은 사단의 유혹에 의해 생겨나는 것(눅 13:16), 그러나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병이 있는 것도 인정하고 있었다(욥 3-42장, 요 9:1-3). 이러한 병의 치료에는 죄에 관련하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제사장에 의해 희생제사의 중개가 행해졌다(왕상13:4-6, 왕하 20:5).
출애굽기 15장 26절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신명기 7장 12절은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을 베푸실 것이라” 말씀 하시고 15,16절에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에 반하여 신명기 28장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몸이 염병이 들게하사...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신28:15,21,22). 죄과로서의 질병은 출애굽 이야기 전편을 통해 면면히 흘러내리고 있다. 예를 들어, 모세를 비난했던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고(민12:10),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 와서 그 고장을 악평했던 사람들은 염병으로 죽었으며(민14:37), 바알브올에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 24,000명 역시 염병으로 죽었다(민25:9). 우리는 이와 같은 종류의 사례들을 구약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웃시야 왕은 제 힘만 믿고 교만해진 나머지 성전에서 분향하려고 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여생을 보내야만 했다(왕하15:5: 대하26:16-20).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죄와 질병 또는 죽음이 밀접히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왕상17:18).
이상의 사례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병이 사람들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었다. 아마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질병일 것이다.
신약은 질병 역시 죄의 결과로 보고 있다. 로마서 5:12절에 의하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죄를 통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지만, 개별적인 상황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 될 수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해 주시고 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고 말씀 하셨다. 전체 문맥상,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심한 것”이란 바로 질병을 가리켰을 것이다.
마가복음 2장 1-12절에 기록되어 있는 중풍병자의 경우에는 죄와 질병 사이의 관계가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예수께서 그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여 주신 까닭은, 그 사람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병이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야고보서 5장16절에는 “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함으로 병과 질병을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신약은 여러 곳에서 죄와 특정 질병을 관련시켜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1장 27-30절에서 바울은 ‘주의 만찬’을 경건하게 거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몸이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도 적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헤롯 아그립바1세(행12:23)와 박수 엘루마가(행13:8-12) 병에 걸리게 된 것이,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오직 죄만이 질병의 원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약은 이 같은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자들에게서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관한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4)귀신들림
구약이 제시하는 죄의 열매중 하나는 귀신들림이다. 구약에서는 귀신들림에 대한 자료가 그리 흔치 않은데 사울의 경우는 하나의 분명한 귀신들림의 사례가 된다. 사울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까닭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었다는 데 대하여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 이후로는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하였다. 비록 그 인과관계가 뚜렸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나고 악령이 그에게 내리게 된 것은, 그가 범한 불순종의 죄과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구약의 말씀 중 신접한 자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19:31).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20:6).
신접한 자들이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귀신의 힘을 빌어 사는 사람을 말하는데 사람들의 약점,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인 과거를 알고 미혹하고 속이는 일을 한다. 하나님은 이들 신접한 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그 백성 중에서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귀신의 가르침을 쫓는 죄의 결과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귀신들림의 현상은 신약에 비해 미미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디카슨(C. Fred Dickason)은 구약성경에서 나타난 사단은 첫 번째 살인을 배후에서 조종한 살인 교사자로(창4:1-6), 거짓말하는 영으로(왕상22:20-22),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 자(창6:1-10)등의 악한 존재로 설명했다.
신약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죄의 결과는 귀신들림이다. 구약성서와는 달리 신약성서에는 ‘귀신’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었다. 많은 종류의 귀신들이 다양한 세력, 습관, 형태, 역할에 따라 기록되어져 있다. 디카슨의 설명에 의하면 신약성서 안에는 100회 이사의 귀신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4가지의 단어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마태복음 8:31에 사용된(daimon)으로 ‘귀신들’로 번역되었고, 둘째는 (daimonion)으로서 단순히 귀신으로 통칭되었는데 63회가 사용되었고, 셋째는 일반적인 ‘영’으로 기록된(pneuma)로서 43회가 사용되었고, 마지막으로 (angelos)인데 대체적으로 천사의 뜻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문맥에 의해 귀신을 언급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마25:41, 계12:7,9) 복음서이외의 바울서신에도 복음서에 기록되어진 단어는 아니지만 귀신의 의미로 사용되어진 많은 어휘들이 발견되는 데 이 단어들은 바울이 인간을 사로잡아 병들게 하는 귀신들의 의미보다는 악한 우주적 세력으로서 귀신들을 강조하고 있다. 이 악한 귀신들의 용어는 다음과 같다. 권세자들(eksusia) 로마서8:31, 관원들(arkai)(고전2:8), 보좌들(thronoi)(골1:16), 주관하는자(kuriotetis)(엡1:21)등이다. 기독교대백과사전편찬위원회편, 「기독교대백과사전」, 제2권(서울 : 기독교문사, 1981), p. 524.
어원적 근거와 더불어 신약성서내에서 귀신들의 존재에 관한 근거를 제시하는 백미는 예수의 직접적 치유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윔버와 스프링거(Wimber and Springer)는 이와 같은 논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예수의 생애와 사역은 귀신들과의 끊임없는 대결이었다고 전제하면서 예수의 치유사역이 축사 사역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John Wimber 외,「능력치유」, 이재범 역(서울 : 나단출판사, 1991), p. 177.
디카슨도 동조한다. 예수의 사역 가운데에서 귀신을 쫓는 사역은 공관복음서 내에서 만도 9회에 걸쳐 기록되었음을 이론 지지의 근거로 제시했다. 이강덕, op. cit., p. 17.
복음서 이외의 신약성서내에서도 귀신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타당성들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귀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에 대한 가르침이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윔버와 스프링거는 이와 같은 성경적 근거를 여러 곳에서 들고 있다. John Wimber, op. cit., p. 177.
신약은 비록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귀신들리게 되는지에 관해 폭넓은 논의를 전개하고 있지는 않으나, 신약 기자들에게는 어떤 삶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귀신들림과 죄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례들을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누가복음22장 3절에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건과 사도행전5:1-3절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의 귀신들림의 결과는 죄로 말미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5장 4-5절과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는 교회가 죄를 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손에 내어주어 주님의 날에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베드로전서 5장8절에는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자를 찾는다고 묘사하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라고 기록한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실족할 경우에는 마귀의 올무에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신약은 귀신들림이 죄의 결과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둘 사이의 관련성을 도처에서 암시하고 있다. 귀신들림과 죄의 관련성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귀신들림의 현상을 볼 때 귀신은 여러 가지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첫째는 귀신은 인격적인 면 즉 지식, 감정, 말, 의지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요소는 인간이 소유한 인격이나, 하나님을 인격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말하는 인격이 아니라 귓들 스스로가 생명과 목적의식을 가지고 의사 소통하는 존재의 특성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다고 그린은 설명한다.
둘째는, 귀신의 역할로서 인간에게 질병을 초래하도록 하는 존재다. 마가복음9장에 나오는 벙어리 귀신들린 소년은 귀신으로 인해 청각장애가 있었고, 간질(마17:14-18), 정신질환(눅8:27-39), 등이 굽어진 여인(눅13:10-13)등의 예들이 귀신들로 말미암아 질병이 인간에게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는, 귀신은 앞에서 사단의 명칭에서 나타나는 특성에서 살펴보았지만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어떠한 것도 행하는 존재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숙히 파고들어 그 마음으로 범죄케 하고, 환경적으로 어려움을 주기도 하며, 사람을 미혹해서 죄 가운데 빠지게 하는 등의 일들을 하고 있는 역동적인 존재이다.
(1) 귀신들림의 정의
프레드 디카슨은 ‘귀신들림’이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악령이나 귀신이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희생자를 자기 마음대로 완전히 지배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디카슨의 이러한 주장은 신약성경에서 귀신들림으로 사용되어진 용어에 근거한다. 헬라어(daimonizomai)는 대체적으로 ‘어떤 귀신에게 사로잡혔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귀신들렸다’의 표현으로 사용되어진(daimonizomenos)는 신약성경에서 12회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 계속하여 거주하는 상태를 가르킨다. 그 증거로 디카슨은 이 헬라어 단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는 데 우선 이 단어는 어근 daimon과 사역동사 lz 그리고 수동태 어미 omenos로 구성되어 있는 데 곧 어떤 사람이 귀신에게 수동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라는 결론을 내렸다. 디카슨은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귀신들린 사람은 귀신의 지배를 받으며 귀신의 행동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강덕, op. cit., p. 29.
디카슨의 이러한 주장은 다분히 귀신들린 자의 상태를 지적하기 위한 접근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귀신은 귀신들린자를 조정하여 그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조종과 지배를 받는 수동적 대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귀신이 그 사람의 전체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 주장이라는 말이다. 이 논리는 결국 사람이 귀신들린 다는 것은 귀신소유라는 의미보다는 귀신들림의 의미가 더욱 설득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Ibid., p. 30.
맥너트도 사람의 귀신들렸다 하는 개념의 이해는 사람들의 인격이 외부의 악한 세력에 의해 억눌리고 부분의 통제는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완전한 사로잡힘이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같은 입장은 디카슨도 동조하는데 ‘귀신들림’ (Demonization)을 ‘귀신이 소유하는’ (Demon possession)으로 해석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귀신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귀신은 무단 침입자로서의 인상이 강하지 소유자가 될 수 없다. 우리들의 소유자는 하나님 뿐이시다고 주장한다. 풀러 신학교에서 인류학을 강의하는 크레프트(Chares H. kraft)도 최근 자신의 저서에서 “귀신들림이란 사람 속에 귀신이 거주한다는 말로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귀신이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만 결코 귀신들린자를 완전히 조정하지는 못한다.” 고 하였다. Ibid., p. 31.
위의 주장들을 볼 때 귀신들림이란 귀신이 인간의 몸에 거주하는 상태로서 귀신들린 자는 귀신에게 다소 차이는 있지만 부분적으로 귀신의 지배를 받고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때 귀신의 역할은 무단 침입자로서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컨서버티브 침례신학대학의 심리학과장이면서 교수인 로저 버포드(Rodger K. Bufford)박사는 귀신을 ‘공중권세 잡은 자’ ‘이 세상의 지배자’인 사단의 사자라고 정의하면서 사단과 귀신의 관계성을 제기하였다. 버포드의 이론에 동의하든지 그렇치 않든지간에 귀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사단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그렇게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그렇게 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사단을 떠나서는 귀신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Ibid., p. 9.
(2) 사단의 명칭과 본질
F.C. 제닝스(F. C. Jenning)는 “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구절에서 인간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반대하는 존재를 우리는 사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많은 주석자들은 ‘구약성경에서의 사단은 악이 발견되는 곳마다 발견되어지고 있으며, 죄에 대한 그의 변명은 눈에 보이는 죄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사단의 존재는 완전하고 실제적인 성격만이 폭로되었을 뿐이며, 사단의 진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왔을 때 그를 유혹하는 존재로 모습을 드러냄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악마 (Devil)라고 불리워졌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이 주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때때로 이름은 아이에 대한 부모의 신념의 표현이기도 하였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향하는 계시의 한 방법으로 그의 이름을 사용하셨다. 사단에 대한 것은 최소한 30여 개의 서로 다른 이름들이 사단의 윤곽과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사단의 이름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 사단(satan): 사단이란 히브리어로써 구약에서는 satan으로(욥1:6-7;슥3:1-2) 24회 나타난다. 신약에서는 satans로 34회 나타난다. 그 뜻은 도전, 반항, 혁명, 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적으로 표현되며, 사람에게 시험을 주고 죄를 짓게하는 자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그는 한결같이 사악하며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적대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을 주요 행동으로 삼고 있는 존재로 간주되어진다.
② 마귀(Devil) : 이 말의 헬라어는 디아볼로스(Diabolos)로써 구약에는 신명기 32장 17절에 한번만 나오고 신약에는 35회 나온다. 그 뜻은 중상자, 모략자, 이간자, 고소자(참소자), 훼방자라는 뜻이다. 마귀는 에수를 광야에서 시험했고,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함을 비방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을 품도록 하와를 유혹했고, 욥을 시험하는 장면으로 나타난다.
③ 바알세붑(Beelzebub) : 땅의 주인, 귀신의왕이란 뜻으로 쓰였으며, 구약성경에서 바알세붑은 팔레스타인의 에그론의 신으로 나타난다. 이 신은 왕 아하시야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움을 구하는 신이다. (왕하1:2-16)신약에서는 바알세붑으로 나타나는데, 그는 “귀신의 왕”(마12:24)으로 묘사되었다. 그 이름은 파리들의 왕을 의미하며 ‘타락을 관장하는 악귀’라고 불리는데에서 기인한 개념이며, 사단의 주요 행동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형태를 아주 쉬운 방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④ 뱀(Serpent) : 요한 계시록 12장 9절에는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라는 표현이 있다. 이사야는 그를 “날랜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 (사27:1)이라고 불렀고, 예수님 자신은 뱀을 거짓과 위선의 상징으로 불렀다.(마23:33)
⑤ 우는 사자(Roaring lion) : 베드로는 우리에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 5:8)라고 경고하고 있다.
⑥ 거짓말장이(liar) : 예수님은 “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8:44)라고 말씀하셨다.
⑦ 시험하는 자(Tempter) : 여기서 ‘시험하다’라는 뜻은 ‘악을 자극하는’ (inciting to evil)의 시험을 뜻한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하였을 때와 바울의 편지(살전3:5)에 표현되어 있다.
⑧ 용(Dragon) : 용은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존재인데 잔인하고 무서운 악의에 찬 동물이었다. 성경에서의 용은 교회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존재로서 (계12:4), 그리고 ‘마귀와 사단’과 동일시되는 존재(계 12:9)로 표현되었다.
⑨ 이 세상의 임금, 신 : 요한복음 14:30에서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 4:4)
⑩ 공중 권세잡은 자 :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엡 2:2)
⑪ 귀신(Demon) : 이 말의 헬라어는 다이모니온(Daimonion)으로써 구약에는 언급한 바 없다 다만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 혹은 악령이라는 말이 나오는 적은 있다. (삼상16:14). 신약에는 이 말이 572번 나온다. 더러운 영으로 90번 언급된다고 하였으며 귀신으로는 마태 2회, 마가복음에 11회, 누가복음에 6회로 사용되었다 한다. “귀신,” 「기독교 대백과 사전」, 2권.
그 밖에도 사단을 지칭하는 명칭은 벨리알, 원수, 대적자, 거짓선지자의 영, 고소자, 미혹의영등 다양하게 사단의 명칭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명칭들의 본질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 사단은 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대적하는 일들을 한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를 중상하고 모략하며 사람으로 범죄케하며,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일을 한다. 셋째, 시험하는자, 곧 유혹하는자이다. 그는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자에 대한 놀라운 지위와 힘을 가졌으며 그것으로 인간을 병들게 한다.
(3) 귀신들의 활동에 대한 개괄
사단과 귀신들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는가? 먼저 사단과 그 활동을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6장 12절 이하에서 마귀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김택수, “사단, 귀신의 기원과 그 활동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 수도침례신학교 신학대학원, 1998), p. 37.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여기서 ‘정사와 권세’ 는 천사들의 이름으로서 선한 천사뿐 아니라 타락한 천사, 즉 악의 영들에 대하여도 불려지는 칭호인데, 여기서는 악의 영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엡3:10; 골2:15) 에베소서「그랜드 종합주석」(서울 : 제자원, 1999), p. 223.
그 하는 역할은 무신론 주의, 우상정치등을 세상권세나 교권주의를 이용하여 활동하며,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역시 마귀들로서 요12:31; 14:30; 고후4:4에서는 ‘세상 전체의 주관자’, ‘세상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표현되어 있고, 여기서는 각종 우상 및 이교행위를 하게하고 거짓선지자나 무당등을 통해 현혹케하는 역할을 한다. ‘하늘의 악한영들’은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삼층천의 개념에서의 2층, 곧 마귀들의 주거지인 공중을 가리키는데 이 악한 영들은 더러운 영, 귀신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병과 가난, 정신이상 등의 영향을 미치며, 미혹의 영으로 죄를 짓게 유혹하는 역할을 한다. 강신오, 「마귀론」(서울 : 에벨, 1971), p. 3.
보수파 장로교의 저명한 교수이며 학자로서 신학사전을 출간한 오병세 박사는 그의 사전에서 사단과 귀신들의 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을 하였다. 오병세, 「신학사전」(서울 :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8), pp. 242-43.
① 암흑세상 통치 : 사단의 세상통치는 거짓과 사악한 불의와 공포와 죄악, 죽음으로서 다스린다. 세상통치자들과 세속적 세력들과 사회구조와 풍속과 관행을 통솔하고 인간의 욕심주장, 감정, 이성 등을 주장한다.
② 사단과 미혹의 영들이 복음을 가로막고 완고해 지도록 하며(롬12: 7, 딤전4:1), 복음의 씨를 빼앗으며(마13:19), 신자들을 타락케 하며(고전2:10), 악의 씨를 뿌려 진리를 믿지 않고(마13:24), 거짓 것을 믿게 하여 우상숭배를 하게 한다.(행13:10, 롬 1:18,25) 하나님을 유형화하게 하고, 인간을 신격화하고, 피조물을 신격화하고, 사신들을 숭배케 하고, 천사들을 숭배케 하고, 다른 종교를 만들어 믿게 하고, 점신술, 광신들, 무당, 광신주의 굿을 행케 하는 미신, 전이현상, 유령현상, 심령현상을 일으키고, 사교운동을 일으키고 거짓기독교, 적 그리스도 거짓적 기사 등을 일으킨다.
③ 교회 안에 사단의 회를 조직하고 사술과 요술과 마술로 현혹케 하고, 복술로서 운명을 믿게하고, 세상의 여러 가지 사조와 사상, 주의 주장을 만들어 믿게 하고 형식과 의식을 존중케 한다.
④ 사람을 유혹하여 범죄케 하는 일 : 사단은 하와를 유혹하여 범죄케 하였고(창3장), 예수님도 유혹하였으며(마4:1,11), 택한자도 시험하고(벧전5:8;고후2:11), 불신자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케 하여 더욱 법죄케 하고(딤전3:1, 요4:6, 고전5:5), 사단은 사람을 유혹할 때 간접적인 방법과 유도적인 방법과 육적 방법을 가지고 시험한다.
⑤ 사람을 괴롭히는 일 : 사단은 성도의 약점을 폭로시키며, 누설하고 선전하고 하나님께 직접고발한다.(계12:9) 그리고 양심을 괴롭히고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고민, 근심, 걱정, 번뇌, 낙심, 절망, 불신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킨다. 열병(눅4:39), 소경, 벙어리(막12:22), 간질병(막9:18), 광증(막1:23), 귀신이 직접 사람 속에 들어가서 미치게 하여 괴롭히고 악귀들은 인간의 삶의 비극적 의식을 객관화하고 확대시키므로 괴롭히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켜 괴롭힌다.
(4) 구약성서에 나타난 사단의 활동
구약시대에 나타난 사단과 귀신의 활동은 구약성서를 보아야 하지만 오히려 요한 계시록에 더욱 구체적으로 구약의 역사 속에 사단과 귀신들이 어떻게 활동하였나를 자세히 말해준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단과 그 사자들의 활동에 대하여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항상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있음을 알고 연구하며 공부해야 한다.
계시록 12장을 열쇠로 하여 구약 성경에 나타난 사단의 활동을 보면, 용이 해산하려는 여인 앞에 서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데 이는 사단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파괴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헨드릭슨은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전체의 활동적 사실은 여인의 씨와 용과의 사이에 투쟁하여 그리스도와 사단사이의 싸움이 되는 것이라 하고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사단의 활동적 사실을 관찰하였다. 김택수, op. cit., p. 44.
① 그에 대한 약속은 창세기 3:15절에 나타나 있는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계시록 12장은 분명히 위의 구절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동일한 성격이 창세기와 계시록의 양쪽에서 나타난다. 창세기 3장의 뱀은 계시록, 12장의 용 이다. 창세기 3장의 여인의 씨는 계시록 12장의 아들이다. 계시록 3장15절에 표현된 여인의 후손은 그리스도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 이미 투쟁이 나타난다.
② 셋에서부터 홍수 때까지 :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자녀가 점점 불기 시작하여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나서 셋의 가계에서 언약의 씨인 메시야가 탄생될 것을 예정된 것을 사단이 알았겠는가? 마귀가 셋을 무너뜨리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마귀는 셋이 아들들에게 가인의 딸들과 결혼하라고 속삭인다. 이는 셋의 가계를 파괴함으로써 메시야에 관한 약속을 멸절시키려는 시도이다. 용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였겠는가? 물론 그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창세기 6장 12절을 보면 사단이 승리한다. 그러나,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셋이 후손 중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한 가정 즉 노아의 가정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홍수로 멸하실 때 구원한 한 가정이다. 이 가정에 의해 약속은 지속되었다. Ibid., pp. 44-45.
③ 홍수때부터 야곱까지 : 다시금 용은 어린아이를 죽이기 위해 여인 앞에 선다. 오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이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에게 주어진다. 인간의 판단으로는 약속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아브라함은 늙었고 사라는 임신하지 못할 상태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고 이삭이 잉태될 무렵은 사단이 거의 승리하였을 때였다. 약속은 이제 이삭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돌연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받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더니 자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는 정말 용이 승리할 것 같으나 우리는 그 결과를 안다.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즉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태어날 것을 보장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타나신다. 구약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그 자신의 탄생을 위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였다. 주의 천사가 즉 그리스도가 스스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는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뱀의 머리를 쳐서 진멸할 씨는 이삭과 리브가의 계통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리브가는 잉태하지 못한다(창25:21) 다시금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어 리브가가 잉태하게 되었고 이리하여 야곱의 혈통으로 약속이 계속되었다. 그런, 어떤 일이 생겼는가,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주려던 축복을 빼앗아 받는다. 야곱은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몇해 후 고향에 돌아온 야곱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에서는 야곱을 죽이지 않았다. 여인의 아들에 대한 약속은 다시 한 번 무사하게 되었다. Ibid., p. 45.
④ 야곱으로부터 광야의 유대민족까지 : 다시 용은 여인 앞에 선다. 용은 야곱의 후손인 유대민족을 공격한다. 여호와께서 자비와 긍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셨으니 이들이 여호와를 배반하고 금 우상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말로 마귀가 꼭 목적을 달성한 것처럼 보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노를 발하여 진멸하리라. 용이 실제로 승리할 것인가? 그가 분명히 모세와 같은 중재자가 없었다면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재자가 있었다. 모세가 위하여 기도하였고 약속은 다시 보존되었다. 그러나 더욱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보다 약한 중보자인 모세의 심령 속에 중재의 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명심하자.
⑤ 광야의 유대민족에서 다윗 왕까지 : 활동은 다시 전진한다. 유다지파에서 한 가정을 파나님께서 택하셨는데 곧 다윗의 가정이다. 약속된 몌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이다. (상2:12;시88:28-35:레23:5:행2:30) 그래서 마귀는 다윗에게 화살을 겨눈다. 다윗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 우리는 사울이 단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음을 읽을 수 있다. 사울이 이렇게 한 것은 악령이 그에게 크게 임하였기 때문이다. (삼상19:9) 다윗은 사울의 면전에서 두 차례나 피하였던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관한 언약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위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이다.
⑥ 다윗으로부터 아달랴 여왕까지 : 아달랴는 사악한 부모 아합과 이세벨의 사악한 딸인데 유다를 통치할 때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모든 다윗의 후손을 진멸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계획으로 또 다시 인간의 몸으로 오실 중보자가 위협을 받게 된다. 여인 앞에 선 용이 아이에게 진노를 발한다. 성서에는 아하시아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니 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왕의 모든 후손이 진멸을 당했다면 그리스도께서 합법적인 다윗의 후사로서 탄생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고 약속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보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왕11:1-2)고 기록하였다.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우니 그 섭리는 얼마나 오묘하신가? 후에 요아스는 왕이 되었으니 하나님의 약속은 다시금 보존되었고 용은 또 다시 실패하였다.
⑦ 아달랴로부터 아하스왕까지 : 이스라엘과 수리아의 연합군이 유대를 치려고 모였다. 그들의 목적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과 소망에 관련된 다윗의 가정을 멸하고 유대인중에 다부엘의 아들이 이방인 왕을 세우고저 하였다. 활동상 심각한 위기의 순간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로 유대의 왕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권고하여 이 그것을 삼가고 종용하도록 하였다. 선지자가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스왕은 여호와의 도움의 약속의 표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수리아와 이스라엘의 군대 그리고 아하스와 자신의 불의가 다윗의 가정을 대항하려고 모였기 때문이다. 사단은 기뻐서 웃는다. 그러나, 성서는 그런고로 주께서 친히 표적을 주시리니 볼지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하나님의 약속은 마땅히 고수되어야 한다. Ibid., p. 47.
⑧ 아하스왕으로부터 에스더까지 : 주전 5세기경 아하수에로왕이 통치할 때 일이다. 하만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가 통치하고 있던 광대한 왕궁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고 조서를 내렸다(에3:15) 이 조서는 왕의 반지로 인 쳤다 그러나, 마땅히 다윗의 후사로 탄생되어야 하는 중보자에 대한 여호와의 약속은 왕중왕의 서약으로 인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또 다시 유대인은 구원을 받았다.
⑨ 에스더로부터 베들레헴까지 : 이 장엄한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펼쳐진다. 장소는 베들레헴이다. 말구유 속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있다. 이제야 말로 메시야 자신이 실제로 탄생하였는데 마귀는 그를 살해하려 한다. 실상 계시록 12장은 사단과 그리스도의 과거에도 가졌던 싸움에 대하여는 짧막하게 언급했지만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발생한 일데 대해서는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라고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헤롯왕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헤롯으로부터 ‘어린아이를 나으면 꼭 내게 말해 주시오. 나도 가서 그를 경배하겠소’라는 부탁을 듣는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좇아 아기 그리스도를 경배한 후에 딴 길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용도 그리스도에 대한 패배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베들레헴과 그 인근에 사는 두 살 미만의 아이들은 일제히 살해당한다. 그러나, 헤롯은 실패하였다. 용도 역시 그러하다. 아기 예수는 무사히 애굽에 피하여 자라고 있었다. (마12:13)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심은 용을 물리치신 하나님의 승리이다. 십자가상에서 그의 백성을 위한 죽으심은 그 위에 더한 승리이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려 가더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승천과 보좌에 앉으심을 말한다.(계15:7;빌2:9) 그를 대적하는 모든 것들은 철장으로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 이는 전 세대를 통하여 사실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으려던 용, 어린 그리스도를 살해하려던 용, 이 용 마귀는 그의 활동에 대 참패를 당한 것으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것으로 용의 활동은 끝마쳐진다. Ibid., pp. 47-48.
(5) 신약성서와 종말기에 나타난 사단의 역사
이제 사단이 신약시대와 그 이후 종말기에는 어떻게 활동을 하는가를 알아보자. 먼저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지상에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단은 어떻게 공격했던가 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Ibid., p. 48.
ⓛ 베들레헴의 탄생과 천군 천사의 출현
눅2장에는 그리스도의 탄생시 천군 천사가 출현하였다. 천군은 수호와 전투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왜 출현하였는가? 물론 그리스도의 탄생을 천사들과 함께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붉은 용과 그의 사자들의 총공격을 막기 위하여 미가엘과 천군단이 출현하였다. (계12:4-7) 그리스도가 탄생하면 삼키려고 붉은 용 곧 사단과 그의 사자들의 총 공세가 시도되고 있었다. 이에 하나님의 천군단이 출현하여 베들레헴의 영계를 수호하였던 것이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사단은 살인자라 하였으니 이 살인마의 활동을 천군단이 나타나 막아 준 것이다.
② 어린 그리스도를 살해하여는 사단의 시도
영계에서 실패한 사단은 헤롯왕을 움직여 어린 예수를 살해하려 했으나 요셉의 꿈속에 천사를 출현시켜 역시 아기예수의 생명을 보전케 한다. 당시 아기예수는 메시아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이므로 이때에 살해당하면 만민구속의 메시야 예언의 성취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의 생명은 보호되어야 하며 그가 만민의 대속물로 바쳐지기 위하여 때가 될 때까지 양육되어져야 한다.
③ 광야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사단의 유혹
예수 그리스도의 30세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 위에 임한다. 그리고 “이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음성이 들린다. 이는 시편2편 5절-12절의 예언한 바대로 만왕의 왕되심을 선포하는 것이요, 구속의 공생애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즉, 만민의 대속자로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한다. 이제 사단의 그리스도에 대한 도전은 살해가 아니라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타락시킴에 있다. 그는 광야에 나타났다. 광야의 예수 앞에 나타난 유혹자는 자신이 직접 나타났다. 다른 때는 피조물을 이용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이 싸움을 걸지 않으면 안되었다. Dietrich Bonhoetter, 「유혹」, 선유현 역(서울 : 백합, 1969), p. 15.
나타나 유혹자는 결코 메시야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십일을 금식하시사 주림과 죽음의 공포가 닥친 그리스도께 떡을 만들어먹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권한다. 그리스도의 인기와 명예를 얻는 방안을 주선하며 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결코 그리스도를 죽게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도록 유혹하는데 있다.
④ 베드로를 통한 사단의 역사
마태복음 16장21-23절 사이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예고를 듣고 결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발언하였다. 이때, 그리스도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도다”하였으니 여기에서는 다시 사단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민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바쳐야 된다는 사실을 거듭 거듭 예고하고 있다. (마16:21-23, 마17:22-23, 마20:17-19)
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사단의 도전
이제 사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막으로는 최후의 도전을 해온다. 그리스도의 감정을 예민하게 하고 놀라게 하며 고민하게 하였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중압감을 통한 사단의 도전이요 유혹이다. 그리스도는 기도한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14:33-36) 이제 그리스도에게 만민의 구속자로서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피하고자 하는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와 타락에 이르지를 않는다. 생각과 느낌과 육체의 소원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더 큰 생각과 뜻 앞에 자신을 굴복시킨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 이제 그리스도는 살 것을 원하지 않고 죽을 것을 원하시므로 만민을 구속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완성의 길을 가신다. 이와 같이 사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원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육신을 죽지 않게 하므로 구약의 예언과 율법을 거스리도록 유혹하려고 발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죽으셨다. (빌2: 9-11)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사단의 대 참패요, 추방이며 심판이다.(골2:14-16) 김택수,「왜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까?」(서울 : 로뎀, 1991), p. 56.
(6)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한 사단의 공격
이제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승리하였고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세상의 통치권은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졌고 사단은 최후의 형벌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사단은 아직 세상에 신으로 존재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사단에 대하여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고 속이므로 그의 사역을 계속 진행하려 한다.
사단은 성도들로 하여금 모이기를 폐하게 하거나(히10:24), 아나니아 부부처럼 설령을 속이는 예배를 드리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기도 한다. (행5:1-7) 교인들의 마음을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으로 이끌어 가기도 한다.(고후11:4-14) 이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며 그리스도에게서 마음을 떠나게 하는 사단의 전략이다. (고후11:1-3) 사도행전을 보면 전도하는 스데반집사를 돌로 때려죽인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를 박해한다. (행8:1-4)헤롯왕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다시 베드로를 죽이려 한다.(행12:1-13) 네로 황제는 바울 사도를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딤후4:6) 이 같은 행위는 전도를 방해하려는 사단의 또 다른 도전인 것이다. 고린도교회 안에는 교인간의 분쟁과 음행, 소송문제와 술취함, 우상숭배 등 각종 부도덕함이 판을 치고 있었는데 이는 사단이 고린도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본받아 성장하려는 제자훈련의 열망을 막고 있기 때문이며(고전11:1) 사단은 한걸음 더 나아가 교인들로 하여금 피차가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죽어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여야 함을 망각하게 했다. 여기에다 사단은 더 한층 발악을 하여 초대교회들로 하여금 처음 사랑을 잃어 세상을 향하여 빛을 발하는 금촛대의 사명을 상실하게 하였고(계2:1-7)진리를 버리고(계2:11-13), 이교의 이세벨을 용납하는가 하면(계2:14-18),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 죽은 교회로 전락을 하였고(계3:1-7), 나아가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가나하며 벌거벗었고 눈이 멀었고 곤고 속에서 세인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있었다. (계3:14-20) 이와 같이 사단은 초대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공격하듯이 지금도 거세게 교회를 향하여 대항하고 있다.
Ⅲ. 십자가를 통한 치유
1. 죄인의 구원
하나님은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죄인을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핵심이라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온 인류에게 새 시대가 전개되었는데, 이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요, 새 생명을 부여받은 축복의 날이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 정말 놀랍고 광범위하여 측량하기 힘들다. 그것은 앞에서 다룬 죄와 그에 따른 죄과로 인간에게 미친 저주들 즉 사망과 질병, 마귀의 종노롯, 가난등에서 완전히 자유케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내신 진리의 사건을 화목(propitiation), 구속(redemption), 칭의(justification), 화해(reconciliation)등의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데,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지 않으셨다면 화목도 구속도 칭의도 화해도 있을 수 없다.
화목이란 이미지는 성전에서의 의식을 보여 주는데 바울은 이게 관하여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3:24-25)”라고 하였고 요한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요일2:1-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라고 하였다.
존 스토트는 이에 관하여 화목이 필요한 이유는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 말하고, 우리가 바치는 어떤 제물이나 헌물도 우리의 죄를 보상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돌이킬 수 없다고 명백하게 단언한다. 희생제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구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제사가 하나님을 은혜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죄에 빠진 인간을 향하여 은혜롭게 행동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마련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Ibid., pp. 236-38.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 희생 제물은 바로 어떠한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의로운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대신하신 이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기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의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을 우리 대신 당하심으로써 마침내 그 죽음을 극복하실 수 있었다. 데이빗 웰즈(David Wells) 박사는 이에 대하여 간명하게 잘 표현하였다. “바울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은 죄에 의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하나님은 진노에 의하여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죄가 극복되고 진노가 돌이켜지고 그리하여 하나님은 불쾌감 없이 인간을 바라보실 수 있고 인간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속에서이다. 죄는 속해졌고 하나님은 노가 풀리셨다.”
구속이란 이미지는 시장의 상거래에서 쓰이는 단어이다 ‘속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 개념에서 ‘산다’ 혹은 다시 ‘사들인다’는 의미를 갖는다. 화목이란 단어가 십자가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초점이 맞춰지는 한편, 구속은 십자가에 의하여 죄인이 속함 받아야 하는바, 죄인의 궁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즉 구속의 뜻에서 강조점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건져 주시는 행동을 필요하게 만드는 우리의 비참한 상태-우리가 사로잡혀있는 상태-가 된다. 이스라엘 개개인의 경우, 저당잡힌 재산을 회복하거나, 도살자에게서 동물을 건져내거나, 혹은 사람을 노에 상태나 심지어 죽음에서 구해내기 위하여 누군가 필요한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신약에 의하면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 말씀은 우리가 포로 상태에 있으며, 우리를 자유케 하려면 오직 속전이 지불되어야 하는데, 그 속전은 다름 아니라 메시아 자신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몰수된 상태에 있으며, 그러한 우리 생명 대신에 그분의 생명이 희생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하기 위하여 지불하신 비싼 값을 표현하기 위하여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그 자신’이나 그분의 ‘목숨’이 아니라, 그분의 ‘피’다. “너희가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라고 베드로는 기록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이셨을 뿐만 아니라 제물이셨음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속의 또 다른 의미는 속전을 지불하고 사들인 것에 대한 재산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에게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이와 같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우리 주님의 주되심은 그분이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리스도께서 사셨으므로 이제는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에도 종노릇 할 이유가 없다. 과거에 우리는 되의 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며, 그분에 대한 봉사는 참된 자유다. Ibid., pp. 239-247.
칭의란 법정용어이며 정죄의 반대 개념이다. 구약성경에서 통상적으로 등장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재판장을 향해 그들에게 제시된 소송 사건을 처리할 때 “무죄자를 석방하고 유죄자를 정죄하라”고 지침을 내렸다.(신25:1) 모든 사람은 야훼께서 ‘악인을 의롭다하지 아니한다’는 사실과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출 23:7; 잠17:15) 선지자 이사야는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관원들에게 불같은 진노를 선포했다. (사5:23)
이에 대한 바울의 선포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이 ......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4:5) 이러한 선포의 원천을 존 스토트는 바울이 네 개의 핵심어구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고 말한다. 첫째는 그분의 은혜로 말마암아 의롭게 된다는 즉 우리가 전혀 누릴 수 없는 그분의 호의로 말미암는다는 표현에서 제시된다.(롬3: 24)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것이 확실하므로(롬3:10),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롭다고 선언할 수 없다는 것도 동일하게 확실하다. “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롬8:33) 오직 그분만이 이 일을 하실수 있는 것이다. 그분은 그 일을 ‘값없이’(롬3:24)즉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은혜 때문에 하신다. 두 번째는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5:9)이다. 칭의는 특별사면의 동의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특별 사면이란 엄밀하게 말해서 원칙이 없는 용서이며, 악행을 간과하고 심지어 망각하고 의의 시행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의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악인을 선하다고 선언하거나 혹은 그들이 결국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죄인을 법적으로 의롭다고, 즉 그들의 불법에 대한 형벌을 자기 자신이 아들 속에서 당하셨으므로 죄인들은 그들의 불법으로 인한 처벌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셋째로 바울이 즐겨 쓰는 표현인 ‘이신칭의’다. 은혜와 믿음은 서로 불가분적으로 함께 있다. 왜냐하면 믿음의 유일한 기능은 값없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칭의의 원천이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칭의의 근거이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께 연합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칭의로 인한 효과는 예수님의 메시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하여 의롭게 되었다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며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이공동체는 선한일을 사모해야 하며 또한 그 구성원들은 선행에 힘을 쏟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한번 의롭다 하심을 입으면 아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 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 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십자가의 성취를 보여주는 이미지의 단어는 ‘화해’다. 화해한다는 것은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 우정을 새롭게 한다는 가장 인격적인 의미다. 이전에 하나님과 인간이 단절되었던 관계에서 ‘하나’가 되는 사건을 가리킨다.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위치를 우리의 신생보다는 우리의 양자됨에서 찾으면서, 우리가 노예가 아닌 아들이 됨으로써 가지는 특권 곧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화해됨으로 인해 누리는 인간은 축복은 하나님께 ‘나아감’(prosagoge)이다. 이 말은 특별히 기도를 통한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며, 이것은 화해가 이루어진 모든 자녀가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평, 그분의 가족으로서의 입양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더불어 맺으신 새로운 관계를 증거한다. 또한 화해는 수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 화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도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네 가지 의미를 간단하게 살펴 보았는데, 각각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필요의 서로 다른 여러 측면들을 밝히 드러낸다. 화목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강조하고, 칭의는 우리의 죄책을 그리고 화해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적대감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소외를 강조한다. 이 은유들은 우리의 결핌이 얼마나 큰가를 폭로해 준다. 또한 이 네가지 구원의 주도적인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하신 것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피흘리심을 통하여,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가르친다. 이러한 구원의 행위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의 구원하신 포괄적인 의미를 나타내며 우리는 그 분의 공로를 누릴만한 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2. 치유의 이해
구약에서 라파(Rapa)로 쓰인 단어는 치유의 의미를 내포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의 역사하심으로 정상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용어는 인간의 질병외에도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나쁜 물을 치유하거나(왕2:22), 바닷물의 소성되고(겔 47:8), 토기장이의 깨진 그릇이 회복되고(렘19:11), 국가적인 회복(호6:1;렘51:7-8)등에 쓰여졌다. 그 외에도 치료의 뜻을 가진 마르페(marpe: 렘14:17; 역대하21:18)라는 용어가 있으며, 치유집회등에 자주 사용되어진다.
신약에서 쓰인 용어로는 데라뷰오(Thcrapeuo), 소조(sozo)를 들 수 있다. 특별히 Sozo(마25:23; 눅8:36)는 질병과 질병의 영향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원받아 완전하게 된 경우를 의미할 때는 희랍어 소제인(sozein)을 사용하였다. 독일어의 헤일(Heil)은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건강과 치유의 뜻을 내포하며, 신약성경에서 50회 정도 사용되었다. 양기천, “전인 구원을 위한 치유목회 연구”(석사학위논문, 한세대학교대학원, 1999), p. 6.
우리는 타락한 가운데 살고 있으며 죄로 물든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죄와 질병, 병의 존재에 의해 감염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유혹에 대항해서 싸우기를 원하시며, 어떻게 우리 주변에 있는 질병에 대항해 싸울 것인지 배우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고자 하시며, 우리가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을 때 그는 우리를 영적. 정신적 그리고 신체적으로 치유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이 세상에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여기서 구원이란 단어의 온전한 의미는 ‘치유’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영혼과 정신, 육신의 구원 혹은 치유를 주시기 위해서 그 자신, 즉 영혼과 정신,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Colin Urquhart, op. cit., p. 19.
이에 대해 조용기는 신유론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여 전적으로 범죄 하였다. 이 범죄의 형벌로 인간의 영, 혼, 육이 모두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쫓겨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하나님께 받았던 모든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로써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영혼에만 미치지 않고 인간존재의 모든 차원과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영역에 미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공로는 이렇게 전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활의 축복과 육체적인 건강을 주시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육체적인 연약함과 질병을 없애기 위해 채찍에 맞고 몸이 찢기셨다.”(사 53:5)고 기록하였다. 조용기,「신유론」(서울 : 서울말씀사, 2001), p. 70.
치유란(Healing)란 용어는 대부분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 받는다는 뜻인 신유(divine healing)를 뜻한다. 그리고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현재의 상황과 결부시켜 “구원”을 “치유”로 해석했다. 힐트너(Seward Hilltner)는 “치유란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본래의 조건이 와해되었다가 다시 원상 회복되는 것, 즉 육체의 방향이나 그 스케쥴에 있어서 손상을 입었던 것에 대한 기능적인 완전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고 했다. 또한 치유란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영적 그리고 사회적 비정상 혹은 병리적 상태로 이탈된 것을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 곧 신체적, 정신적, 영적 그리고 사회적 균형상태, 온전함, 조화로운 상태로 회복하도록 돕는 일련의 작업이다. 박대익, op. cit., p. 11.
성경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시 103:3-4)라는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미래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이 타락함으로 받게된 죄의 대가로 하나님과의 단절, 인간관계의 파괴, 질병, 마귀의 종노릇 함, 귀신들림, 사망 등의 죄과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죄과로부터 온전히 건짐받는 것이 치유일 것이다. 이러한 치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온전한 치유를 가능케 한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우리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능력을 주며, 질병으로부터 그리고 마귀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치유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영적, 정신적, 그리고 육신적 병의 궁극적인 치유를 원하신다. 이 완전한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부터 나오는 구속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최종적이고 전반적인 치유를 우리가 부활할 때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건강을 원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이 그것을 위해 개인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더욱 확고히 믿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욱 자유롭게 그분의 치유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더욱 열렬히 다른 사람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위해 자유롭게 치유를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문제가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선다. Ken Blue,「치유의 권세」, 여주봉 역(서울 : 바울서신사, 1993), pp. 74-75.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건강하게 그리고 그렇게 살도록 창조 하셨다. 인간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기를 원하는 자연적 본성을 가졌다. 만약 우리가 심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고통중에 있다면 그것에서 자유를 얻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신체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을 때 자동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치유의 성질과 함께 인간을 창조하셨다. 의사들은 의약품을 사용하거나 여러 종류의 처방을 통해서 그 진행을 좀더 활발하게 하거나 수술을 통해서 그 진행들을 도울 수 있을지언정 그 상처들을 낫게 할 수는 없다. 의사의 수련 과정은 환자의 몸 안에서 진행되는 자연적 치유와 함께 협력할 것을 가르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명백하고도 중요한 진리를 보여 주는데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Colin Urquhart, 「치유함을 받으라」, 이광호 역(서울 :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p. 13.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가 만드신 인간은 모든 면에서 훌륭했었다. 질병과 죽음은 인간이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지어 타락한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경험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후로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 백성을, 처음 창조되었을 때와 같이 완벽한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기를 원하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건강하기를 원하며, 건강한 인간 관계를 갖기를 원하고, 건강한 태도, 건강한 환경을 갖기를 원하신다. 그는 건강한 백성들의 건강한 사회를 원하신다.
주님의 치유는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데 십자가의 그 고통은 바로 우리가 치유받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다. 십자가를 통한 질병의 대속은 구약에 예시된 모형들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예비하신 구속의 은혜임을 알 수 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죽음의 재앙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출 12:13) 이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요1:29)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성도들이 심판의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또한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이스라엘 백성이 죽어갈 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시고 뱀에 물렸던 자들이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살아나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로 다시 살게 하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예표한 것이다. 조용기, op. cit., p. 70.
이와 같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우리가 치유받기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마음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2) 구약성서에서 나타난 치유
구약 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최초로 법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숨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오시며, 이 관계의 회복을 원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아 영적인 죽음과 질병에서 인간을 치유해 내시는 최초의 치유자는 하나님이시다. 구약성서에서의 질병은 하나님의 형벌, 저주, 채찍, 혹은 은총을 위한 시련으로써 나타난다. 이러한 질병에서의 치유는 반드시 속죄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치유는 사실상 구원과 그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박영식, “치유목회에 대한 성서적 연구” (석사학위논문, 호남신학대학교대학원, 1999), p. 13.
사람들의 치유방법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드는 정도였으나, 하나님은 배신한 인간을 찾으시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사실은 인간을 고통과 죽음가운데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치유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며, 완전한 치유자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계시한다.
구약은 하나님 자신을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죄의 문제 해결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순종 뿐 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시편기자는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시103:3-4)라고 하면서, 그분을 우리의 목숨을 구렁에서 건져 주시고 사랑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은혜로우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 33:22-24,렘30:17). 나아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사람은 질병이나 전사등 각종 죄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고 한다. Gary S. Greig, op. cit., pp. 163-64.
구약에 나타난 치유는 하나님이 택하신 지도자나 선지자, 제사장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특별치유였다. 아브라함, 모세(민12:1-15), 아론(민16:41-50), 제사장 비느하스(민 25:6-9), 다윗(삼상 16:14-23), 욥(욥42:10), 히스기야(왕하 20:1-7), 무화과 반죽으로 치료한 이사야, 그리고 엘리야와 엘리사의 치유역사 등이 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사례들이 많이 실려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살인과 간음을 저지른 다윗을 용서하셨다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못된다 (삼하12:13). 요나서는 하나님을 앗시리아인들을 용서 하시는 분으로, 열왕기상21장 29절은 아합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열왕기하 5장은 아람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을 치유해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예레미야 38장 17-23절은 시드기야 왕에게 구원의 약속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상의 인물들 가운데에는 악명높은 사람도 있었고, 자신의 죄과로 인해 임박한 심판이 예고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그들로 하여금 준엄한 심판을 면하게 해 주었다.
따라서 구약은 인간의 죄과에 대한 해결책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를 회복할 때 개인적, 집단적인 죄과를 치유받을 수 있다. 가뭄이 그치고 아군이 싸움에서이기며, 전염병과 각종 질병이 치유된다. 비록 불분명한 면이 있기는 해도, 이 문제에 관하여 구약이 제시하는 윤곽은 매우 뚜렸하다. Ibid. p. 165.
선지시대 예언자들은 병이든 자에게 예언(사38:1)이나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영적 화해를 통해 치유했다. (왕상1:36) 호세아는 사람들이 악해서 역경과 사망으로부터 구원의 능력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특히 에스겔의 마른 뼈의 골짜기 사건은 치유능력에 대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겔37)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와 구원사역을 예언한 이사야의 치유복음 선포(사53)는 반드시 치유하시고 고쳐주시는 ‘여호와 라파’(출15:26)되시는 하나님의 실체성 있는 약속의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치유
신약에서는 마태복음에25건, 마가복음에 18건, 누가복음에 24건, 요한복음에 5건등 총 72건의 예수님이 행하신 치유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기적은 총41건이며,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기록한 공관복음의 총 절수는 468절로써 공관복음 총 절수인 3,781절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의 삶과 행위를 기록한 것의 1/8에 해당되며, 예수님의 공생애의 1/3과 복음서의 1/5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에 관한 것이다. 양기천, op. cit., p. 12.
예수님의 치유사역은 인간에게 풍성한 삶을 주실 뿐 아니라(요10:10), 하나님의 형상안에서 잃어버린 인간을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육신의 치유와 죄사함의 선포를 하시거나 다시는 범죄하지 말 것을 경고하심으로(눅5:20, 요8:11) 육체 및 그 육체에 속한 악한 세력까지 소급하여 승리를 선포하심으로 전인치유를 이루셨다. 또 하나의 특징은 제자들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나갈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치유사역의 능력이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실제로 나타났으며, 지속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행2:33) 누가복음4장 18-19절과 사도행전10장 38절은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과 내용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눅4:18-19절과 사도행전10:38절은 예수님의 치유능력의 원천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3중적 사역의 선포(행2:14, 3:12, 10:34, 13:16), 병고침(행3:1, 9:33, 9:36, 14:8) 축사(행16:16, 19:12)에 있음을 보여주며, 이것은 사도행전의 초대교회 사역을 통하여 계속 이어진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예수 안에서 이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신 것으로 되어 있다. 신약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인간의 죄과를 치유 하시려는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에 주춧돌을 놓으셨음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관점에서 예수님의 궁극적인 사명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고 그 죄과를 치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분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에서는 모든 죄과가 치유되게 마련이었다. 예수님의 삶은 이와 같은 죄의 결과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치유하시는 사역의 연속이었다.
누가에 의하면 예수님의 사역목표는 죄의 결과로 인해 고난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눈먼 사람들, 묶인 사람들, 그리고 억눌린 사람들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우선, 예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역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주권적인 은총의 역사란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속으로 돌연히 침투해 들어오는 현상으로,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놀라운 치유나 귀신축출 사역을 행하시는 경우들이 거기에 해당된다. Colin Urquhart, op. cit., pp. 165-66.
신약시대의 사람들 즉 사두개인을 제외한 유대인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또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죽은 사람이 살아난 사건을 ‘앞으로 올 세상’(히 6:5)의 전조로 보았을 것이다. 따라서 누가 역시 그와 같은 사건들을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위대한 죽음의 치유의 예로서 소개코자 했을 것이다. 죄과를 치유받는데는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이 작용하곤 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믿음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신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과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리키며,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데 대한 믿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12제자나 70인의 제자를 파송할 때 축사와 병고치는 능력을 주시고 치유사역을 계속할 것을 말씀하셨다. 초대교회의 축사와 질병치유는 복음전파의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며, 사도들의 권위를 믿게하는 신임장이 되었다. 언제나 사도들의 치유목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었으며, 주님의 능력을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했다. 양기천, op. cit., p. 14.
바울을 비롯한 신약 기자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한 신뢰라는 개념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죄과를 치유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매우 친숙해져 있었다. 바울에게는 진정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갈 4:4-7), 기적적인 사건을 포함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케 하는(갈 3:4-5)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역시 진정한 믿음을 지닌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일들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요14:12)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란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것을 뜻하며, 논리적으로 믿음을 갖게 되기에 앞서 그것을 준비하는 단계에 속한다. 서신서들 가운데 특히 야고보서 5장 16절은 회개와 죄과의 치유를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잇다. 앓는 사람의 병이 그의 죄로 인한 것일 때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받으면 되의 용서와 병의 치유를 아울러 받을 수 있으리라는 말에 이어서, 야고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이 말의 요지는,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치유를 비는 기도를 할 때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상의 상황에서 인간의 죄과는 예수께서 오시어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치유되었다. 인간의 죄과는 예수님의 주권적 은총을 통해 치유되지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수반될 때에는 그와 같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다. 한편, 예수님을 직접 뵈옵기는 했어도 그분께 대한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비교적 치유의 역사를 체험할 기회가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마 13:58, 막 6:5-6) 그와 같은 치유의 역사에는 모든 종류의 죄과-죽음, 단절된 관계,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귀신들림, 육체적인 질병 등-가 포함되어있다. Colin Urquhart, op. cit., p. 173.
3. 예언의 성취
복음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건에 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서의 사분의 일 정도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할애되고 있다. 만약 중대한 이유가 없는한 복음서들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해 그토록 상세히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세부 기록들은 구약의 예언이(이사야 53장)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 사건이 있기 수 백년 전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에 관한 놀라운 예언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므로 우리의 완전한 치유를 어떻게 성취하시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 관하여 죄의 용서로만 해석하여 믿는자가 누려야할 더 많은 치유의 축복을 간과할 때가 많다.
마태복음 8:16절에는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자를 다 고치시니"라고 말한다. 마태는 이에 관해 예수님의 치유는 죄사함에 국한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관해 그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8:17)고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해석하였다.
예수께서 자기의 지상 사역 동안에 이를 일부 행하신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전히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결코 죄를 알지도 못하였으나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은 치유에 대한 총체적 사역이었다. 우리 죄의 영적인 질병은 확실히 그에게 지워졌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 그와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와 사랑의 관계를 즐거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우리의 고통과 슬픔, 허물, 질병등 모든 불결한 것들을 다 짊어지셨다. 그것은 우리가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함이었다.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은 마태복음 8:17의 히브리원문을 “그가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셨고, 우리의 고난을 옮기셨다”(he hath borne our griefs, and carried our sorrows)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 ‘슬픔’(griefs)과 ‘고난’(sorrows)은 정확하지 않으며, 이를 ‘질병’(sicknesses)과 ‘고통’(pains)으로 읽는 편이 옳다. 그 말은 신체적인 질병을 가리킨다. 마태는 히브리어를 알았을 것이며, 그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우리 연약한 것을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라고 말한 것이다. ‘옮겨졌다’ (carried)는 말의 의미는 문자적으로 어떤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들어올리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들을(죄와 질병) 들어올려 옮기셨다는 의미이다. Ibid., p. 33.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을 죄와 동일하게 다루어 그것들을 옮기셨다. 그가 그것들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혼란인 슬픔과 고난까지도 담당하셔서 “곤욕을 당하여 괴로워 했던”(사 53:7) 것이다. 치유를 위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행하시리라는 것을 믿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셨고 우리에게도 가능케 하셨음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주님, 당신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사역을 통해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하듯이 “주님, 당신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사역에 의해 나를 치유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기를 우리의 신앙 생활 초기부터 배웠다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훨씬 많은 치유의 역사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1) 정신적 고통을 짊어지심
십자가는 그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받아야 할 고통을 몸소 체휼하셨다. 그의 제자 유다에 의해 은 삼십에 팔려야 했으며, 그의 수제자 베드로에게 저주를 받으며 부인당하셔야 했고, 그의 사랑하는 모든 제자들이 십자가 고통을 겪을 때 도망하였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왔으나 그들 아니 모든 인류는 그에게 모든 정신적 고뇌를 안기고 말았다. 그의 고통의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게 하였고 이러한 기도와 정신적 고뇌는 우리를 고뇌와 근심으로부터 자유케 하기위한 대속의 사건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는 이들이 모든 비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자기 자신 위에 모든 비난을 지워 스스로 비난당하도록 허락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범죄하였으므로 당연히 저주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로 인해 대신 고난 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신 사형을 언도 받으셨던 것이다. 그는 비웃음과 함께 조롱을 당하면서 병정들로부터 채찍을 맞았다. 왜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이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 성자에게 일어나게 하셨을까? 또한 왜 그러한 세부적 사실들이 우리를 위해 사복음서에 기록이 되어야 했을까?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가 우리의 죄를 지셨다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이 사건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Ibid., p. 40.
2) 육체적 고통을 짊어지심
예수께서 로마 병정들로부터 채찍을 맞을 때, 우리의 모든 신체적인 고통과 질병은 그의 위에 쌓아 올려졌다. 그는 결코 범죄치 않았으며, 질병을 앓은 적이 없었지만 우리의 죄와 모든 고통과 질병을 자기 위에 옮겨가셨다. 그것은 마치 한번의 채찍은 우리의 암을 위해서, 또 다른 한 번의 채찍은 뼈의 질병을 위해서, 그리고 또 다른 한 번의 채찍은 마음의 병을 위해서인 것과도 같다.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쌓여져 그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다. 예수의 상처에 의해 우리가 치유를 받았다. 치유케 하는 것은 그 채찍들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자기의 사랑하시는 독생자에게 두셨다는 사실에 있으며,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가를 볼 수 있다. 그는 예수께 놓이게 된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해서 그러한 방법으로 고통받으실 것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3) 거절당하심
예수께서는 유다에 의해 배신당하시고, 베드로에 의해, 열두 제자들로부터, 안나스와 가야바, 빌라도, 모든 군중, 병정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그의 발 앞에서 조롱하던 자들에 의해서 거절당하셨다. 그는 그 모든 거절을 자기 자신 위에 지고 죽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모든 의미의 거절과 부정함, 그리고 열등함을 치유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 모든 것을 취해 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라고 부르짖은 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절당할 것을 대신 짊어지신 까닭이라 하겠다. 이러한 처절한 부르짖음은 우리의 처지와 동일시됨을 의미한다. 그는 아무 죄도 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몸소 분리됨을 체험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사망가운데 영원히 있게 하지 아니하시고 그를 살리셨다. 그 부활은 그가 죽음과 죄, 질병, 버림당함, 저주를 포함한 모든 사단의 사역을 이기셨다는 증거이다. 예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치유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3)
4. 예수와 하나님 나라
성경을 보면 영적 왕국이 두 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사단의 나라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나라는 서로 대결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막3:33, 눅22:3, 31) 조지 E. 래드는 “복음서에 나타난 사단의 주요 기능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반대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적 세계관은 분명히 두 개의 영적인 나라사이의 대립이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제임스 칼라스는 예수님께서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시는 우주적인 전쟁을 위한 승리의 사역자로 묘사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전투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승리로 결정났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사단의 패배와 이 세상에 대한 사단의 지배의 파멸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과 죽음과 부활이 갑자기 인상적인 하나의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 그분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치유하심으로써 사단과의 싸움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사단의 가장 강한 영역에서 즉, 죽음의 영역에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으로 사단을 공격하셨으며,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사단의 가장 최종적인 무기인 죽음을 박살내심으로써, 사단의 능력을 완전히 멸하셨다. 이렇게 본 예수님의 생애는 일관성있고,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점점 심해가는 하나의 전쟁이었으며, 예수님의 부활에서 그 전쟁이 극에 달했다. Ken Blue, 「치유의 권세」, 여주봉 역(서울 : 바울서신사, 1993), p. 72.
이 승리는 우리에게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하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귀와 마귀의 거짓 왕국에 대하여 치명타를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그의 어두움의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 이 땅에는 아직도 이를 전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 사단은 속이는 자로서 그들을 지배하고 거짓 왕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계속되어야 하는 미완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이로인해 영적 전투는 주님 오실날 까지 계속되는데 이 사명을 교회에 맡기셨다고 하였다
이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주셨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눅 9:1-2)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동일한 역사로 그의 백성들에게 함께 하시는 것이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6-18)
치유의 근본목적은 하나님 나라회복과 성장, 그리고 완성에 있다. 그래서 치유를 위한 사역은 질병의 치유와 회복을 넘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의 백성으로서 언약적 삶을 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악한 자와 그의 행위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주장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통치"라고 정의할 수 있다.
5. 악의 정복
죤 스토트는 십자가의 악의 정복에 대해 이렇기 기술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거기에 가득 펴져있는 승리로 인한 기쁨과 감격이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무미 건조한 종교와는 다른 양상을 띄고 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패배주의 같은 것은 없었다. 도리어 그들은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모든일에 넉넉히 이기느니라."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그리고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각각의 편지들은 ‘이기는 그에게’주는 특별한 언약으로 끝을 맺는다. 승리, 정복, 이김 이것이 바로 처음에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의 어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승리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그 승리가 승리하신 주님에 의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목도한 당시의 사람들은, 그 십자가에 달린 이를 승리자라고 선언하는 말에 대하여 선뜻 신뢰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바로 자기 백성에게서 버림을 받고, 바로 자신의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 부인당하고 버림당하였으며, 로마 총독 관헌에 의하여 처형되지 않으셨던가? 모든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아무 힘도 없이 못박힌 채로 사지를 벌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 그것은 완전한 패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만약 거기에 승리가 있다면 거기에는 자만과 편견과 시기와 증오와 비겁과 잔인성의 승리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확실히 선에 의한 악의 패배였다. 그 곳에서 정복당함으로써, 실은 그 자신이 정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의 무자비한 힘에 의하여 부수어지는 동안 실은 그분이 뱀의 머리를 부수고 계셨던 것이다.(창3:15) 희생자가 실은 승리자였으며, 그분은 여전히 십자가를 보좌로 하고 그 위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John R. Stott, 「그리스도의 십자가」, 황영철외 역(서울 : 한국기독학생출판부, 1998), p. 314.
19세기의 스코틀랜드의 주석가 존 에디(John Eadie)는 “우리의 구속은 값을 지불하는 일인 동시에 능력 있는 일이다. 즉 보상을 하는 일이면서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거래가 이루어졌으며, 또한 십자가에서는 승리가 획득되었다. 우리에 대한 사형선고를 무효화시키는 피가 십자가에서 흘려졌으며, 사단의 나라에 치명타를 안긴 죽음 역시 거기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와 그의 휘하에 있는 모든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것들을 무장 해제시키셨다. 이 십자가의 정복의 사건은 예언된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뱀에 대하여 심판하였는데,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십자가의 사건의 예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단은 예수님이 자기를 정복할 자임을 알고 여러 가지로 그를 제거하려 하는데 예를 들면, 헤롯의 베들레헴 영아 살해를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피하게 하려는 광야 시험을 통하여, 베드로의 십자가 사건의 만류등을 통하여 싸움은 대립되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 세대에 임하였으며, 자신이 행하는 능력의 일들이 그 나라가 임한 가시적 증거임을 선언하셨다. 귀신들이 쫓겨나고 병이 치료되며, 무질서한 자연이 그의 명령에 순종함과 동시에 제자들에게까지 이러한 정복의 사역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은 십자가에서 성취된 정복으로 드러나는데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3-15) 바울은 우리의 죄의 용서라는 측면과 우주적 세력인 정사와 권세의 정복이라는 측면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2: 31-33에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승리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밤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가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선언하셨다. 또한 요한복음 16:8-11에서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구절을 통해 성령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인간을 향하여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그의 완전한 의가 되셨음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마귀를 향하여는 그리스도께서 그 원수 된 마귀를 십자가에서 완전히 정복해 버린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제시 펜 루이스는 이와 같이 선언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단을 멸하셨다는 진리의 사실을 믿음으로써 옛 아담의 성품과 생명을 실제적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버릴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은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됨으로써 악한 원수를 이긴 사실을 재 확인 하게 될 것이고, 이 세상의 임금이 당신의 삶 속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승리하셨습니다”. Jessie P. Lewis, 「십자가의 도」,이현수 역(서울 : 두란노, 2001), p. 25.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6-18)
닐 앤더슨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성령을 받은 예수와 특별히 선택된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마귀의 세력을 제어하는 데 필요한 권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뭔가 근본적인 일이 십자가 사건과, 영적 싸움의 본질을 영원히 변화시킨 부활에서 일어났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어두움의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고 승리하였다.(골 2:15)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는 예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8절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든 권세를 갖고 계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단의 패배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를 위협하고 괴롭히려는 원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권위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위치와 권위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된다.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기업이다.” 고 하였다. Neil T. Anderson, 「이제 자유입니다」, 유화자 역(서울 : 죠이선교회, 2000). pp. 31-32.
이와 같은 십자가의 악에 대하여 그리고 악한 영에 대한 십자가의 승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치유의 근거가 된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인간에게 임한 질병이나 하나님과 단절케 되는 요인이 바로 죄와 악한 영으로 인한 영향으로 인간의 삶과 육신이 병들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승리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치유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제어할 권세를 주셨는데 마귀과 그의 영들은 이러한 권세를 알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권세를 명확히 이해하고 믿는 자는 두려움없이 적을 바라보고 승리할 수 있다. Kenneth E. Hagin, 「믿는자의 권세」, 나영일 역(서울 : 도서출판성서생활, 1993). p. 13.
Ⅳ. 결 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복음을 영적으로 경험한 사람에게 2000년 전 유대 땅에서 일어났던 그 일이 오늘 여기에서 우리의 상처 치유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됐고 영생을 얻었다는 등의 큰 주제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작은 문제 하나하나 까지도 다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갈보리 사건을 통해 공의를 버리지 않으시면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실 수 있음을 증거해 준다. 그것은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대가를 치룸으로 가능해 졌다. 그 대가는 그 피를 십자가에 흘림으로 치루어진 것이고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Mishael Green, 「예수의 비어있는 십자가」, 김동화 역(서울: 요단출판사, 1987), p. 98.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의 치유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전인격적인 치유를 말하는데,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슬픔이나 고난, 찔림, 상함등의 이유와 목적을 말해주고 있다.(사53:4-6) 그분은 진실로 가난한자, 마음이 상한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슬픈 자를 위해 오셨고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사61:1-3)고 하였다. 참으로 골짜기가 돋우워지고 산이 낮아지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길 원하셨다.(사40:3-5) 이 모든 것을 생각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친히 피를 흘리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셨다.
우리는 나의 죄과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실을 믿음으로 나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치유는 부정한 것이 아니다. 무속적인 것 또한 아니다. 진정한 치유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강같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주의 보혈만이 우리의 아픈 상처, 깨진 관계, 쓰라린 기억들과 같은 암적 존재들로부터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 피흘림이 없은 즉 죄 사함이 없다.(히9:22) 주님의 보혈의 희생은 우리 죄를 완전히 용서 하셨고 그 죄에 대한 형벌까지 충분히 면제 시켰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관념화된 주제가 아니다. 현실적이고 능력이다 최현주, 「상처받은 하나님, 치유되는 인간」(서울 : 죠이선교회출판부, 2001), p. 164.
이 사건은 미래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4:16)을 촉구했다.
만약 예수께서 우리를 위한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고통받아야 한다. 질병 가운데서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 대가를 이미 지불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고통가운데 있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물론 주님의 치유가 이땅에 있을 때 모두 완벽하게 이루어 질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만 나아가면 많은 고통과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간과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려 발아래 두신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아직도 진리가 없는 자에게 역사할 뿐만 아니라 진리에 서지 못 한자를 지배하고 미혹하는 가운데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이 모든 것에서 자유케 하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믿는자에게 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믿는 자들은 예수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마귀로 인한 질병과 상한마음과 영적 억눌림으로부터 당당히 자유함을 얻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의 길이 열린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