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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알파-토크)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어노인팅
2007. 12. 12. 20:55
알파-토크) 예수님은 왜 돌아가셨는가?
(Why Did Jesus Die?)
요한복음 3:16
동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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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십자가는 교수대나 전기의자와 같은 사형집행 도구였습니다.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어서 로마인들이 AD 315년에 폐지시킨 제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복음의 상당 부분은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에 고한한 것이고, 신양성경의 대부분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끼친 영향 때문에 기억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세계 역사를 가장 크게 바꾸어 놓으신 분이지만, 그의 삶보다는 죽음으로 인하여 더욱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그토록 기억하는가?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푸는 말
1. 인간의 최대 문제는 무엇인가? (The Problem)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해서 교회에서도 별로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이야기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말하기를, "독약에는 독약이라고 분명히 써 붙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죽게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죄를 은폐하고 죄의 심각성을 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죄의 근원적인 문제와 심각성은 외면한 채 범죄사실만을 다루는 것은 분명한 오류일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어야 인간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회피한다면, 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자신을 파렴치 법과 비교하면서 꽤 괜찮다고 생각할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닭을 수 있습니다.
서머셋 모음은 “만약 내가 이제까지 생각한 것과 저지른 모든 행동을 다 적는다면, 사람들은 내가 사악한 괴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이며 그 분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있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 때문에 생긴 것들을 살펴봅시다.
1) 죄의 오염 (막 7:20-23)
여러 법규 중에 하나만 어겨도 죄를 짖는 것입니다.
<운전> 괘 깨끗한 면허증은 없습니다. 한번만 위반해도 깨끗한 면허증은 사라진 것입니다. 인간의 한번 위반이 우리의 삶을 더럽힌 것입니다.
2) 죄의 힘 (요 8:34)
죄는 중독적인 힘이 있습니다. (요8:34) 마약이나 담배처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노력을 하지만 놓아주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에 메이게 하여 끝내는 삶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리버플 주교를 지낸 J. C. Ryle 주교가 남긴 글입니다.
“모든 죄는 손과 발이 사슬에 매인 불행한 죄수들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불쌍한 죄수들이 대단히 자유롭다고 우쭐거리기도 한다. 이런 노예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죄는 참으로 고약한 주인이다. 도중에는 비참함과 실망으로 괴롭히다가, 결국에는 절망과 지옥을 품삯으로 준다.”
3) 죄의 대가 - 형벌 (롬 6:23)
파렴치범들은 반드시 잡혀서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뿐만아니라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4) 죄의 분리 (사 59:1-2)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육체적 죽음 뿐만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The Solution)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가 엉망을 만들어 놓은 삶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죤 스토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 대리”라고 부릅니다. 베드로의 표현의 빌리자면,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ꡓ
<자기대리>// 2차 대전 중 미얀마 철도 작업을 했던 영국군 포로들의 이야기를 쓴 “콰이강의 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업 후 삽을 반납하는데 한 개가 모자란다고 모두 죽이겠다는 위협을 합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갔고 매질을 하다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포로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다시 세어보니 꼭 맞았습니다. 그 한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대리도 나왔던 것입니다.
<십자가>// M. Henger은 그의 저서 ꡔ십자가의 처형ꡕ에서 십자가 처형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Persia 사람들에게 배워서 파급시킨 십자가 처형법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국민에게만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채찍은 가죽 채찍입니다. 물에 퉁퉁 불었습니다. 그리고 마디마다 짐승의 뼈가 날카롭게 꽂혀있습니다. 엄지 손톱만한 납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한번 휘감아 치면 채찍은 온몸을 휘감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을 뽑으면서 살은 찢어집니다. 찢어진 자욱마다 박힌 납, 가시가 박히면서 살점을 뜯어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맞으면 40에 하나 감한 매, 39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옆구리 쪽으로 내리치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이 채찍을 맞으셨을까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나를 치료하기 위하여 아픔을 친히 담당하기 위하여 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60kg의 십자가 나무토막을 짊어지셨습니다. 간밤부터 맞았던 채찍 자욱이 응고되었다가 터져서 다시 피가 흘러내립니다. 600m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한발자욱 쓰러지고 두발자욱 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 지켜볼 때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로마의 장교들 다 어디가고 떡 먹든 군중들은 다 어디가고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어디가고 주님의 12제자 다 어디가고 고관대작들 부귀 영화 분복을 누리던 사람 다 어디가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시몬에게 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더란 말입니까?
처형자의 혈관이 뼈가 드러나고, 근육과 힘줄이 끈어지고 창자가 찢겨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매질을 합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십자가에 달린 채로 길가에 방치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롱하게 만들고 죽은 후에는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15cm 되는 못을 손목 위 전박을 뚫었고 무름을 옆으로 비들어서 아길레스 건과 결골 사이 발목에 박았습니다. 메단채 땅이 파 놓은 구멍에 끼웠습니다. 조롱과 수치 갈증과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하여 갑니다.
그 소중하신 독생자를 보내셔서, 나 대신 죽음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원망의 절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알았어요. 아버지는 내게 이토록 처절한 형벌을 내리고서라도 사람들을 살리길 원하셨군요!"
그 고통의 순간 하나님은 고개를 돌렸고 태양도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6시간 동안 지구는 암흑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워 하나님이 발을 동동 구르셨는지 온 땅이 진동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나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인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 하나님 계시지 않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십자가는 지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절규는 지옥에서 부르짖어야 될 절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죄 지은 모든 인간들이 지옥에서 당해야 될 바로 그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저주는 지옥의 저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잘난 사람들을 통하여 법궤를 메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고, 분복을 누린 사람들에 의하여 법궤가 감당되어지기를 주님이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높은데 올라간 경험이 없는 사람, 삶의 환경이 곤고한 사람, 아프리카 사람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은 나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짊어지기를 주님이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분은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제자들의 외면과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아픔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이기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친히 대속하셨다 (벧전 2:24)
2) 예수님을 통하여 대속하셨다 (고후 5:21)
3)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속하셨다 (갈 3:13)
4) 십자가는 인간 극치의 고통이다 (마 27:46)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지금이라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수5:9)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3. 십자가의 결과는 무엇인가? (The Result)
(골 2:15)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 법정에서의 용서 (롬 3:24)
<친구>// 어떤 사람이 아주 중죄를 지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석의 자리에서 재판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판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는 여러해 동안 보지 못했던 학교다닐 때의 친구였습니다. 자기 친구는 판사이고 자기는 그 재판석에 죄인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증인이 와서 죄에 대해서 증언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판사가 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판사와 죄인은 그 자리에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가 하고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중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가볍게 내릴 것인가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선고를 기다립니다. 판사가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가 선고한 판결은 법이 정한 가장 중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 죄수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아주 많은 벌금이었습니다.
이제 그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청중들은 그 선고가 너무 가혹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자기 친구에게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의의 법정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판사가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서 죄수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손을 내밀어서 그 죄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 벌금을 자네 대신 물어주겠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벌금도 내고 그 죄인은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정해야하는 판사는 죄에 합당한 벌금을 불리고 대신 수표를 써 주면서 갖다 주면서 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없다고 하자’가 아니라 대가를 치루시는 것입니다. 수표를 건내 주시면서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선교사가 그 지역에 이름모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세균을 넣고 미국의 존스합킨스 대학에 가서 자신의 피로 면역체를 개발하게 하였습니다. 고열이나고 통증은 점점 더해갔으며, 결국 그 선교사는 그 병원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의 결과 질병의 면역체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의 희생으로 인해 사람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속의 죽음, 대속의 피로 살게된 것입니다. 1) 우리는 더 나쁜 상황입니다. 벌금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2) 친구 정도가 아니라 자녀를 사라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시며 3) 그 대가는 돈 정도가 아니라, 죄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치루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2) 시장에서의 배상 (막 10:45)
누군가 큰 빚을 졌다면 갚기 위해서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습니다.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으응, 옷을 발가벗기고, 음식은 최소한으로, 잠은 마굿간에서, 4발로 기어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몸값을 치루고 그를 구한 것과 유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대속의 값을 치루셨습니다. 이로서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시는 죄를 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지배력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선물을 얻은 사람은 그 값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인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 값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은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그 값을 따질 때 얼마를 지불하고 그 물건을 샀느냐로 평가합니다. 볼펜은 1,000원을 주고 샀으니 1,000원입니다. 시계는 10만원을 주고 샀으니 10만원입니다. 소중할수록 잘 보관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의 목숨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 값은 얼마가 되는 것입니까? 독생자만큼의 값, 즉 몇 억 짜리가 아니라 "예수 짜리"가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구원받은 사람, 영생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예수 주고 산 것이니 이 얼마나 값비싼 존재들입니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뿌듯해지고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이제 당신의 값은 예수님만큼 소중해 졌습니다. 예수님하고 맞바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성전에서의 희생 (롬 3:25)
스위스에서 어느날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내리막 길에 들어선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내리막 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빠라졌고,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급한 내리막 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는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자,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마을이 보였고 이젠 모퉁이 어디엔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마을 입구 도로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피하라고 소리까지 칩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어뭇거립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둘러섰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 하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둬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이예요.”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예수! 그분은 바로 당신의 그리스도, 당신의 왕,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4) 가정에서의 화목 (고후 5:19)
기독교 국가들의 국기는 십자가가 들어 있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선진․복지국가입니다. 덴마크의 국기 역시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이렇습니다. 1219년도에 왈뎀카 왕은 군대를 이끌고 이길지 질지 모르는 불안한 전쟁에 나가기 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ꡑ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보였습니다. 왕은 그 십자가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싸운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전쟁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국기를 가지고 나가 승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질병과 싸워 이겨서 건강한 삶을 살고, 가난․저주와 싸워 이겨서 풍족한 삶을 살고, 죄악과 싸워 이겨서 의로운 삶을 살고, 모든 시험․유혹과 싸워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어느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 가난한 소년이 오두막에 살고 있었는데 홍수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손이 이렇게 더럽고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누추한 집인데,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선한 행위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내 모습이 거지 소년과 같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손을 내밀어 그 선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이제 믿고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원받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차고 이 교회 안에 흘러 넘치고 이 강단에서 폭포수처럼 흘러 넘치고 불같이 쏟아져도 여러분이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은 이 길! 한 길 밖에 없습니다.
- 진리는 하나! 예수 밖에 없습니다.
닫는 말
존 하워드 요드는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여기 이 십자가에 자기 원수를 사랑한 사람, 자기의 의가 바리새인의 것보다도 더 큰 사람, 한 때는 부유했지만 가난해진 사람,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몽땅 주어버린 사람, 자기를 이용하고 우롱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매달려 있다. 이 십자가에는 바로 이 사람이 매달려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우회도로가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살았지만, 영감이 넘치는 찬송가를 많이 남겨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찬송작가 패니 크로스비가 쓴 49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거기에 값없이 주시는 보배로운 샘/
갈보리 샘으로부터 흐르는 치유의 시내가 있나이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거기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그때 그 무리들이/ 나를 위해 오신 주님 /
갈보리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Why Did Jesus Die?)
요한복음 3:16
동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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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십자가는 교수대나 전기의자와 같은 사형집행 도구였습니다.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이어서 로마인들이 AD 315년에 폐지시킨 제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복음의 상당 부분은 십자가와 예수님의 죽음에 고한한 것이고, 신양성경의 대부분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계를 변화시킨 위대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끼친 영향 때문에 기억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 세계 역사를 가장 크게 바꾸어 놓으신 분이지만, 그의 삶보다는 죽음으로 인하여 더욱 기억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그토록 기억하는가? 기독교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의 죽음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은 왜 죽으셨는가? 그리고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푸는 말
1. 인간의 최대 문제는 무엇인가? (The Problem)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해서 교회에서도 별로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이야기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목사는 말하기를, "독약에는 독약이라고 분명히 써 붙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먹고 죽게될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런데 죄를 은폐하고 죄의 심각성을 망각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죄의 근원적인 문제와 심각성은 외면한 채 범죄사실만을 다루는 것은 분명한 오류일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어야 인간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회피한다면, 죄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자신을 파렴치 법과 비교하면서 꽤 괜찮다고 생각할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비교해 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닭을 수 있습니다.
서머셋 모음은 “만약 내가 이제까지 생각한 것과 저지른 모든 행동을 다 적는다면, 사람들은 내가 사악한 괴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죄의 근원은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이며 그 분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탕자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있어서 엉망이 되어버린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죄 때문에 생긴 것들을 살펴봅시다.
1) 죄의 오염 (막 7:20-23)
여러 법규 중에 하나만 어겨도 죄를 짖는 것입니다.
<운전> 괘 깨끗한 면허증은 없습니다. 한번만 위반해도 깨끗한 면허증은 사라진 것입니다. 인간의 한번 위반이 우리의 삶을 더럽힌 것입니다.
2) 죄의 힘 (요 8:34)
죄는 중독적인 힘이 있습니다. (요8:34) 마약이나 담배처럼 끊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노력을 하지만 놓아주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나 습관적인 행동에 메이게 하여 끝내는 삶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리버플 주교를 지낸 J. C. Ryle 주교가 남긴 글입니다.
“모든 죄는 손과 발이 사슬에 매인 불행한 죄수들이 무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불쌍한 죄수들이 대단히 자유롭다고 우쭐거리기도 한다. 이런 노예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죄는 참으로 고약한 주인이다. 도중에는 비참함과 실망으로 괴롭히다가, 결국에는 절망과 지옥을 품삯으로 준다.”
3) 죄의 대가 - 형벌 (롬 6:23)
파렴치범들은 반드시 잡혀서 벌을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뿐만아니라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에는 그에 상응하는 형벌이 따라옵니다. 형벌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만약 우리의 죄값을 그대로 받는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형벌을 피할 수 없고, 그 형벌에는 무서운 지옥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4) 죄의 분리 (사 59:1-2)
그 고통을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신 것입니다. 육체적 죽음 뿐만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The Solution)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가 엉망을 만들어 놓은 삶을 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죤 스토트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기 대리”라고 부릅니다. 베드로의 표현의 빌리자면,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ꡓ
<자기대리>// 2차 대전 중 미얀마 철도 작업을 했던 영국군 포로들의 이야기를 쓴 “콰이강의 다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작업 후 삽을 반납하는데 한 개가 모자란다고 모두 죽이겠다는 위협을 합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갔고 매질을 하다가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포로들이 숙소로 돌아간 후 다시 세어보니 꼭 맞았습니다. 그 한사람은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대리도 나왔던 것입니다.
<십자가>// M. Henger은 그의 저서 ꡔ십자가의 처형ꡕ에서 십자가 처형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Persia 사람들에게 배워서 파급시킨 십자가 처형법은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국민에게만 적용되었다고 합니다.
채찍은 가죽 채찍입니다. 물에 퉁퉁 불었습니다. 그리고 마디마다 짐승의 뼈가 날카롭게 꽂혀있습니다. 엄지 손톱만한 납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한번 휘감아 치면 채찍은 온몸을 휘감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을 뽑으면서 살은 찢어집니다. 찢어진 자욱마다 박힌 납, 가시가 박히면서 살점을 뜯어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한번 맞으면 40에 하나 감한 매, 39대를 맞아야 했습니다. 옆구리 쪽으로 내리치면 창자가 쏟아져 나오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주님이 이 채찍을 맞으셨을까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느니라. 나를 치료하기 위하여 아픔을 친히 담당하기 위하여 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그분은 60kg의 십자가 나무토막을 짊어지셨습니다. 간밤부터 맞았던 채찍 자욱이 응고되었다가 터져서 다시 피가 흘러내립니다. 600m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데 한발자욱 쓰러지고 두발자욱 넘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울며 지켜볼 때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로마의 장교들 다 어디가고 떡 먹든 군중들은 다 어디가고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는 어디가고 주님의 12제자 다 어디가고 고관대작들 부귀 영화 분복을 누리던 사람 다 어디가고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시몬에게 이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더란 말입니까?
처형자의 혈관이 뼈가 드러나고, 근육과 힘줄이 끈어지고 창자가 찢겨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매질을 합니다. 얼굴엔 사람들이 뱉은 가래침이 묻고, 뺨을 맞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살아 있을 때에는 십자가에 달린 채로 길가에 방치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롱하게 만들고 죽은 후에는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먹도록 했다고 합니다. 15cm 되는 못을 손목 위 전박을 뚫었고 무름을 옆으로 비들어서 아길레스 건과 결골 사이 발목에 박았습니다. 메단채 땅이 파 놓은 구멍에 끼웠습니다. 조롱과 수치 갈증과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하여 갑니다.
그 소중하신 독생자를 보내셔서, 나 대신 죽음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는 원망의 절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알았어요. 아버지는 내게 이토록 처절한 형벌을 내리고서라도 사람들을 살리길 원하셨군요!"
그 고통의 순간 하나님은 고개를 돌렸고 태양도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6시간 동안 지구는 암흑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워 하나님이 발을 동동 구르셨는지 온 땅이 진동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나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버림받아야 할 자리인 지옥까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곳, 하나님 계시지 않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십자가는 지옥의 축소판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절규는 지옥에서 부르짖어야 될 절규,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죄 지은 모든 인간들이 지옥에서 당해야 될 바로 그 고통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저주는 지옥의 저주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것이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끄럽고 처량했는지 다윗은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왜 이렇게 말 못할 수치를 예수님이 당하셔야 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잘난 사람들을 통하여 법궤를 메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 영화를 누리고, 분복을 누린 사람들에 의하여 법궤가 감당되어지기를 주님이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진 것 없는 사람, 높은데 올라간 경험이 없는 사람, 삶의 환경이 곤고한 사람, 아프리카 사람 구레네 사람 시몬과 같은 나를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 짊어지기를 주님이 원하셨던 것이지요.
그분은 당신의 외아들을 죽이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저주받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외아들을 저주의 자리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제자들의 외면과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아픔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이기에 아버지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친히 대속하셨다 (벧전 2:24)
2) 예수님을 통하여 대속하셨다 (고후 5:21)
3)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속하셨다 (갈 3:13)
4) 십자가는 인간 극치의 고통이다 (마 27:46)
우리가 고통받아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받을 고통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십자가는 우리의 수치를 담당한 대가 지불입니다.
죄는 수치를 수반합니다. 지금이라도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천사들을 동원해서 아무리 오라고 초청하셔도 우리는 절대 못 들어갑니다. 부끄러워서 못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우리의 모습 그대로 가지고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억지로 끌어다가 천국 안에 넣어 놓는다면 사흘 안에 미쳐버릴 것입니다. 부끄러워서 살아 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가져다 준 수치를 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수치와 모욕을 다 담당하시므로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다시 세워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수5:9)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3. 십자가의 결과는 무엇인가? (The Result)
(골 2:15)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 법정에서의 용서 (롬 3:24)
<친구>// 어떤 사람이 아주 중죄를 지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석의 자리에서 재판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판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판사는 여러해 동안 보지 못했던 학교다닐 때의 친구였습니다. 자기 친구는 판사이고 자기는 그 재판석에 죄인으로 서게 된 것입니다. 그 재판은 오래 계속되었습니다. 증인이 와서 죄에 대해서 증언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판사가 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판사와 죄인은 그 자리에서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있는 사람들은 판사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가 하고 기다립니다. 이 사람이 중벌을 내릴 것인가 아니면 가볍게 내릴 것인가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선고를 기다립니다. 판사가 선고를 내렸습니다. 그가 선고한 판결은 법이 정한 가장 중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그 죄수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아주 많은 벌금이었습니다.
이제 그 벌금을 내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청중들은 그 선고가 너무 가혹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자기 친구에게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를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정의의 법정에서 볼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판사가 자기 자리에서 내려와서 죄수가 서 있는 곳으로 가서 손을 내밀어서 그 죄인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 벌금을 자네 대신 물어주겠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벌금도 내고 그 죄인은 자유롭게 해방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공정해야하는 판사는 죄에 합당한 벌금을 불리고 대신 수표를 써 주면서 갖다 주면서 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공의로우신 분이기에 ‘없다고 하자’가 아니라 대가를 치루시는 것입니다. 수표를 건내 주시면서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동남아시아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한 선교사가 그 지역에 이름모를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에 세균을 넣고 미국의 존스합킨스 대학에 가서 자신의 피로 면역체를 개발하게 하였습니다. 고열이나고 통증은 점점 더해갔으며, 결국 그 선교사는 그 병원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의 결과 질병의 면역체를 만들 수 있었고 그것으로 동남아시아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이 선교사의 희생으로 인해 사람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속의 죽음, 대속의 피로 살게된 것입니다. 1) 우리는 더 나쁜 상황입니다. 벌금이 아니라 죽음입니다. 2) 친구 정도가 아니라 자녀를 사라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시며 3) 그 대가는 돈 정도가 아니라, 죄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치루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실 훗날을 내다보면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 이렇게 아름다운 시로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이 왜 찔렸습니까? 예수님이 왜 상했습니까? 예수님이 왜 징계를 받았습니까? 내가 받아야 될 징계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고통입니다. 내가 받아야 될 아픔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십자가에서 주님을 우러러 보는 그 순간을 마음에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2) 시장에서의 배상 (막 10:45)
누군가 큰 빚을 졌다면 갚기 위해서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습니다. 노예는 ‘말을 알아듣는 짐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말은 으응, 옷을 발가벗기고, 음식은 최소한으로, 잠은 마굿간에서, 4발로 기어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될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몸값을 치루고 그를 구한 것과 유사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 대속의 값을 치루셨습니다. 이로서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는 다시는 죄를 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지배력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선물을 얻은 사람은 그 값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인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그 값이 달라집니다. 인생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여러분은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그 값을 따질 때 얼마를 지불하고 그 물건을 샀느냐로 평가합니다. 볼펜은 1,000원을 주고 샀으니 1,000원입니다. 시계는 10만원을 주고 샀으니 10만원입니다. 소중할수록 잘 보관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의 목숨을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으니 우리 값은 얼마가 되는 것입니까? 독생자만큼의 값, 즉 몇 억 짜리가 아니라 "예수 짜리"가 되는 것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이 구원받은 사람, 영생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작품이요, 예수 주고 산 것이니 이 얼마나 값비싼 존재들입니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뿌듯해지고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이제 당신의 값은 예수님만큼 소중해 졌습니다. 예수님하고 맞바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성전에서의 희생 (롬 3:25)
스위스에서 어느날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내리막 길에 들어선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내리막 길에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빠라졌고,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급한 내리막 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는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자,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마을이 보였고 이젠 모퉁이 어디엔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때 마을 입구 도로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피하라고 소리까지 칩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아직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어뭇거립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둘러섰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 하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둬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이예요.”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을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예수! 그분은 바로 당신의 그리스도, 당신의 왕,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4) 가정에서의 화목 (고후 5:19)
기독교 국가들의 국기는 십자가가 들어 있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선진․복지국가입니다. 덴마크의 국기 역시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이렇습니다. 1219년도에 왈뎀카 왕은 군대를 이끌고 이길지 질지 모르는 불안한 전쟁에 나가기 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ꡑ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보였습니다. 왕은 그 십자가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싸운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전쟁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국기를 가지고 나가 승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질병과 싸워 이겨서 건강한 삶을 살고, 가난․저주와 싸워 이겨서 풍족한 삶을 살고, 죄악과 싸워 이겨서 의로운 삶을 살고, 모든 시험․유혹과 싸워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런 축복을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어느 마을이 큰 홍수를 만났습니다. 집은 형체를 찾을 수도 없었고 논과 밭들도 개울창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갈 길도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 마을에 임금님이 잘 지어진 마을을 준비하고 마을 입주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입주권을 받기만 하면 그 마을에 들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 가난한 소년이 오두막에 살고 있었는데 홍수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손이 이렇게 더럽고 냄새가 나는데, 내가 잃은 것은 누추한 집인데, 임금님이 내게 낙원 마을 입주권을 주실까? 그러나 임금님의 자비로움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소년의 손을 꼭잡아 주시며 많이 “추웠구나. 많이 힘들었구나. 어서 낙원 마을에 들어가 행복하게 살아라” 입주권을 손에 꼭 쥐어 주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선한 행위가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내 모습이 거지 소년과 같아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손을 내밀어 그 선물!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받으십시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 마음의 문을 엽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예수님만을 이제 믿고 따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이 기도가 바로 여러분 자신의 기도가 되셨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선물로 받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원받는 길은 이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가득차고 이 교회 안에 흘러 넘치고 이 강단에서 폭포수처럼 흘러 넘치고 불같이 쏟아져도 여러분이 입을 열고 마음을 열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은 이 길! 한 길 밖에 없습니다.
- 진리는 하나! 예수 밖에 없습니다.
닫는 말
존 하워드 요드는 감동적인 말을 했습니다.
'여기 이 십자가에 자기 원수를 사랑한 사람, 자기의 의가 바리새인의 것보다도 더 큰 사람, 한 때는 부유했지만 가난해진 사람,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몽땅 주어버린 사람, 자기를 이용하고 우롱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매달려 있다. 이 십자가에는 바로 이 사람이 매달려 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로 향하는 우회도로가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 나라 그 자체다.'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다가가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임하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나라의 평화, 그 나라의 사랑, 그 나라의 용서, 그 나라의 능력, 그 나라의 사유함, 구원이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맹인으로 살았지만, 영감이 넘치는 찬송가를 많이 남겨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찬송작가 패니 크로스비가 쓴 496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소서/ 거기에 값없이 주시는 보배로운 샘/
갈보리 샘으로부터 흐르는 치유의 시내가 있나이다/
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거기서 천국 가도록 항상 머물겠네.'
십자가에는 은혜의 샘이 솟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복음의 출발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일주일 내내 아니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 그때 그 무리들이/ 나를 위해 오신 주님 /
갈보리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출처 : 행 복 충 전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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