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에 나타난 찬양원어의 의미♬ 찬양은 겉모양 보다 속마음이 중요함을 더욱 더 잘 알려 주는 것은 원어에서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분석할 때 좀 더 쉽게 이해된다. 번역된 언어보다 원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찬양어와 관련된 현재,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적용된 찬양생활의 발자취를 비교 분석해 보면 참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성서에 나타난 찬양의 사람들의 경험했던 그 놀라운 능력의 원동력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나타났던 찬양의 능력과 기적을 왜 이 시대는 놓치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잡아낼 수 있다.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겉으로 나타나는 찬양의 모습에 주안점을 두지 말고 그 찬양이 이루어졌던 배경에 관심을 두고 찬양어와 현, 우리들의 찬양생활과 비교해 볼 때 찬양관이 잡혀진다.
(1) 할랄(halal)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언어, `할렐루야`이다. 할렐루야는 “칭찬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주책없이 굴다”의 뜻을 가진 “할랄”과 여호와를 칭하는 “야”가 서로 합하여 생겨난 합성어로 “하나님을 미친 듯이 찬양합니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할렐루야를 의미없이 사용하는 예가 많이 있다. 분명히 할렐루야의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주문처럼, 인사처럼 “할렐루야!”를 사용하여 문제가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일년에 한 두 번 개최되는 부흥회에서는 더욱 남용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설교자의 설교시, 문구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부흥강사는 “할렐루야!” 하고, 성도들은 아무생각 없이 “아멘!”하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속히 고쳐야 할 일 중에 하나이다. 그 때문에 설교자가 의미하는 “할렐루야”와 객관적으로 느끼는 “할렐루야!”의 의미가 각각 다르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이다. 즉, 설교자는 설교 중 `우리에게 이처럼 놀라운 일을 베푸신 그 분을 찬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의미로 ”그분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라고 사용해야하고 성도들은 `네, 정말 그렇군요. 나도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는 뜻으로 ”아멘!“하고 화답해야 하는데, 무작정 틈이 나면 ”할렐루야! 할렐루야!“ 마치 흥을 돋구는 주술처럼 ”할렐루야“를 남발되고 있다. 혹시 그러기에 요즘 능력이 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어찌되었든 `할렐루야!`는 `성삼위 하나님께 깊은 찬양을 우리 모두 드리지 않겠습니까?`의 의미가 동반될 때 사용해야 하고 성도들은 `나도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 라는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 가슴 깊은 결의에 찰 때 `아멘!`하고 응답해야 하는 것이 성서의 교훈이다. “할랄”의 기본적인 의미는 “자랑”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그 분이 이루어 주시고 이루어 주실 일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마치 청소년들이 그들의 선호하는 연예인에게 박수를 보내며 그를 칭송하듯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를 그 자녀들이 자랑하듯이,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높이는 것이 바로 할랄이다.
이 할랄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구약성서에 모두 99여회나 쓰여졌다. 다른 찬양어 보다 사용빈도 수가 많다. 할랄이라는 찬양어가 시용된 정황을 살펴보기 위해 할랄이 기록된 구절을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또 레위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할랄)하게 하였으니.”(대상16:4)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할랄)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할랄)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할랄)하리이다.”(시56:3,4,10)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할랄)하리로다.”(시84:4)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은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할랄)하리로다.” “해 돋는 데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할랄) 받으시리로다.” (시113:3)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송(할랄)하나이다.“(시116:164)
(2) 야다(Yada), 토다(Towdah), 바락 (Brak) 하나님께 찬양드릴 때, 몸짓 표현을 동반할 때를 일컫는 말들이다. `야다`, `토다`, `바락` 은 어떤 대상 앞에 그가 우월한 가치와 지위가 있음을 몸짓의 표현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쉽게 이 단어들을 이해하려면 `의장대 사열`을 하는 모습을 상기해 보면 곧 이해가 된다. 영국의 의장대는 정말 멋있다. 그 가운데를 지나가는 여왕의 모습은 참으로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렇듯 `야다`는 “두손을 치켜올리다. 두손을 들어 감사함으로 경배하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할랄` 다음으로 성서에 많이 쓰여져 있는 찬양어이다. `토다` (시42:4, 시50:23)는 `야다`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되어 “두손을 들다”의 의미가 있고 `바락` (시95:6)의 뜻은 “경외심으로 무릎을 꿇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신체적인 행위를 수반하는 `야다`, `토다`, `바락`은 이미 한국교회에서는 “몸찬양(spiritual dancing)"으로 교회학교와 일반 예배에 활성화되어 있다.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연스런 춤`이다. 몸찬양은 교회학교에 뿌리박혀 있던 교육적이고 흥미위주에 빠져있던 율동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시각을 눈뜨게 했다는데 큰 결과로 지목되고 있다. 로마서 12:1절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몸의 성별은 믿음 생활의 실제적인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찬양의 삶을 명령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회자들은 율동에 대해 매우 무관심하거나 교육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분이 많은데 그것은 시대에 뒤지는 일 중에 하나이다. 현재 한국교회학교는 위기에 도달해 있다. 그 증거로 첫째, 예배가 무너지고 있다. 도저히 정서된 예배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예배가 엉망이다. 둘째, 어린이들이 기도를 못한다. 기도는 신앙의 진위를 판가름나게 한다. 하얀 종이에 선생님이 써준 기도문을 어린이가 줄줄 읽는다고 그게 기도인가? 진정한 기도는 한 영혼의 하나님을 향한 대화이며 영혼의 호흡이며 절규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네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어린이들의 기도는 사실 그 깊이가 없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위기 중에 위기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가 교회학교에 출석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 지금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더 이상 이 일을 놓치면 한국교회의 21세기는 어느 누구도 보장 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한다. 사실 이 문제는 위의 두 문제의 결과이다. 율동은 1960년대 후반에 한국교회에 적용되었다. 그 이후 폭발적으로 한국교회 교회학교에 활용되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목적보다 유치원에서의 교육 목적을 그대로 도입하여 `흥미위주, 주위집중효과, 학습효과, 놀이의 방편`으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1993년 11월에 `몸찬양` 이 한국교회에 공포되었다. 그 이후 교회학교는 신선한 변화가 일고 있다. 어린이들이 몸찬양을 드리며 하나님을 감각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직접적인 예가 어린이연합부흥집회로 여름과 겨울에 1,200여명씩 모이는 `어린이은혜캠프`의 2박3일 동안 프로그램 중 최고의 프로그램인 바로 이 `몸찬양`이다. 이 아름다운 몸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다. 방언, 입신, 기도의 능력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도 장난하기 좋아하고 까불고 딴청피우기 좋아하던 아이들이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율동에 드러난 문제점을 세가지로 요약해 본다.
1) 율동은 정의가 볼확실하지만 몸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자연스런 춤`이다. 유아교육과가 설치되어있는 대학에서의 율동에 대한 정의는 음률활동으로 창의력 신장, 정서적 반응, 지능발달을 도움, 언어발달을 도움, 신체발달을 도움, 사회성발달을 도움 등으로 매우 선명하고 분명한 교육의 목표와 정의가 내려져 있다. 반면에 교회에서 수년동안 사용되어 오는 율동은 그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 사회교육보다 더 정교하고 분명해야 할 교회에서 말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쉽다. 지금이라도 당장 서점에 나가 율동책들을 훑어보면, 각 사람마다 어쩜 그렇게 율동에 대한 정의가 분분한 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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