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스크랩]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하나님의 섭리(2)

어노인팅 2006. 6. 29. 17:41
Ⅲ. 보이는 허상과 보이지 않는 실체

1. 보이는 허상

우리는 사물에 대한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자신이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생활에서 느낀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상의 만물을 우리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고 규정해나간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이 그야말로 한정된 경험세계에만 적용된다는 그 증거가 있다.
이것은 미시세계에 대한 양자역학적 관점이며 그 관점에서 가장 중심되는 원리가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할수 있겠다.
이러한 원리에 의하여 바라보는 세계야말로 보다 진실된 세계에 가깝다.

미시세계에 대한 관점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어린아이가 그저 TV를 켜고 끌줄 아는 단순작업에 불과했다고 가정한다면 불확정성의 원리와 더불어 미시세계를 상세하게 관찰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TV상자를 뜯고 TV의 내부를 들여다 보는 것과 같으며, TV 내부를 들여다 보다가 내부의 그 복잡함과 신비로움에 놀라 기겁을 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그 중요한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살펴보기로 하자.

불확정성의 원리를 가장 분명한 말로 표현한다면 "미시세계의 물체는 그 위치와 운동량은 모두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을 풀어서 표현한다면 "어떠한 물체가 달릴 때 그 물체가 얼마나 빠르게 달리는지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하여 둘다 정확하게 알기는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운동량' 과 '얼마나 빠르게' 라는 것은 서로 다르지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같이 두자).

그런데 이것이 왜 중요한가?
중요하다.
적어도 전쟁터에서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적군이 미사일을 쏘았을 때 그 미사일이 '얼마의 속도로 날아오는지' 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지' 를 알고 있으면 이쪽에서는 빨리 피해버릴수도 있고 다시 요격용 미사일을 쏘아 격추시킬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두 조건을 안다는 것은 미래를 알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 예측" 이것은 대단한 위력이다.

인간은 미래를 예측할수 있는 힘을 가지므로 인해서 오늘날의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수 있었던 것이다.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의 대부분이 이러한 미래예측을 기반으로 한다.
적어도 과거에는 이것이 가능했고,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는 현재에도 이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이순간도 우리 주변의 물체들이 다음 순간에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버스가 3 분안에 도착할 것을 우리는 알고있으며 다음 모퉁이를 돌면 무슨 건물이 나타날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미래예측에 익숙해져있다.
이세상의 모든 물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데로 미래예측이 가능할 것인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미시세계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미시세계로 우리의 시각을 옮겨보면, 우리들의 일상 경험세계의 상식이 특이현상이 되어버리고 우리들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미시세계에서는 상식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우리들이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이 본래의 실체인가?
아니면 원자들의 세상이 실체인가?
어떠한 것이 진실의 세계이고 어떠한 것이 허상의 세계인가?

단언하건데, 미시세계의 현상이 보다 실체에 가깝다.
실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현상이라는 것은 미시세계의 근사이다.
다시 말해서, 미시세계의 설명방법으로는 미시세계와 우리세계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인간세상의 범상적 언어로는 도저히 미시세계를 설명할 수 없다.
즉, 미시세계의 표현언어가 우리의 언어 보다 고차원적이고 광범위한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일상 생활 언어와 상식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의 경험과 상식이 세상의 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생각했으나 우리의 경험과 상식이 이세상의 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가장 쉬운 예로 물체의 운동과정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운동을 설명할 때, 그것은 연속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물체는 시간의 흐름에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을 한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이다.
너무 평범한 이야기라서 서술한다는것 자체가 이상하게 들릴 정도이다.
그러나 미시세계에서 입자들은 더 이상 같은 방향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A에 있던 입자는 더 이상 연속적으로 운동하지 않고 B 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B 에 있던 입자도 연속적으로 운동하여 C 에 도달하지 않고 갑자기 C 에 도달한다.
이러한 설명방법은 실제 입자의 운동을 매우 저속한 언어로 표현한 것이 된다.
조금 더 나은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나의 입자는 A 와 B 와 C 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표현할수 있으며 이보다 조금 더 실체에 가까운 표현을 쓴다면, 입자는 어떠한 혼돈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우리들이 표현할수 있는 가장 정확한 표현을 쓴다면 '입자의 실재 존재에 대하여서는 알수 없다' 라는 것이다.

이 말은 조금도 과장된 말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이러한 혼란에 대하여 아주 익숙해져있다.
이들은 이러한 혼란들에 너무 익숙하여 다시 이것이 또 다른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면 가장 극적이고 단순한 예를 살펴보자.
하나의 전자가 A 지역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고, B 지역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C 점에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C 지역에서 전자가 존재하여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지역에서도 발견이 되고 B 지역에서도 발견이 된다.
그러면 전자는 A 에서 어떻게 B 로 이동을 한 것인가?
전자는 어떠한 형태로든이 C 지역을 통과할수 없다.
전자는 A 지역에서 있다가 '갑자기' B 지역에 나타난 것이다.
결코 C 지역을 통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들이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서나 볼수 있는 '공간이동'(Teleposition, 생각만 하면 즉시 그 장소로 이동하는 현상 즉, 서울에서 제주도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 즉시 제주도에 도착해있는 현상)을 연상하게 한다.
현실 생활에서는 그것은 그야말로 공상이나 망상일뿐이나 원자의세계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일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벽을 뚫고 이동하신 것은 물질의 이러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현상태의 물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 같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래 인간세계에는 비록 저주가 덮여있는 상태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물질의 본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식 저편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미시세계에서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며 그 크기만 확대해석하면 일상생활의 현상은 얼마든지 설명할수 있다.
따라서 이 미시세계의 관점이 보다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 할수 있다.
미시세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다.
(쌍슬릿 실험의 예는 이러한 관점의 차이를 가장 명백하게 나타내어준다. 그러나 쌍슬릿 실험은 설명의 복잡성과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겠다)

2. 보이지 않는 실체

물질에 대한 실체를 우리의 상식의 틀로서 완전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과 우리자신의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이제 물질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당한 표현으로 살펴보자.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모든 물질은 원자와 전자 등의 입자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 입자들은 우리들의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
이제 우리는 원자와 같은 입자의 실체를 "퀴프" 라고 부르기로 하자.
(퀴프를 파도함수 또는 확률밀도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입자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즉, 알수 없는 어떤 물질의 실체쯤으로 가정을 해두자.
이 퀴프가 번져간다.
그러던 중 A 에서 인간에 의해 관측이 이루어지면 이 퀴프는 붕괴해서 '입자라고 불리워지는' 우리가 인식할수 있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
그러나 A 에서 관측이 이루어지지 않고 B 에서 관측이 이루어졌다면 입자의 실체는 B 에서 입자라는 형태로 나타내어진다.

여기에서 앞에서 살펴본 P 궤도함수의 모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자.
아령모양의 이것은 전자가 어디에 존재할수 있는 가능성인데, A 지역에서 관측이 이루어진다면 D 점에서 이것을 입자로 변해버리고 나머지의 모든 가능성은 "無" 로 변해버리고 만다.
즉, 전자는 관측되어지기 이전에는 A 지역과 B 지역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며 이러한 이유로 전자들은 C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도 A 지역에서 얼마든지 B 지역으로 이동을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명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亞원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 되어질수 없다' 라는 것인데 자! 이것은 사실 흥미를 느끼게하는 말은 아니다.
보다 간단한 말로 다시 이야기한다면, 운동하는 입자가 '어디 있는지'를 알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수 없고,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를 알면 '어디 있는지'를 알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표현마저 물질의 실체를 올바르게 서술한 것이라고 말할수 없다.
'위치'라든지, '운동량', '속도' 등과 같은 말은 물질의 본질을 서술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단어들이다.
즉, 위치라든지 운동량이라는 말자체가 뉴톤의 고전역학적 철학에 그 바탕을 두고있는 말이다.
이것에 대하여 가장 근접한 표현을 한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 될 것이다.

이 물질의 실체라고 가정된 퀴프는 관측이 행해지지 않았을 때 파동의 행동으로 인간에게 나타났다가 관측이 행해지면 입자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은 하나의 퀴프를 서술하는 언어들이다.
이들 언어들은 단지 인간이 인식하기 위한 표현수단일 뿐이다.
굳이 퀴프를 보다 온전하게 설명하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또 하나의 비유가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1884년 Abbott이 빅토리아시대 귀족들의 비리를 비꼬아서 쓴 '평평한 땅'이라는 소설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데 이것을 우리들의 문제에 적용시켜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육면체가 평면과 닿았을 때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이 육면체가 평면의 나라와 어떻게 접속이 되느냐에 따라서 이 육면체는 직선으로도, 세모로도, 네모로도 나타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라져 버리기도한다.
현재 우리 인간들이 세모씨 나라의 국민이라면 퀴프 즉, 물질의 실체는 마치 이 육면체와도 같은 것이다.
평면나라 국민은 본질적으로 이 육면체의 본성을 알수 없다.
다만, 이 육면체가 평면의 나라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에 따라서 그 육면체의 부분적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물질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번째 부류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상식을 초월한 관점이며 이것은 보어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아인슈타인의 관점을 따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관점은 지극히 상식적인 관점이며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비상식적인 이야기들을 모두 부정하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미시세계의 이상한 현상을 지극히 상식적으로 설명한다.
미시세계의 기이한 현상은 아직 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해서 물질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과학만 발달하면 얼마든지 물질에 대하여 완벽하게 이해할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시세계에서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수 없다' 라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나타낸다.
'아니다. 어떠한 다른 수단을 사용하면 아무리 원자 이하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수 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전자들의 공간이동 등과 같은 것은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관점 차이는 '국소성의 원리'와 '비국소성의 원리'라는 말로 분수령을 이룬다.
국소성의 원리란 어떠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다른 장소의 사건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철수가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순이가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국소성의 원리는 철수가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과 순이가 학교에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 관계가 있으며 서로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이 예는 정확한 예가 아니며 본래의 정확한 예를 든다면 EPR파라독스를 예로 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아인슈타인의 국소성의 원리가 옳지 않다는 실험결과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보어의 관점에 따르는 이론들은 그 실패와 좌절을 모르고 계속 발전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상식은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지 보어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보어의 생각) 사실이요 보편적 상식보다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자연은 극히 비상식적이다.
괴롭지만 자연의 웅대함과 기묘함은 우리 인간의 작은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간이 돌도끼로 사냥을 할 때부터 자연은 비상식적으로 인간의 생각을 초월해서 행동하여 왔다.
우리가 원하는데로 자연은 행동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한마디로 과학의 붕괴요, 상식의 기만이며, 결정론의 소멸이다.
만물의 영장이고 자연의 정복자라고 자처하는 인간에게 최대의 절망과 아픔 그리고 한계를 던져주는 사건이다.
이제까지 TV를 켜고 끌 줄 밖에 모르던 어린아이는 자신은 TV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마음대로 TV를 조작할수 있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TV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TV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의 기능만 가진줄로 생각했으며 그래서 이 어린아이는 TV의 진실을 자신의 지식으로 제한하여 버린 것이다.
고도의 TV 기술자가 이 어린아이를 보았다면 얼마나 우스웠겠는가?
아무리 어린아이가 TV의 능력과 고도의 기술집약품이라는 것을 무시하였다 하더라도 TV는 여전히 TV이다.

이제 어린아이가 자랐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TV의 내부를 들여다보자 이러한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기능면에서도 자신이 몰랐던 것이 너무나 많이 있었으며 더욱이 원리적인면에서는 도저히 알수 없다는 것을 조금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는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는가를 몰랐으나 이제는 무엇을 모르는가에 대하여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이 마치 이와 같은 상황에 있다.
과거에는 뉴톤의 과학만 믿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그 뉴톤역학은 자연의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오늘날은 자연의 궁극을 알수 없다는 것을 불확정성의 원리를 힘입어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 가지 사상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철학과 사상에 그리고 일반대중의 생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상의 흐름은 수백년간 우위를 지켜오던 서구의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이 이제 원초적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거대한 소리를 내면서 사상의 대륙전체가 가라앉는 것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그에 반하여 새로운 사상과 철학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조화를 강조하는 생각들이 융기하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의 지각 변동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대변혁을 통하여 일으킬 것을 일으키시고 낮출 것을 낮추시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계속 전해지게 하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를 생각해 볼 때가 이른 것 같다.

Ⅴ. 하나님의 섭리

1. 양자역학적 세계관의 의미

이상에서 우리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 양자역학적 기본 철학을 대충 살펴보았다.
그러면 이제 이러한 내용들이 과연 우리 현대인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내지는 기독교인들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양자역학적 세계관의 가장 중심에 불확정성의 원리가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라는 말과 '불확정성의 원리'라는 말을 거의 동격으로 사용할 것이다)

먼저 일반적인 의미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양자역학적 세계 즉, 불확정성의 원리는 비인과론적이다.
인과론적이다 함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며 원인을 보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대부분의 현상들은 모두 인과론적이다.
하나의 예외도 찾기가 힘들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온다는 말이다.

오래 전 과거에는 그 원인을 몰랐던 천둥이나 번개도 알고 보면 공기 중에 있는 하전입자의 충돌과 그로 인한 공기 진동이 원인임이 밝혀졌다.
인간들은 원인들이 희미했던 현상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가면서 그 인과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인 영역 외에는 세상의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인과론은 적용되어진다.
원시시대부터 인간에 자연을 정복하는데 자신감을 주었던 이 인과의 원리가 이상(異常)이 생긴다는 것은 대단한 위협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는 여전히 인과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 같지만 미시세계에서는 더 이상 이 인과의 원리가 적용되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야기해서 콩 심은데 콩이 날 수도 있지만, 팥이 날 수도 있고, 수박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콩 심은데 콩이 난다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인과원리의 붕괴는 미시세계에만 적용되어지고 있으며 인간 생활에서는 여전히 인과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인과의 원리가 모든 분야에서 엄격히 지켜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시세계에서는 비인과적인 현상이 오히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미시세계의 이러한 현상 때문에, 인간이 절대적인 원리로 신앙하고 있던 인과론은 한정된 장소에서만 적용되어진다는 것이 밝혀진 셈이다.

둘째로, 불확정성의 원리 및 양자역학적 세계관은 인간이 탐구할 수 있는 미시적 한계를 분명히 설정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현재 알 수 있는 크기는 얼마인가?
현재 미시적으로는 플랑크 상수 이상 또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제한하는 크기이고 거시적으로는 잠정적 우주의 크기인 150억 광년 정도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얼마나 작은 미세구조를 지니고 있고 얼마나 큰 규모로 되어져 있는가?
아무도 이 물음에 답할 수 없다.

플랑크 상수 이하의 세계에서는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천둥이 치고 있는지 번개가 번뜩이고 있는지 알아볼 길이 없다.
거시적으로는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생각할 수 있는 크기가 150억 광년이라는 것이지 실제로 우리 우주의 크기가 150억 광년 정도의 크기를 가졌다고 규정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 작은 것도 알 수 없고 너무 큰 것도 알 수 없는 중간 지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불확정성의 원리는 미시세계를 더 이상 자세하게 알 수 없도록 하는 금지선 과도 같은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파기하지 않고는 플랑크상수 이하의 세계를 관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불확정성의 원리는 인간 관측의 한계를 분명히 제시해 주고 있다.

셋째로, 이러한 양자론적 세계관은 다분히 非과학적이며 反서구적이라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용어는 서구에서 발생되었다.
그리고 서구의 정신이 깊이 베어져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가 근대화, 현대화되었다.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사회의 대부분이 모두 서구화되었다는 것이다.
"현대화=서구화"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로 오늘날의 세상은 서구화 일색이다.
물론 부분적으로 자기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러면 이러한 서구화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과학문명'과 '합리적 사고'에 있다.
서구인들은 합리적 사고와 과학적 무기 그리고 생산수단을 통하여 철저하게 전세계를 서구 화시켰다.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 생각이 첨단의 무기와 대규모의 생산수단을 같도록 만들었으며 이것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준 것이다.

오늘날 일찍이 과학문명에 눈뜬 서구의 여러 국가들은 선진국의 위치에 있으며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여전히 후진국으로 남아있다.
이제 서구의 정신이 세계의 정신이 되었으며 서구의 사상이 세계의 사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러한 서구적 사상과 과학적 바탕의 가장 핵심 부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균열은 점점 커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서구의 사상을 파괴시켜 버렸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장본인이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이며 양자역학적 세계관인 것이다.
다분히 인과론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서구의 사상 핵심 부분에 비인과론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인 요소가 등장한 것이다.
양자론은 과학 중의 과학이요 서구적인 것 중에 가장 서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였으며 더 이상 합리적이기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더 이상 서구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비과학적이요, 비합리적이며 반서구적이다.
즉, 동양적인 것에 오히려 더 가깝다.

하나는 철저하게 수학적인 바탕위에서 출발하였고 하나는 철저하게 종교적, 사상적 바탕위에서 출발한 것인데 어떻게 이 두 세계관이 비슷한 모양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유사하다면 무엇이 유사하다는 말인가?
불확정성의 원리나 양자 역학적 세계관이 어떻게 동양적일 수 있는가?
진실로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와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두 세계관의 유사성

가장 서구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연구의 결과로 등장한 양자론은 지극히 비서구적이고 비합리적인 이론이다.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그 비합리적인 논리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론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보어와 양자론의 대가인 파이먼은 이러한 말을 한적이 있다.

양자론을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아직 양자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 보어 -

그러나 아직 양자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파이먼 -

이 두 말을 풀어서 생각해 보면,
양자론은 매우 놀랍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지금까지의 상식이나 과학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양자론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새로운 세계관과 새로운 철학을 요구하고 있다.
그 새시대의 새철학이 동양에서는 널리 알려져있는 일반적인 사상들이며 보편적인 생각세계라는 것이다.
확실히 양자론과 동양세계의 세계관은 유사하며 서로 일치하는 면이 상당히 많다.

보어가 중국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보어는 새로운 과학 체계를 뒷받침해 줄 철학과 사상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양자론을 뒷받침해 줄 이론이나 사상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보어는 태극사상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것의 철학세계가 양자론과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뒤 많은 과학철학자들에의해 이 두 세계관의 유사성은 신중하게 연구되어졌으며 오늘날에는 거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질이 유사한지 살펴보자.

첫째는 상보성이다.

상보성이라 함은 '상호보완적인 성질'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보어가 양자론을 양자론이라 부르지 않고 상보성 원리하고 부르자고 제안한데서 기인한다.
위치와 속도(운동량), 시간과 에너지 등은 서로 상호 보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음과 양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의 궁극(태극)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성질을 띠는 것이다.
상호 보완적인 것은 양자론의 기본성질이며 이것은 음과 양이 조화되어지는 태극사상과 유사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 두 세계관이 유사한 점은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점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적 세계관 및 사상에서는 사물의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그것이 지니는 내면의 모습을 본질적인 존재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도교나 불교 사상에서 그 극치를 이루며 그것은 다음의 말들로 압축된다.

道可道 非常道
色卽是空 空卽是色

도가도 비상도라는 말은 도를 도라고 말해 버리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도를 말이나 언어로 표현하기에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표현 범위가 너무나도 한정적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양자론의 상황과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
전자의 위치에 대하여 그곳에 전자가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전자는 이미 그곳에 있지 아니하며 전자를 입자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본질적 성격을 감추어 버리고 만다.
전자를 두고 '입자이다', '파동이다'라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 규정된 언어만큼 전자의 부분적인 모습을 알 수는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은 영구히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도를 도라고 규정하면 이미 도가 아니듯이 전자를 전자라고 규정해 버리면 전자는 더 이상 전자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양자적 세계에서는 존재와 비존재가 모호해진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을 생각나게 한다.
미시세계에서는 물질이나 질량을 에너지로 표기하며 질량과 에너지를 동급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거시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 의하면 질량은 존재이고 에너지는 비존재이다.
미시세계에서는 이 존재와 비존재가 동격이 되어 버리고 에너지 자체도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현실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갑돌이가 길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갑돌이가 두 명이 되었다가 다시 한 명의 갑돌이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거시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미시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고 없는 것이 있는 것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양자론과 동양 사상은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점에서 두 세계관은 서로 닮아있다.

3.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복음이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한 지역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핍박이라는 극한적인 방법을 통하여 흩으신다.
하나님의 자녀를 강제로 흩으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일대로 복음을 전파하실 때도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셨고, 종교개혁 당시에도 부분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으며, 미주 대륙으로 복음을 전파하실 때도 하나님은 이 방법을 사용하셨다.
이러한 방법 외에도 하나님이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이 또 있다.
그것은 문화와 문명의 이동이라는 비교적 온화한 방법이다.
핍박을 통한 방법이 급진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이라면 문화 이동을 통한 방법은 온화하면서도 대규모적인 방법이다.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문화와 문명이 전달되면서 복음이 함께 전달되는 것이다.
물론 복음 전파의 원동력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운동력이다.
그러나 그 외형적인 모양은 문화의 이동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지중해 일대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유럽이 복음화되는 것도 이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쇄술의 발달이나 교통 수단의 발달이 이루어졌을 때 복음이 비교적 빠르게 전파된 것이다.
그리고 미주 대륙의 청교도 문화가 대륙 전체에 전파된 것도 일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복음 전파의 물결은 이전보다 대규모적이고 강렬하다.
전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동양에 살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복음을 제대로 접해 보지 못했다.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이 암흑의 땅에도 복음을 전하실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이제 그 때가 임박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유럽과 미주 대륙의 틈에 끼여 대부분 식민지를 경험했던 동양 세계는 이제 점점 그 세력을 키워서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으며 세계 어디를 살펴보아도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곳은 이곳 뿐이다.
이제는 오히려 유럽과 미주 대륙이 동양 세계의 눈치를 보아야하는 상황으로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어 갈 것이며 또한 세계의 중심 축이 이동되어 간다는 것을 뜻한다.
즉, 세계의 경제적 중요성이 서구에서 동양 세계로 이전되고 있으며 정치적, 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의 사상이 퇴조하고 동양적 사상이 융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음도 서구에서 동양으로 촛대가 옮겨지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문화와 문명, 사상의 이동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구도 속에 양자론과 불확정성의 원리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양자론도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론이 오늘날 현대 문명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양자론의 발전 없이는 오늘날의 현대 문명은 불가능하다.
라디오, 텔레비젼, 인공위성, 각종 통신수단, 컴퓨터 등 거의 모든 것이 양자론의 이론적 바탕 위에서 만들어 졌다.

이와 같이 양자론은 현대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에 못지 않게 영향을 준 것이 있다.
양자론은 인간의 생각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자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인과론도 포기해야 하고 어쩌면 애매 모호하고 공상소설같은 사실들을 진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바닷물에 민물고기가 살 수 없고 강물에 바다고기가 살지 않는다.
축구선수에게 야구를 하라면 타율이 좋을리가 없고 야구선수에게 축구를 하라면 공을 휼륭하게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과학적체계가 합리적이고 수학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을 때 이에 적합한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었지만 과학적, 철학적, 사상적체계가 신비적이고 종교적이며 또한 동양적인 모습을 갖추었을 때 이에 익숙한 사람들이 힘을 얻을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인간의 생각과 사고가 어렸을 때는 자연현상들이 인간의 지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전보다 발전된 도구인 양자론으로 자연을 보았을 때 자연은 인간의 상식과 이해의 선을 훨씬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된 것이다.
이것은 서구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의 퇴조를 뜻하는 동시에 동양적, 신비적 또는 종교적인 성향의 사상이 부상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적 경향과 철학적, 사상적 경향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데 생각세계의 성향마저 과학적 경향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경향이라고 보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너무나도 분명하다.
이것은 복음을 동쪽으로 전하시려는 하나님의 준비작업임에 분명한 것이다.
복음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하나님은 문화와 경제, 철학, 사상, 과학의 중심을 이동시켜 복음이 자연스럽게 전파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복음이 이 모든 이동의 중심이고 그 나머지가 주변 여건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양자론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자리잡고 있고 이 양자론의 일반적인 의미를 살펴본다면, 인과론의 부정, 물질 세계의 본질, 존재론의 재고 그리고 사상적 전이 등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철학적, 사상적 중심이 서구에서 동양중심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복음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되는 시대적 흐름에서, 양자론은 과학과 사상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되게 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출처 : 하나님(Logos)의 존재와 속성을 아십니까?
글쓴이 : 찬바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