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스크랩]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 강의안-1

어노인팅 2006. 6. 29. 15:17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자

권 기호 

1. 서론; 하나님을 아는 삶의 중요성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요? 라고 누군가 질문을 내게 한다면 저는 한마디로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라고 다시 묻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들이 지음 받은 목적중 하나이며, 또한 우리들이 영원토록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삶을 구원과 거의 동일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통과의례가 아닙니다. 천국 문을 통과하는 열쇠나 비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말씀을 드리면 결혼은 결혼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결혼식이라는 것은 결혼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결혼이란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고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이라는 것도 구원 파처럼 몇 월, 몇 일, 몇 시에 한번 천국 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알아 가는 전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을 말합니다. 물론 구원은 결혼식과 같이 한번의 믿음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의 준 말로 영원히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한번 얻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복음 15장의 말씀처럼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 나무의 생기가 계속해서 올라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알 때에만 그분과 일대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그분과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본질을 알고 이해해야 합니다.


눅15장 11절에서 32절 말씀을 읽어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나누어 받고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유대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돼지를 가장 불결한 짐승으로 생각하는 유대인이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는 것도 어렵지만 돼지를 치면서도 마음대로 먹지 목하고, 돼지처럼 쥐엄나무 열매를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집을 생각했습니다. 자기 집에는 많은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돼지를 치는 것이 아니라 소와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도 하지만 마음껏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써 일할 마음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상거가 아직도 먼데 벌써 먼 거리에서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누더기 옷을 벗기고 가장 좋은 새 옷을 입혀주고, 발에는 신발을 신겨 주고, 손에는 아들을 상징하는 반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여기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제 성경의 내용을 뛰어 넘어서 그 다음의 얘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눅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서 탕자는 그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첫째: 그날 잔치가 열리고 오랜만에 음식을 마음껏 맛있게 먹었습니다. 잔치는 늦게까지 계속되었고 늦은 시간에 사람들이 돌아가고 탕자는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어제 저녁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는지 -아버지가 자신을 받아 주실까? 아버지가 문전박대는 하지 않으실까? 버린 자식이라고 종으로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어디로 갈까?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아들로 다시 받아 주시고 잔치까지 열어 주셨습니다. - 잔치가 끝나고 아버지는 아들의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편안히 쉬고 내일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들은 방에서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을 내가 갚으리라. 내 이 한 몸을 받쳐서라도 아버지의 은혜를 꼭 갚고 말리라. 아들은 다음날 새벽 눈을 뜨자 말자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오셔서 그렇게 일하면 몸이 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아버지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허랑방탕한 재산을 다시 모아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식사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죽기 살기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 너무 식사도 하지 않고 밤 낯으로 일하던 탕자는 그만 1주일 만에 죽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는커녕 아버지에게 더 큰 아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제까지 피곤에 지친 몸이 아주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의 방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호통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너를 아들로 받아 주고 잔치까지 베풀어 주었으면 너도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니? 그런데 첫날부터 늦잠을 자다니 정말 너는 쓸모가 없는 놈이구나.” 아들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많은 일들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에게 밥도 주지 않고 일만 시킨 것입니다. 종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라. 네가 탕진한 돈을 다 갚기 까지는 쉴 수가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열심히 일했지만 아버지의 요구를 다 들어 줄 수 가 없었습니다. 그는 종들보다 몇 배 더 힘들게 일하면서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요구는 더 많아지고 아들은 그것들을 다 감당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그때 마다 한탄을 하시면서 아들에게 죽도록 충성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너무 많은 요구와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늘 갈등하고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죽은 것입니다.


세 번째: 성경에 나오지 않는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저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밖에 모릅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이단입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비유일 뿐이지 그 다음의 일들은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다음날 아침 아들이 잠자리에 깨어나지 않자, 아버지는 잠자는 아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들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맛있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먼 나라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누면서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일터로 나가서 아들이 없는 동안 새롭게 구입한 땅과 새롭게 태어난 양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너무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식사 때도 아버지와 함께하고 일을 할 때도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그는 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와 대화하고 교제하고 아버지와 함께 모든 일들을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이후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제입니다. 사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이해는 어떠하십니까? 혹시 일번처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갑기 위해 당신밤낮으로 일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의 일을통해


그런데 요17:3절 말씀을 주시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새 언약을 주시면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 함께 그 말씀을 읽어봅시다.

[렘 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러면 이 말씀의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이 되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예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레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의 백성이 절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이겠다고 약속해 주고 계십니다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수전도단의 모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하자(To know God and To Make Him Know)입니다. 국제 예수전도단의 설립자인 로렌 커닝햄목사님은 어느 날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보았는데, 환상 가운데 전세계의 대륙이 보이고 파도가 점점 밀려들어 마침내 모든 대륙을 덮게 되었는데 그 파도는 젊은이들로 변화여 모든 대륙을 덮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환상은 사11:9절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 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물이 바다를 덮는 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물이 바다에 가득할 때 빠짐이 없다는 말입니다. 바닷물이 덤성 덤성 육지를 덮을 수 없습니다. 바닷물은 모든 땅위에 빽빽하게 덮고 있습니다. 한곳이라도 물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한곳도 빠질 수 없습니다.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고 넘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전 때문에 현재 국제 예수전도단은 일만 명이 넘는 간사들과 세계 140여개 국에서 450개 이상의 지부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예수전도단도 400여명의 간사들과 200여명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아는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성장을 한다면 하나님을 의뢰하는 올바른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럼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핵심이라는 말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내가 가장 많이 시간과 재정을 투자하는 것

  -나의 마음과 관심이 가장 많이 가는 것

  -나의 대화 중 가장 많이 말하는 것?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안다(To Know)의 두 가지 의미


그럼 성경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거나 예수님에 대해서 쓰라고 한다면 한 줄도 쓸 수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을 믿어 구원을 얻었기에 그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안다는 말은 두 가지 다른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2-1. 지식적인 앎

[마 24: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여기서 말하는 “아나니” “알라”는 말씀은 어떤 앎을 말할까요? 예 바로 어떤 사실을 지각을 사용해서 깨닫는 것을 말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적인 앎을 공부를 많이 하거나 인생을 오래 살거나 책을 많이 보면 깨닫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겨울입니다. 3월이 되면 봄이 올 것입니다. 그리고 6월이 되면 더운 여름이 오고 10월이 되면 다시 가을이 오고 12월이 되면 다시 겨울이 오겠지요. 녹음이 짙어 가면 여름이 오는 줄 아는 앎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2-2. 인격적인 앎

그러나 성경은 또 하나의 앎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고 참 두렵게 읽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22절에 ‘그날에’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가 언제 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이지요. 그럼 어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나요. 어쩌다 한 두 명 잘못된 이단에 빠졌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22절에 많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들이 한 일들을 정말 주님이 모르셨을까요? 사람들이 자기들이 한 일들을 주님에게 말해 주었지요. 우리가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않았습니까?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야 그런 일이 있었느냐? 내가 기억이 안 난다. 미안하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보자. 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밝히 다른 말로 명확하게 영어성경 I never knew you. 내가 도무지 알지 못한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이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였는데 자기들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자기들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자기들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였는가? 아니다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였다. 그럼 또 다른 이해로 주님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선지자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 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는 것이 불법인가? 그럼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불법을 행치 않는 것인가? 아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막16:17~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약속해 주셨다.


우리가 만약 이 사람들에 속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으로 우리는 왜 이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 못했는지 이유를 깨닫아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가장 위험한 것 중에 하나는 한 구절씩 떼어 내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해석을 하다가 이단들이 생겨난다. 그럼으로 우리는 성경의 문맥을 잘 파악하고 문맥 속에서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시는 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 이 구절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가? 15절에서 시작해서 27절에서 끝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전체의 내용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그럼 어떻게 거짓 선지자를 알 수 있는가? 똑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주님은 열매를 보고 알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얼마다 주여 주여 하며 큰소리를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얼마나 기적을 많이 행하는 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종자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종자가 나쁜 열매는 아무리 나무가 좋아 보여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가지의 문제가 생긴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쓴다면 우리는 그 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것을 금방 알 것이다. 그런데 똑 같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도 다니고 기적과 이적까지 행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어떻게 그 사람이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참 포도나무인지 예수님과 떨어진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아마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죽어 천국에 가기까지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재판장이시다. 그것도 조금도 불의나 모르는 것이 없으신 분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계신 재판장이시다. 그럼으로 그분은 우리를 아실 뿐 아니라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신다. (시139:1~10절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으시다. 생각까지도 아시고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계셔서 아신다.)


그런데 왜 본문에서는 모른다고 하셨는가? 그것도 밝히 명백하게 도무지 모른다고 하셨는가? 그럼 정말 주님이 모르셨는가? 아니다 알고 계셨다 그분은 그들이 불법으로 행한 것을 알고 계시지 않았는가? 여기서 안다 모른다는 말은 1번에 지식적인 앎과는 다른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안다는 단어의 의미는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아는 삶을 말한다. 즉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행하는 일은 다 불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주님은 아는데 주님이 나를 모른다면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없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과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뜻대로 하지 않을 수 있다. 마지막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내가 세상에서 이런 일을 했습니다. 자랑을 하려고 하겠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책망하실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이 24에서 27절에 기록되어 있다.

<마7:24-27>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주님이 어떻게 행하라고 하시는가? 정말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들인가? 첫 번째: 듣고-들어야 한다. 행하기 전에 먼저 들어야 한다. 두 번째는: 행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어떤 자인가? 듣고도 행치 않는 자들이다. 그런데 본문에 감추어진 또 한 종류의 어리석은 자들이 있다. 누구인가? 듣지 않고 행하는 자들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초가 없이 즉 듣지 않고 행하였다는 것이다. 듣지 않고 행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무너짐이 심했다는 것이다. 쌓은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너짐은 심해진다. 삼폰 백화점이 그렇게 해서 무너졌고, 얼마나 많을 사람이 죽었는가? 성수대교가 그랬다 멋있던 그 다리가 무너질 때 많을 사람이 희생되었다. 왜냐하면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무너짐만 심해 질 수 있다.


우리는 기초(파운데이션)가 보이지 않는다고 등한히 할 수 없다. 행동(액션)도 중요하지만 기초가 없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무너짐이 심할 것이다. 주님이 하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는데 주님께 듣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한 일이 어찌 불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본문처럼 오늘날에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불법들을 행하고 있다.

 

지혜로운 자

어리석은 자

불신자

불법을 행하는 자

듣  고

O

O

X

X

행  함

O

X

X

O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할 때는 우리는 막연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Knowledge about God) 또 하나의 앎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면서 하나님 그분을 아는 인격적인 교제로 아는 앎이 있다. (Knowledge of God)

시 34:8에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 하나님은 선하시다 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말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는-심지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 조차도-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about) 아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 그분 자신을 (He Himself) 아는 사람은 적습니다.

 

 

성경 속에서 안다는 단어를 연구해 보면 이것을 더 명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속에서 안다는 단어는 야다(     )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처음 나오는 곳을 살펴보면 창4:1절에 동침하다.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으로 넘어오면 마1:25에 동침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졌는데 기노스코(           )라는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는 안다(Know)는 뜻인데 성관계의 완곡어법으로 즉 정신적으로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부 관계 속에 많이 쓰이고 성적인 교제의 의미뿐 아니라 전인격적인 나눔을 의미한다.

 

다음에는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과 하나님을 몰랐던 성경의 인물을 공부해 봅니다.

출처 : 몽골예수전도단(YWAM Mongolia)
글쓴이 : 몽골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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