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스크랩] □ 영적도해 전 조사 내용 □=오순절훈련원

어노인팅 2009. 3. 13. 12:55

※ 예전에 영적도해 강의시 자료로 나눠드렸던 인쇄물의 제목만을 추려보았습니다.  제목을 중심으로 자료를 모아둔다면, 영적도해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시길...살롬!
 

□ 영적도해 전 조사 내용 □


1. 일반정보
1) 지역의 유래
2) 주요 변천사
3) 지리적 위치
4) 면적 및 인구, 시의 상징
- 면적, 인구 : 년도별 자세한 통계
- 시의 상징 : 심볼마크, 시목, 시화, 시조... 및 의미
5) 기후
6) 현 정치적 상황
- 시장, 국회의원 당적 분포등..
7) 종교
- 종교별 교당수, 교직자 수, 신도수, 비율 등....(통계일자 표시)

2. 경제
1) 직업 및 주업
2) 1인당 생산수준
3) 경제 상태
- 주요 산업, 시 재정 등..

3. 생활 조건
1) 생활 만족도
2) 도시계획
3) 도로교통

4. 사회와 문화
1) 매스컴(방송사, 신문사)
2) 지역 주민의 갈등(문화적 특징)
3) 사회적 정체성
4) 문화 축제
- 축제별 특징과 유래, 의미, 분포도, 문화행사들..
- 지역 소개 소책자..

5. 어린이 / 청년
1) 교육 / 학교 형태
2) 그밖에 교육 및 학교등에 관련한 특징들

6. 종교
1) 종교 현황
2) 정령숭배 (지역의 종교적인 특징에 맞게)
3) 주요 사찰별 세부적인 역사 등 조사
4) 지역의 주요한 산(山) 등 조사
5) 묘지 조사

7. 기독교 상황
1) 교인수
2) 기독교 전래사

 

 


□ 영적도해 예제 □

광주광역시 영적도해

 

 

 

 

 

 

 

 

 

 

 

/ 정길영 / 이철규 /
/ 하성일 / 김성근 / 차진호 /

 

 

1997.  5.  7.

 

 

 

오    순    절    훈    련    원
1. 일반정보
1) 지역의 유래
광주(光州)는 빛의 고을이다.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처음으로 쓰게 되었지만 그 연유는 알려진 바는 없다.  빛은 곧 광명이다.  이 광명이념은 우리 민족의 고유신앙이요, 정신이며, 기본철학이다.  이와 같은 광명이념이 광주고을에 살아있다해서 '광지주(光之州)'라 한 것이다.
광주를 백제때는 무진주(武珍州), 통일신라때는 무주(武州)라고도 했다.  이는 당시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을 무악(武岳)이라 불렀기 때문이라 한다.  또 한때는 서석(瑞石)이라 부르기도 했다.  서석이란 우리말의 「선돌」이다.  천연 그대로인 무등산의 입석대와 서석대는 금강산의 백탑.수미탑과 더불어 「선돌」로써 옛부터 신성시 되어 왔었다.

2) 주요 변천사
광주 지방에 사람이 살았다고 믿어지는 시기는 마한시대로 추측된다.  마한은 기원전후에서 백제의 근초고왕때 마한의 잔여 세력이 토벌당하는 AD 4세기 까지 4,5년 지속되었다.
백제 시대때 광주는 무진주라 불리웠으며 당시 백제의 해상세력을 형성한 중요거점이 된 무진(武珍), 나주(螺舟), 영암은 지정학상으로 볼 때 일본이나 중국과의 교류를 쉽게 할 수 있는 중요교통로라는 점에서 광주(光州)는 문물교역의 요지였을 것이라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도독을 두었고 무주 또는 무진주로 명칭된 것으로 보이며 견훤이 무진주에 근거를 두고 기병하여 후백제에 속하기도 했다.
이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23년에 무주를 광주로 개칭하고 도독부를 뒀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도에 좌도·우도가 있었는데 광주는 좌도에 속했으며, 1893년 전국이 13도로 조정됨에 따라 전라도가 전라남북도로 분할되면서 전라남도 수도가 됐다.  고려시대에는 주(州)에서 부(部)로, 조선시대에는 군(郡)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복구되는 등의 여러차례의 변화를 겪었는데 이는 광주 토호의 세가 강하여 이를 억제하고자 취한 조치인 듯 하다.
1986년 11월 1일에는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광주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96년말 현재는 5구 94동 7출장소로 운영되고 있다.
이제 광주는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민주의 선진시, 건전한 새광주」건설을 목표로 서남해안시대를 선도하느 교통·정보통신 및 첨단산업의 중추도시, 세계적인 문화예술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3) 지리적 위치
광주의 수리적위치는 극남점이 광산구 신장동 도창마을로 나주군 산포면과의 경계지역이고, 극북점은 북구 우치동 용강부락 서북쪽 1km지점인 용산천병이다.  또한 극동점은 북구 충효동, 비성골 동부로 담양군 남면과의 경계지점이며, 극서점은 광산구 내산동 석암부락으로 함평군 나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지리적위치로서의 광주는 국토 3각 정점의 한 정점이며, 서남권의 중핵으로서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고아주를 기점으로 하여 나주·무안·목포를 잇는 고아목선, 영암·해남·완도를 연결하는 광완선, 그리고 영광·고창·부안을 연결하느 srhkd부선등 6개 방향의 중심축으로서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등 제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하고, 광주의 발전과 개발이 곧 서남권 전역의 발전과 개발로 연결되는 국토로서 중추관리기능도시로써의 역할과 사명을 가지고 있다.

4) 면적 및 인구, 시의 상징
- 면적 : 50132km2
- 인구 : 1,302,261명
1935년 5만명에 불과하던 광주의 인구는 1949년 시로 되면서 14만명으로 증가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들어 증가세가 가속화하여 1959년에는 30만명을 넘어섰고 88년에는 100만명을 초과하였으며 96년말 현재에는 130만명에 이르고 있다.
- 시의 상징
▷ 심볼마크 : 광주(光州)라는 한자의 형태를 뜻하고 8개의 청색무늬는 연필의 형태로서 예술과 교육의 도시, 그리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상징하며 전체적으로 팔방의 기운이 광주로 응집되고 그 힘의 빛으로 승화, 전국으로 발산되어 빛고을 이라는 의미부여와 함께 호남의 웅도로서 국토서남권의 중추 관리기능도시임을 강조한다.
▷ 시목 - 은행나무 : 나무가 미려하고 청량감을 주며 수명이 길어 거목으로 성장함으로 광주의ㅡ 기개와 무궁한 발전을 상징
▷ 시화 - 철쭉 :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에 자성하는 꽃으로 은은하고 따뜻한 꽃 색깔은 광주시민의 후한 인상과 다정다감을 상징
▷ 시조 - 비둘기 : 평화를 상징하는 길조로 화합과 안정을 추구하는 광주시민의식을 상징

5) 기후
광주지방의 기후 특성은 서해안형과 내륙형의 중간형으로 대체로 서해안형에 가까운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겨울에는 아세아대륙으로부터 한냉한 대륙성고기압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추운 날시이며, 여름에는 북태평양고기압의 영향을 받아 무덥다.  봄·가을에는 중국에서 이동한 이동성고기압의 영향으로 대체로 건조하고 맑은 날씨가 많다.
1933년도 광주지방의 연평균기온은 13.1℃, 연 총 강수량은 1372.1mm로 예년에 비해 평균기온은 약 0.1℃ 정도 낮았고 강수량은 15.3mm가 많았다.  그러나 4월경에는 강수량이 적어 생활용수 및 농업용수의 부족현상이 있었으며, 6월경에는 찬 오오츠크해 고기압의 확장으로 장마전선의 활동이 약화되어 강수량이 적다가 오히려 7,8월에 세력이 약화된 대륙성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고 기압골의 영향으로 비가 오는 날이 많았고 이로인해 저온현상이 나타나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었다.  또한 1993년 3월 1일 전북 정주시 북동쪽 약 2.0km 지점에서 규모 3.8의 지진이 발생하여 광주·전주·대전·군산지역등에서 진동을 느꼈고, 일부지역에서는 건물이 흔들리고 실내에 놓여진 물체가 흔들림을 느낄 정도였다.

6) 현 정치적 상황
송언종(宋彦鐘) 시장과 시의회 의장등이 국민회의 소속이고, 국회의원의 당적분포 (국민회의 25, ...)
광주시민들은 광주항쟁을 민주화를 향한 열망의 몸짓으로 규정하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송시장은 5·18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5·18묘역을 국립묘지로, 5·18관련자들을 국가보훈대상자로 지정해줄 것등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광주시는 5·18묘역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97년 5월 18일에 맞춰 준공예정에 있다.

7) 종교

 

2. 경제
1) 직업 및 주업
전통적으로 공업기반이 취약하여 서비스업 위주의 3차산업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나, 평동공단과 첨단과학산업단지 조성 등 제조업 기반이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있어 2차산업의 비중이 점차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94년 취업인구는 47만 4천명으로 이중 농림, 어업 등 1차산업이 2만 9천명(6.1%), 광업·제조업 등 2차산업이 7만명(14.8%), 서비스업 등 3차산업이 37만5천명(79.1%)을 점하고 있다.

2) 1인당 생산수준
5,077,400원 (1993년 통계)

3) 경제 상태
광주는 3차 산업이 거의 80%에 달하는 소비도시이다.  이는 광주의 도시발전이 2차산업과 같은 기반산업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행정.군사.교육 기능에 의해 주도된 결과로 볼 수 있다(학생이 전체 광주시 인구의 40%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5공화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경제제일주의에서 광주를 비롯한 호남권은 소외지역으로 남게되고 이것이 광주의 젊은이들이 비생산적인 광주에 정착하기보다는 서울을 비롯한 타 대도시로 돈을 좇아 이주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4개의 주요공업단지가 있으며, 특히 1989년 착공되어 2001년까지 첨단 과학산업단지가 삼소동, 본촌동, 비아동 일대에 들어설 계획이다.
- 시 재정 : 예산 12,320억, 재정자립도 68%

3. 생활 조건
1) 생활 만족도
지역 주민의 일반적인 생활만족도는 낮은 것이 아니나 구체적인 항목으로 나누어 질문했을 경우, 즉 구체적 만족도는 이보다 낮아진다.  그리고 타지역과의 비교를 통한 평가, 즉 상대적 만족도는 훨씬 낮아진다.  이는 지역을 준거로 한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상대적 불만족도는 구직 기회, 도로 사정, 의료시설 등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며 전국 평균에 비추어 식수 사정만 양호하다고 인식하고 있고 다른 항목들은 모두 열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광주시민에 대한 시민의식조사 참조).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은 화제로 등장하는 것은 경제 문제, 자녁교육 문제의 순이며, 예상보다 정치 문제가 화제로 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2) 도시계획
광주 도시기본계획은 당초 2001년을 목표 연도로 수립 시행해 왔으나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확정과 시 현안사업의 효율적 추진을 위하여 2011년을 목표연도로 한 인구 220만명의 장기도시기본계획으로 변경 수립하였으며, 도시계획연구면적은 744.216km2로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장성, 담양, 화순, 나주군 일부지역이 편입되어있다.
주택보급율은 94년말 현재 87.2%로서 매년 증가추세에 있으며, 도로계획 총연장은 1635km로서 고속국도가 17km, 일반국도 93km, 광영시도 1525km이며 포장율은 99.6%로서 비교적 양호한 편이나 도로율은 14.8%로 저조하여 서해안시대를 개막하는 현시점에서 중추관리기능도시 기능을 더하기 위하여 제2순환도로건설 등 장·단기 도로건설사업을 추진중에 있다.

3) 도로교통
95년 1월 1일 현재 차량등록수는 19만6천대로서 1일 평균 96대씩의 증가추세에 있다.  날로 심해지는 교통체증을 완화하기 위하여 제2순환도로 건설, 지하철 건설 등을 계획해 놓고 있다.


4. 사회와 문화
1) 매스컴
신문사 6개, 방송국 7개사

2) 지역 주민의 갈등(문화적 특징)
지역주민의 지역경제 실태에 관한 인식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이다.  지역 낙후의 원인에 관하여서는 정치적 요인을 강조하며, 지역 내적 요인보다는 지역 외적 요인을 더 강조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지역경제 정책이나 발전방안에서도 중앙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며 공업시설이나 하부구조에 대한 오랜동안의 문제점 지적(시설미비가 지역낙후의 원이)이 계속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지역사회의 발전 전망에 관하여서는 약간 비관적이며, 이는 김영삼정부의 지역 격차 해소 노력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3) 사회적 정체성
지역 주민의 사회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긍심이나 자괴심(수치심)은 지역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구의 경우 인정과 의리, 자존심, 전통성 등의 항목이 우세하지만, 이 지역의 경우 정의감과 단결심, 이정 등이 자긍심의 중요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긍심의 원천으로 지역민주화의 기여를 꼽고 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에 비해 자괴감은 주로 흉악 범죄가 지역과 관련하여 거론될 때라고 응답하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며, 아울러 이와 관련된 언론의 기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된다.
실례로 광주시청에서 발행하고 있는 광주시보 4월 5일자 시보칼럼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에서 광주시민들은 80년 5·18광주 민주화항쟁을 우리나라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역사적 사건으로 민주적 자부심이 크지만 양담배 소모 1위, 교통질서 위반 사범 1위 등 그 민주주의를 위한 실천적 모습은 "민주적 자부심은 크지만 그 시민적 자각운동이 부족하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보잘 것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즉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린 5·18에 대해서는 큰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 실천적 삶에 있어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많으며 이 같은 일로 인한 자괴심이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4) 문화 축제
  광주 비엔날레
"예술의 도시이자 민주의 성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광주 광역시에는 남도예술의 전통과 민주시민정신을 바탕으로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세계속에 빛나는 "인본문화 예술도시"를 이루어 나간다는 취지아래 "광주 비엔날레"를 창설하였다(고아주를 소개하는 책자 「에스코트 광주」중).
제1회 광주 비엔날레는 <경계를 넘어라>라는 주제로 95.9.20 ~ 11.20까지 2개월관 광주중외공원 문화벨트에서 세계 58개국 660명의 작가들이 참여하여 현대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보여주었다.  광주비엔날레는 세계비엔날레 사상 처음으로 1백 60만명의 관람객을 유치하고 사상과 인종을 초월, 제3세계국가의 정치적 갈등과 시대적 아픔을 반영한 작품이 중심이 되어 국제적인 미술 축체로 당당한 위상을 정립하였으며, 광주는 세계적인 문화예술도시로 부상하였다.

  남도문화제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문화.예술행사로 매년 10월이나 11월에 각 시·군을 대표하는 민속예술경연을 가진다.  이 경연을 통하여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진도의 씻김굿, 여천의 술비소리, 함평의 농요, 광산의 고싸움 등이 발굴되었다.

  고싸움놀이
세시풍속놀이로 한해의 농사를 점치는 농정의식의 하나이다.  광산구 칠석동 마을 주민들이 매년 정월 당산제를 지낸 다음 마을 축제행사때 벌어지며 승패보다는 마을 주민들의 결속과 화합으로 크게 하나되어 일체감을 이루는데 그 의의가 있다.  마을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숫고>와 <암고>를 부딪쳐 짓누르는 것으로 승부를 낸다.  보통 암고가 이겼을 때 그 해의 풍년이 들 것으로 믿고 있다.  이 놀이는 서로가 화합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매년 11월1일 시민의 날 행사와 정월 대보름에 2회 정기공연을 가지며 시청에서 적극 후원하고 있는 행사이다.

  당산제와 별신제
광주 지역의 당산제는 광주시를 중심으로 매우 다양한 지역에서 행해졌으며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당산은 당산나무나 장승, 벅수 혹은 솟대등을 중심으로 행해지며 대학가에서 행해지는 대동제는 당산제의 한 유형이다.  1980년대말에 민속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대학가에 유행처럼 대동제와 장승을 세우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의 근원이 조선대와 전남대의 총학생회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 별첨1 : 당산제 분포도
* 별첨2 : 장승 분포도
* 별첨3 : 문화행사


5. 어린이 / 청년
1) 교육 / 학교 형태
전통 교육기관으로는 광주학교, 운암서원, 무양서원이 있었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은 1904년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개교한 수피아 여학교와 숭일학교이다.
1996년 현재 유치워 197, 초등학교 95, 중학교 66, 고등학교 55, 전문대학교 8, 대학교 7개교 등이있다.
전체 인구중 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39%에 달하여 다른 대도시 보다 학생인구가 비교적 많다.

2) 학생운동의 영향
일제 강점기인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민족운동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고 1980년 5·18은 한국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광주는 의로운 정신이 깔려있는 "의향(義鄕)"이라고 불려진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대학 학생운동은 다른 곳보다 좀더 뜨겁고 활발하다고 보여진다.
예전에는 5·18의 도화선이 되었던 전남대에서의 시위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조선시대에서 시위가 많아지고 있다.  최근 조선대 96학번인 류재을 학생이 시위도중 심장마비로 죽은 사건으로 한총련 등의 대 정부투쟁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6. 종교
1) 종교 현황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여호와의 증인, 천도교 등이 있으며 특히 마을의 집단적인 종교활동이 많다.  또한 광주는 광주신대와 호남신대가 있어서 호남권의 하나님의 종들을 키우고 있는 반면 광주카톨릭대와 호남불교대학등의 타 종교대학들도 있다.

2) 정령숭배
당산제와 별신제가 행하여지는 풍향동의 웅진마을과 청룡마을의 당산제가 대표적이다.  이밖에 광주 사직공원에서 있었던 사직단과 무등산 신사 및 무등산의 천제단 그리고 무등산 용추에서의 기우제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광주지역의 향토사학자인 박래경교수는 천제단을 "삼한시대부터 묘향산, 구월산, 무등산의 세곳에 제를 모신 것으로 알려져 잇으며, 신라때 소사(小祀) 고려조에 국제(國際) 조선조 때는 광주목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던 신령스런 장소로 삼아 수호를 빌렸던 곳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농사를 국본으로 했던 조상들은 고래로 자연숭배의 민족적 신앙관이 있어서 국가적인 재난이나 사회정치적 불안이 있을 때 그리고 가뭄 피해가 있을 때 자연신에게 비는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또한 무등산은 서석대와 입석대 그리고 규봉암의 기암괴석이 있다.  서석은 천연신전으로 이 지방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어 광주, 화순, 담양 사람들의 자연숭배적 제단이 있어 무등산을 무당산으로 일컬어지게 하기도 하였다.  또한 입석대는 이곳으로부터의 성숭배 신앙을 갖게 하였으며 이러한 성숭배는 마을의 당산제(당산나무, 벅수, 장승, 솟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천제단은 유·불·무의 개천 천신제 복합형태로, 용추단은 용놀이를 하면서 기우제 별신당산제 형태로, 사직단은 삼·현·육·각의 가락에 유교식 문묘석존제 형태로, 송암장승제는 이정, 수호신의 결합으로 기세배·혼례식·합궁·장승제 형태로 지낸 것으로 보인다.

3) 증심사(證心寺)
신라 법흥왕(서기 518년)때 고승 철감국사가 창건하였다 하나 문헌마다 달라 정확한 연대는 알수 없고 증심사는 1100년의 긴 세월을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그간 중건보수를 거듭하여 지난날 무등산중 30여 사찰 중에서도 본사의 위치에서 수호되었던 것인데 6·25를 맞으며 소실되었다.  증심사에 현존해 있는 오백 나한전은 그 건립 연대가 퍽 오래된 조선초기의 것으로 인정되는데 그간 수차 중수한 흔적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 어느 사찰 입구나 계곡의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 돌무더기가 우리의 저변에 깊숙히 깔려있는 민속신앙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밖에도 원효대사가 지은 원효사는 불교연구에 많은 자료를 갖고 있는 절로 유명하며, 약사사는 새인봉 아래쪽에 새인봉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철감국사가 증심사를 세우기 앞서 세웠다고 한다.

4) 충장사(忠將司)
충장사는 임진왜란때 익호장군으로 이름을 떨친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사당이다.  북구 금곡동 배재에 있는 이 사우는 1억3천2백만원을 들여 1975년 2월에 준공을 보았다.  무등산을 이야기할 때 충장공 김덕룡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무등산에는 그에관한 전설이 많다고 한다.  이러한 충장공에 대한 다양한 전설은 현실적인 질곡을 타개하려는 민중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조의 폐쇄된 사회에서 반역이라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임을 당한 충장공을 광주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여겼던 것이다.
이밖에도 경열사, 충민사, 포충사등의 사당등이 있으며 광주의 최대 번화가인 금남로와 충장로는 각각 정충신의 호와 김덕령의 호에서 따왔고 제봉로는 임진왜란때 의장인 고경명의 호에서 따왔다는 것을 볼 때 광주시민들이 이들의 애국충정을 자신들의 자긍심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5) 무등산
남도를 향하는 소백산맥의 진주산(眞主山)인 도립공원 무등산은 광주시의 동편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남도인의 신앙대상이 되어온 신산이다.  마한 백제시대 무돌, 무당산, 무덤산이라 불리웠고 통일신라 이후 무진악, 무악이라 했으며, 고려 한때는 서석산, 조선초기에는 무정산, 무등산이라 했으니 이는 불교적 가치 측면과 산형국이 험산 아닌 육산이요, 흩산으로 되어 둥글넓적한 등성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1,187m이며 지난날의 수많은 산사(山寺)가 있었으나 지금은 5~6개소의 사원만 남아있다.
광주인의 기질이 무등과 닮았다고 말한다.  높고 낮음이 없는 무등산은 어디서보나 어머니품처럼 넉넉하고 푸짐하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서면 기기묘묘한 돌병풍(입석, 서석, 규봉암)이 둘려쳐있는 무등산은 외유내강한 광주인 그대로다.  광주인은 문화를 사랑하고 예수를 가꾸는 '부드러운'사람들이지만 불의에는 분연히 일어선다(「내고장 의미찾기-광주」라는 책자에서).

6) 선교사 묘지
양림동은 광주의 개화기에 외국 선교사들이 기거하며 선교활동과 서양문물을 전파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교육기관과 의료활동을 통하여 광주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했다.  선교활동을 하다 제2의 고향인 광주에서 생을 마친 선교사의 묘지가 현 양림동 호남신학대학 내에 23기가 묻혀 있다.  양림산 기슭에는 1920년대에 세워진 근대 건축물인 2층 벽돌집이 위치해 있다(광주시 지방기념물 제 15호).  이 건물은 광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 주택 건물이다.

7. 기독교 상황
1) 교인수
기독교회 733개교회, 교역자 1,750명, 신도수 191,800명

2) 기독교 전래사
광주에 최초로 복음을 전파한 이는 북미 남장로회의 배유지(Eugene Bell, 1868~1925)선교사로서, 그는 오원(吳元 Clement Owen)과 함께 1904년 12월 하순에 목포로부터 광주에 들어왔다.  1905년 1월부터 기도회로 모이다가 북문안 교회를 설립하였다.  배유지 박사는 광주의 모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1908년에는 그의 사랑방에서 세명의 소녀와 한명의 소년을 가르치기 시작함으로써 수피아여고와 숭일학교를 설립하여 이 고장에 신교육의 요람을 세웠으니 그는 광주 개화의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광주 선교는 일본의 조선 침략사와 병행되었기에 일본의 침략과 압제에 반대하는 마음이 작용하여 교회부흥을 이루는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부흥하다가 1918년 봄에는 비로소 최초의 조선인 목사인 이기풍(李基豊)목사가 부임하였다. 이기풍 목사는 원래 깡패 출신으로 평양에서 Moffet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제주에서 복음을 전했고 광주 북문밖교회 시절에는 총회장을 지냈으며 순천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던중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1942년 순교하였다.
최흥종(崔興琮)은 광주 YMCA를 창설하여 기독교 청소년운동에 힘썼고, 3·1운동에 가담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으며 험난한 시베리아 선교를 자청하기도 하였고, 나환자들을 위하여 생애를 바쳤다.  최흥종목사는 이 고장이 낳은 훌륭한 인도주의적인 기독교지도자였고 사회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므로 1966년 그가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북문안교회는 3·1운동으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그들에게 교회의 땅을 빼앗기게 되자 건물을 그대로 뜯어다가 옮겨 남문밖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교회가 남문 밖으로 이전한 후에도 교회는 날로 발전되어 교인수도 많고 교인의 분포도 광주 전역에 걸쳤으므로 교

회를 분립할 필요가 생겼다.  마침 북문밖 명치정(明治町; 현 금남로)자리에 초가 여관(旅館)이 있어 이곳에 북문밖교회를 세웠으니 이는 현 중앙교회이다.
한편 북문밖교회가 분립해 나간 남문밖교회는 1922년 4월에 제주 선교사로 수고하던 김영국 목사를 청빙하여 교회 성장에 힘썼다.  그러나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금정(錦町) 본바닥에 사는 교인들은 매우 적고 전도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반하여 내(川)를 건너 양림(楊林)에 사는 교인들의 수는 많았다.  선교부가 있고 미션 학교인 수피아, 숭일학교, 이일 양성학교, 제중병원 등 기독교 기관이 많은 탓도 있겠지만 양림은 마치 광주의 예루살렘이라 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1924년 10월에 양림에 사는 교인들을 위하여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양림교회이다.
그밖에도 광주에는 1931년에 성결교회가 들어와서 이우영 목사가 명치정에 교회를 설립하였고, 구세군도 30년말에 시작되었다.  광주의 초대교회 교인들은 열렬한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기도 하였다.

 


1. High Place
1) 지리적 고지 : 무등산 (서석대, 새인봉)
2) 영  적 고지 : 무등산 일대 (입석대, 천제단, 증심사, 원효사)


2. Strongholds
1) 억압과 소외의 영
사단은 풍수지리설을 이용, 호남지역에서의 관직 등용과 각종 국가적 혜택에서 배척시키고, 아울러 이 지역을 정치적 유배지로 삼음으로써 지역적 열등감을 조장했다.  이로 인해 광주는 국가로부터 억압되고 소외되었다는 인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게 되었다.

2) 분노와 거역의 영
광주의 유명한 거리는 모두 이 지역 출신의 유명한 인물의 호를 따서 명명한 것인데, 충장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의 호로, 금남로는 정유재란때 무장 정충신의 호로, 제봉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고경명의 호로 붙여진 이름들이다.
위의 거리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주민들은 나라와 정치가 어지러울 때 이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에서 일어섰고, 또 임진왜란 당신 한반도의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있을 때 이순신 장군이 호남인들을 주축으로 왜구들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5·18은 어지러운 시국을 바로 잡아보겠다는 충정심에서 일어난 광주 시민들을 무참히 군부의 총칼로 진압함에 따라 광주 시민들에게 정치와 권력에 대한 분노와 거역의 마음을 심어주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

3) 우상숭배
  불교 : 불교는 호남 제일의 종교이다.  특히 전라도 민중들에게 불교는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사상, 종교적인 권위와 명맥을 면면히 지켜오고 있다.  (증심사, 원효사, 호남 불교 대학)
  자연 숭배 : 호남 지역은 농경지역의 특징인 문화적 발전과 더불어 공동체적 자연숭배가 발달하게 되었다.  특히 무등산은 자연 숭배적 제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신앙의 대상이 되어온 산이다.  무등산 정상의 서석 바위는 천연 신전으로, 천제단은 한반도 이남의 유일한 천제단으로 국태민안제(國泰民安祭)와 기우제(祈雨祭)등을 지냈던 곳이다.

4) 성(性) 숭배
농업 경제권인 호남의 성숭배 사상은 다양한 모습으로 호남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근대 농경 사회의 풍요를 위해서 생산력의 원천인 남아가 많이 필요했다.  이 필요는 필연적으로 성숭배 사상을 불러들여 그것을 발달시켰다.
성숭배의 대표적 예는 남, 여의 성적 특징을 닮은 조형물이나 자연석 등에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행위라 할 수 있는데, 한반도 이남의 남근석 중에서 60%정도가 호남에 집중되어 있고 무등산의 입석대가 가장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입석대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이 지역 사람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제단으로 인식되어 왔다.


3. 반대 정신
1) 억압과 소외의 영 ....... 관용과 사랑
2) 분노와 거역의 영 ....... 인내와 순종
3) 우상 숭배 (미혹의 영) ....... 진리위에 섬
4) 성 숭배 (풍요, 다산) ....... 청빈과 검소


4. 지역별 영적 상태 및 땅 밟기
1) 증심사 : 무등산 줄기의 가장 좋은 장소에 안정감을 주도록 지어놓고 그 안정된 모습을 가지고 광주 사람을 미혹, 자존심을 부추김
2) 천제단 : 돌을 쌓아 놓고 천지 숭배와 자연 숭배를 행함.
3) 입석대 : 바위의 모양이 남근을 닮았다고하여 성 숭배와 우상 숭배를 의식적으로 강조.
4) 서석대 : 불쑥 솟아오른 모습이 마치 무등산의 자좆심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임.
5) 호남신대 : 무등산과 조선대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광주를 중보할 수 잇는 장소로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
6) 선교사 묘역 : 호남신대에 영적 영향력을 끼치는 지역.
7) 월산동 로터리(윤락가) : 공개된 대로변에서 사방으로 위치.  공공연하게 공개된 모습이 특이.
8) 양동(무속촌) : 황금동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영향력을 발휘.  양동시장과 월산동 윤락가를 조정하는 느낌.
9) 충장로 :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거리.  그러나 상가에는 한산한 것으로 보아 쇼핑이 목적이 아니라, 만남을 목적으로 또는 외로움을 잊기위한 젊은이들의 몸부림으로 느껴짐.
10) 전남도청 : 5·18당시 가장 처절한 격전지였던 곳.  5·18기념행사의 절정도 이곳에서 이루어지는데, 광주시민의 한을 안고 금남로와 충장로를 마주하고 있다.
11) 조선대 : 거절과 분노, 억압의 영이 사로잡고 있는 느낌.  학생의 죽음을 운동권의 명분을 위해 볼모로 잡고 민주화 기치의 옷을 입고 있움.


5. 중보기도
1) 빛 고을 광주란 이름과 같이 하나님께서 광주를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치유하고 회복하시길 기도하자.
2) 미혹의 영으로 말미암아 광주 땅 곳곳이 우상숭배의 모습이 보인다.  거짓 종교와 무속 각족 이단의 근원인 미혹의 영이 떠나고 하나님의 진리가 임하도록 기도하자.
3) 고아주 시민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충정심)을 분노와 거역으로 사단은 왜곡시켰다.  광주시민들의 아픔이 치유되며 인내하고 순종하는 시민으로 거듭나길 기도하자.
4) 영적 공허감에서 오는 움켜쥐려는 마음은 물질 숭배로 나타난다.  이제는 광주가 더 많이 베푸는 도시가 되도록 기도하자.
5) 역사적으로 풍수 지리설로 인하여 각종 국가적 혜택과 관직 등용에서 배척되고 소외된 상처가 있다.  광주에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이 넘처나길 기도하자.

 

출처 : 전도종합/3700만명의 영혼구령카폐
글쓴이 : Moses.cane.yo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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