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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전도적 소통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소통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선포다.
복음선포는 객관적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통치)와,
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회개 요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나라는 죄 사함, 치유, 축사 등의 사건으로 경험되었다.
구약성서에서 단편적이고 간헐적으로 실체화되었던 하나님나라(하나님의 통치, 바실레이아=the reign of God)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집중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났다
. 예수의 인격 속에 화육(化肉)된 하나 나라는 낡은 세계의 재편과 변혁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듣는 이들이 이제까지 살던 삶의 방향을 급진적으로 돌이키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3장은 회개의 예를 제시한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한 벌을 옷 없는 자에게 주고, 빵 두 덩어리를 가진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한 덩이를 주라는 요청이다.
<한국 교회는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반성경적이다>
소유와 행복, 지위와 권리, 기회와 성공의 성취물(가진 것)의 반분(半分)을 요청한다.
이토록 급진적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사역 안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예수는 이 하나님나라 선포로 세상과의 소통을 개시하신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세상을 향해 의미 깊은 소통을 시도할 수 있다.
엄격하게 말하면 하나님나라는 단지 나사렛 예수의 생물학적 출생에서 시작되지 않고
가이샤라 빌립보 도상의 제자들의 신앙고백(마 16:13-16, 특히 16절)에서 탄생된다고 볼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주 예수의 삶에 대한 무한정한 모방과 추종 부담을 떠맡는 행위다.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는 신앙고백(예수를 하나님에 의하여 파견된 대리자라고 고백)에서 시작되고 실체화되기 때문이다.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의 역사를 마감하고 새 창조를 산파하고 향도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선포하면서
12지파를 대신할 12사도를 불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셨다.
이 공동체가 하나님나라의 축소판이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과 사역은 공동체 생활, 즉 사회생활을 변화시키는 사랑의 능력 안에서
낡은 ‘세상의 종말’이 도래하였음을 고지하였다. 이것이 복음전도적 소통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복음전도적 소통은 세상과 거룩한 긴장을 촉발시킨다.
나사렛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저항하는 세력들과 간단없는 갈등과 충돌을 불러일으키며
인격, 제도와 법, 정치경제, 종교 및 문화의 모든 요소에 위기를 불러일으키며
하나님나라의 도래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들을 ‘결단’으로 소환한다.
성령의 피조물로서 교회는 도래하는 자유의 나라의 전위(前衛)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나라는 아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주기도문 중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외침으로써
항상 자신을 향하여 회개를 결단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바깥 세상을 향한 복음전도적 소통은 교회 자신을 향해서는 부단한 회개 요청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자체의 회개와 갱신 없이는 어떤 교회나 그리스도인들도 바깥 세상을 향해 회개의 결단을 촉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 운동 신학의 관점에서 교회 신학을 재정돈할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종말론적인 전위로서 하나님나라 운동의 주체도 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 운동의 부정적인 객체로 전락할 불길한 중립성에 묶여 있다.
이런 복음전도적 소통이 일어나지 못하면 기독교인의 신앙표현은 주로 교회라는 건물 안에 제한된다.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들은 충무로·을지로·세종로·테헤란로 등 세상의 중심무대를 떠나
신학교로, 선교사로 목회현장으로 투신한다.
세상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독무대가 된다.
대중예술, 정치 등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투신하고 도전해 봄직한 영역이지만
복음주의적 청년들 중 이런 영역에 투신하려는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가는 일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큰 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외칠 공세적인 하나님나라 복음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상실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진실한 주 고백과 실천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악순환 때문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한복판에서 신앙생활의 중심 진지를 구축하는 데 실패하고
그 결과 기독교인들의 대세상적 소통은 무뎌지거나 쇠락하게 된다.
2. 중보자적 소통-대(對)하나님적 소통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세상을 향한 소통의 두 번째 형식은
세상의 아우성과 고통을 하나님을 향하여 쏟아내는 중보자적인 소통이다.
앞서 말했듯이,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은
세상과 원수 맺는 것이 아니며 세상과 짝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탄식과 고통에 공감하여 세상을 하나님의 복음에 대면시키는 중보자적 사역이다.
불신의 영역이긴 하지만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순도 높은 사랑과 공동체적인 연대를 실천해 주기를 기대한다.(요 13:33-34)
세상은 예수의 제자들이 발출하는 빛을 보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짠 맛을 맛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기대되고 있다.(마 5:14-16)
고대 예언자들이나 그 예언자들의 적분적(積分的) 완성자인 나사렛 예수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명령·위로·심판 그리고 결단을 촉구하는 심판과 위기를 선언하는 만큼이나
세상의 당혹과 절망, 아우성과 신음을 세상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향해 쏟아내었다.
예레미야애가의 언어, 탄식 시편의 언어, 욥기, 전도서 등은 특히 중보자적 언어로 가득 차 있다.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복에 겨워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자폐적인 게토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불안, 위기와 신음에 열려있는 공동체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불순종으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를 위하여 중보자가 일어나 하나님께 애가를 터뜨려 줄 것을 기대하신다.(겔 22:30)
기독교인과 교회는 세상을 불심판 아래 남겨두고
구름타고 유유히 대파국적 재난에 빠진 세상을 팽개치고 초월적인 구원으로 탈출하는 자들이 아니다.(속칭 '휴거' 모델)
그들은 이 불과 유황이 섞인 유리 바다같은 세상에서 수난을 당하며 어린 양의 이름을 증거하는 중보자들이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엘리야, 이사야, 아모스, 예레미야, 그리고 에스겔은 중보자였다.
기도를 통해 세상의 고통과 탄식을 하나님께 전달한 소통의 대행자들이다.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통역했을 뿐만 아니라
땅의 언어를 하늘의 언어로 통역한 사람들이다.
애가형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찬 세상 일에 관여하시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불탈 운명에 처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정의에 대한 요구를 흡수하여 하나님의 급격한 심판을 유예시키려고 했다.
적어도 완화시켜 보려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모세는 출애굽기 32-33장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전멸할 기세로 이스라엘을 돌격하시려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국제적 우주적 명성과 이름에 호소함으로써 심판을 유예시켰다.(출 32:31-34; 33:12-17)
또한 민수기 14장에서도 모세는 아주 과감하고 대담한 중보사역을 펼쳤다.(11-20절)
출애굽기 32-33장에서처럼 모세는 주 야훼의 광대한 인자하심(헤세드)와 국제적 명성을 들어 전멸의 심판을 완화시켰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중보자로 나서서 일생 동안 이스라엘을 위한 중보기도를 쉬지 않았다.(삼상 12:23)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천둥 같은 진노를 대변했으면서도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죄악을 중보했고 마침내 왕국시대를 산파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종교로 경사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극심한 가뭄과 기근을 겪고 있던 그 시대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중보하기 위하여 갈멜산의 중보제단을 쌓았다.
그의 중보사역으로 3년 6개월의 가뭄과 기근이 종식되었다.(약 5:17-18)
이사야도 민족분단과 쇠락의 시대에 태어나 갈라진 남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젠가 화해하고 연합될 날을 기대하며 메시야 시대를 예고했다.
상수리나무와 밤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를 남기듯이, 거의 민족전멸에 가까운 국난과 위기를 목도했던 이사야는
남은 자에 대한 갈망을 여러 차례 피력함으로써 그 시대의 절망적 탄식과 영적 분투를 중보했다.
심지어 그는 모압과 애굽을 위해서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과 당혹을 표하며 중보했다.
아모스는 미약한 야곱(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심하다고 하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 경감을 이끌어 냈다.
예레미야는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도 죄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하여 심판을 피할 줄 모르는
동시대인들을 인하여 시냇물처럼 눈물을 흘렸던 예언자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난민촌에 거주하면서 바벨론 포로의 절망과 탄식을 중보하며
바벨론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상적 연합과 희망 찬 미래를 예언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중보자적 소통의지의 절정에 성육신이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하나님이시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소통 가능성의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소통 가능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하나님은 공감과 체휼의 하나님이시다.
초월적 중립성을 보지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 일에 끼어드는 하나님이시다.
심판이면서도 동시에 선수로 뛰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메마른 땅에서 자란 연한 줄기 같아서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다시 돋우시는 분이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품으셔서 치유하시는 중보자다.
나사렛 예수의 치유 사역은 아픔 공감과 체휼 사역의 결과다.
신적 권능으로 쉽게 병든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력이 100% 소진되는 경험을 한 후 발생하는 동정의 능력으로 고치신 것이다.(막 5:30)
공감과 동정이 곧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는 모든 촌과 성을 두루 다니사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다.
그 치유 능력은 무리들을 보실 때
창자가 끊어지는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 찬 자비심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자들처럼 맹수에게 찢기고 뜯기는 어린 양들을 바라보는
선한 목자의 심정으로 병든 자, 죄인, 그리고 귀신 들린 자들을 대한 것이다.
그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여전히 성도들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시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내몰린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중보기도에 관여하신다.(롬 8:26)
구약 예언자들과 나사렛 예수의 중보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더욱 확장해 달라는 요구이며,
이 땅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중보였다.
세상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중보사역 때문에
정치의 절대화, 인간권력의 신화화 유혹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에 열려있는 이 세상 역사에 대하여 신본주의적 낙관주의를 가질 수 있다.
이 세상의 부조리한 질서와 권력체제 때문에 학대를 당하는 모든 억조창생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중보적 소통 사역에 기대를 건다.
교회는 주일마다 공기도 시간에 이 땅에<정치, 경제, 종교, 사회적으로> 넘치는 불의와 압제,
탐욕과 독점의 체제를 거룩하게 전복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려야 한다.
애가와 탄식으로 표현되는 이런 중보자적 소통이 활발해지면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이며 희망의 거소(居所)로 복원될 것이다.
언젠가 미국 동부의 보스톤에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경찰의 추격을 피해 예배 중인 교회당으로 뛰어들었다.
이 불경스러운 난입으로 찬양대는 찬양을 멈추고 예배 순서는 잠시 중지되었다.
도망자는 교회당을 신성한 소도(蘇塗)로 간주하여 피했건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 이 도망자를 추격하는 경찰은 그가 도망친 교회당에까지 쫓아와서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교회 본당은 총탄 자국이 선명히 찍혀버렸다.
그 상황이 종료되자 보스톤의 그 교회는
도망자와 추격자 모두의 불경스러운 행동을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성 구역까지 침범하는 세속적인 인간들의 불경을 매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본 한 다른 아프리카계 미국 목사는 다음과 같은 촌철살인의 논평을 날렸다.
“만일 교회가 세상의 거리로 뛰어들어 세상 고통을 중보하지 않는다면,
거리의 여러 쟁점들이 교회당으로 쇄도해 들어올 것이다.”
교회는 거리의 아우성을 들으시고 말을 걸어오시고 고통의 소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을 대리하여 거리의 아우성을 스스로 흡수해야 한다.
메시야는 거리에 들리는 정의의 외침을 자신 안에서 흡수함으로써
이 땅에 공평과 정의의 강물이 철철 흘러내리게 하신다.
창세기 16장에서 도망치는 여종 하갈의 울음에 응답하셨던 하나님은
모든 연약한 자들, 노예·어린이·여성·나그네들의 외침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소통과 공감, 체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과의 소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과업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불평·탄식·절망, 그리고 아우성과 신음을 하나님의 심장에 전달하는 과업이다.
하나님은 아마도 인간 메신저의 매개 없이도 인간의 아우성을 직접 듣고 체휼하실 수 있을 것이다.(출 2:21-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중보자의 중보 활동을 통해
세상에 용출하는 정의와 자비의 외침을 전달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거리와 광장에서 외치는 자였다.
그들의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외침이 아니라 쌍방적인 교감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인간으로 흘러가는 말의 흐름과 반대로
인간의 심장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심장으로 유입되는 말의 흐름을 둘 다 붙잡던 쌍방향 의사소통자들이었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세상의 고통과 아우성에 공감적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교회는 쇠락을 면치 못했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러시아 정교회가, 19세기 독일 루터파 교회가
억조창생의 한숨과 비탄·통곡이 분출하는 거리의 아우성과 소통하지 못하여 역사의 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기로에 서 있다>
고통 받는 민심과 소통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르호보암 왕은 결국 나라의 분단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중보자적 소통이 오도된 민심의 소리에 양심을 팔아넘긴 대중영합주의를 의미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의 아론은 민중의 그릇된 요구에 과잉소통하여 민족전멸의 위기를 초래했다.
그러나 교회는 두텁게 덮여진 표토를 뚫고 하나님 보좌에 직소하는 아벨의 핏소리를 들으시고
가난한 자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응답하여야 한다.
그것은 주변화된 음성과 아우성에 진지하게 응답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영합주의나 대중독재적 정치기획에 맹목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복음전도적 소통과 중보적 소통의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교회와 세상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앙적 자기 폐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향해 기본적으로 뒤틀려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스스로 알지 못하거나 아주 희미하게 알 뿐이다.
이 희미하게 아는 하나님 지식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데 난점이 발생한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복음 전도는 긴장을 유발하는 증언이나 소통으로 보인다.
우리들의 복음 전도나 하나님나라 경험에의 초청은 세상 사람들에게 놀람을 유발하고
우리들의 영적 몰입과 성령에 의한 충만함(오순절 성령강습 사건)이 경악과 놀람을 유발한다.
종교 현상으로서의 기독교회(방언)는 세상 사람들의 적대적 도발과 긴장어린 경계심을 촉발시킨다.
그런 가운데서도 기독교회의 윤리적 도덕적인 삶은 그들의 칭찬을 유발한다.
윤리·도덕적 삶을 통한 복음 입증은 세상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고부동하게 알게 한다.(디오그네투스의 편지)
그러나 이런 윤리·도덕적 선을 과시하기까지는 세상 사람들과의 세계관적인 갈등이 불가피할 때가 많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하나님 지식에 호소하되
가급적이면 그들의 언어를 통해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레오바고 광장에 선 바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성이라는 공통 토대에서 시작하여
창조주 하나님, 심판자에 대한 메시지를 갖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여기서 교회와 세상의 세 번째 소통 양식인 변증적 소통 문제가 제기된다.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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