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스크랩] 1세기 사도적 해석에서 배운다

어노인팅 2007. 12. 12. 19:47
1세기 사도적 해석에서 배운다

 

주해 (exegesis)는 항상 성경 저자의 특정 상황에 적합한 것과 영구적인 의의(abiding significance)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갈 5:6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영구적인 가르침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시대에는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AD 1세기(혹은 제 2성전 시기)의 유대주의 해석을 살펴보자:

(1) 모형론 (예. 아담 모형론, 롬 5:14; 기독교 성찬의 모형으로서의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고 마신 것, 고전 10; 예수님의 십자가-승귀의 모형으로서의 광야에서 놋뱀이 들린 것, 요 3; 기독교 세례의 모형인 노아 홍수 때의 물, 벧전 3). (2) (더 일상적인 의미에다가 숨어 있는 특별한 상징적인 의미로서의) 알레고리적 해석(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해석, 막 4:3-9, 14-20; 사라와 하갈은 두 언약임, 갈 4; 계시록의 7별은 7교회의 사자이며 7촛대는 7교회, 계 1:20).

(3) (비슷한 주제나 심지어 하나의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성경의 다른 구절을 언급하는) 표어 연결 (catch-word links, 예. 롬 4:1-12절에서 바울은 창 15:6절의 의미를 시 32:1-2절을 언급하면서 찾아서, 창 15장에 언급 안 된 의로운 아브라함이 죄를 용서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함; 갈 3장에 율법을 순종하지 않을 때 당하는 저주[신 27:26]는 바울로 하여금 다른 저주 본문인 신 21:23절로 인도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율법을 어긴 우리가 저주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함).

(4) 설교적 논증의 구조적 형태(예. yelammedenu라고 불린 전통적인 논증은 먼저 질문으로 시작하여, 적절한 본문을 율법으로부터 인용하고, 주요 단어의 의미를 이야기로 설명하고, 주요 본문 중 하나를 다시 언급함으로 논증을 맺는 방식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볼 수 있음; 바울의 논증은 주로 율법서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 선지서(가끔 지혜서)를 언급한 후, 마지막으로 그 본문의 자기 당시의 적용을 위한 pesher해석을 가하는 것임).

(5) Haggada 전설의 사용(예. 고전 10:4절에서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은 여정 내내 동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는데, 유대 문헌 Sukkah 3:11절과 유사함; 모세가 율법을 천사를 통해서 받은 것[행 7:53; 갈 3:19]은 유대고대사, 15:136절과 유사함; 유다서와 벧후는 제 1 에녹서 6-19장과 '모세의 승천기'를 사용함).

(6) 본문 안의 모호성을 이용함 (예. 마 21:5절과 요 19:24절에서 인용된 히브리어 본문들 [슥 9:9; 시 22:18]의 평행은 의도적으로 무시되고 다른 두 행동을 가리키는 인상을 줌).

(7) 다양한 본문들로부터 인용함(예. MT에서 구약을 인용하는 랍비와 쿰란공동체와는 달리 신약 저자는 주로 LXX에서 구약을 인용하는데, 행 15:16-17절에 '에돔' 대신에 '아담/인류의 회복'을 언급하는 암 9:12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MT는 '에돔'의 회복을 언급함; 히 10:5-7절은 시 40:6절을 인용하는데 '귀'라는 부분으로 '몸'이라는 전체를 가리키는 것 [totum pro parte]인지 모호하며, 그리스도 이전의 독자가 시 40:6절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예언으로 읽었을지는 의문임).

(8) 인용된 본문을 변경시킴(예. 마 2:6절에서 미 5:2절을 인용하는데, 의미를 효과적으로 바꾸는 oudamōs['결코 아니다']를 첨가함으로써 마태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도시가 아님을 설명함).

그렇다면 "문법-역사적 해석에 기초하여 가능한 객관적인 주석을 하려는 현대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주석가들은 이상에서 언급된 1세기의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해석을 수용하여 현대에도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러한 사도적 해석을 한 쪽으로 치워버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R.N. Longenecker같은 이는 우리는 사도들이 구약을 문법-역사적 주해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다룰 때에만 사도를 따라야 하며, 신적 영감으로 신약에 나타난 이러한 사도적 해석만을 수용해야지, 우리도 별난 주석 방식들(bizarre types of exegesis)을 흉내 낼 수 없다고 못 박으며, 문법적-역사적-언어적 분석을 객관적으로 행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문법-역사적 해석으로 사도들의 해석 전체를 재단해 버린다는 인상을 주며, 신약 성경이 1세기의 특별한 문제 해결에만 도움이 되는 고대 문서이며, 그 이후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말씀하는 '살아 있는 본문' (living text)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에 "사도는 사도이다"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Longenecker와는 다른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즉 사도라는 권위에 근거하여 구약을 이상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해석의 경향을 도입한 결과가 아닌가(피터 엔즈, 2006:224)? 초대 교회가 '원칙'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구약을 이해했고(눅 24:27),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석할 수 있다고 D. Juel이 주장한다(참고. 'Messianic interpretation', 1988).

또한 공동체를 변혁시킬 수 있다면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바울의 해석은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christological)이라기보다는 '교회중심적'(ecclesiocentric)이라고 주장하는 R. Hays의 주장도 중요하다(참고. 'Echoes of Scripture in the letters of Paul', 1989). 마지막으로 지금도 적실하다고 믿으며 '원래 의미, 확장된 의미, 그리고 생산적 의미'를 통합시키는 해석인 '삼위일체적'(trinitarian)해석을 주장하는 K. Vanhoozer의 주장도 주목할 만하다(참고. 'Is there a meaning in this text?' 19! 98). 이 세 명 사이의 큰 공통점은 주석이란 기술 (technique)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존이라고 본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S. Moyise의 입장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현대의 역사비평적이거나 문법적 분석의 관점에서 납득될 만한 해석 방식들만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왜 우리는 19세기의 이성주의적 해석이 사도 저술들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가? 1세기의 유대적 테크닉인 '표어 연결'과 이야기들을 제시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대체한 포스트모던의 문학적 해석방식에 기초한 간본문적 해석과 같은 신학적 해석은 1세기 사도들이 수행한 여러 설득의 방식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어떤 교부들에 의해 수행된 알레고리의 오용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더 낫고 진정한 양식의 알레고리를 거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를 반대하는 도그마(anti-allegorical dogma)가 예수님의 비유 해석을 얼마나 빈약하게 만들어 버렸는가를 아는가? '왕, 목자,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비유의 등장인물, 그리고 '씨, 포도원, 누룩'과 같은 대상들은 자연스럽게 상징적인 해석을 유발하지 않는가? 1세기 사도적 해석 방식 가운데서 공동체의 변혁을 위한 귀한 '열매'(이것을 해석의! 'key criterion'으로 볼 수 있다면)를 낼 수 있는 것은 그 변혁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만하다. (2) 설득의 고대 양식이 아니라 현대적 양식을 사용하는 성육신적 해석(incarnational hermeneutic)이 적합하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적 해석'은 자연스럽게 성육신적 해석이 되며, 따라서 특정 시대와 문화 속에서 작용하는 설득과 논증의 형식들을 채택한다. 바울의 주된 사역이 유대인의 성경으로 이방인이 다수였던 공동체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듯이, 우리의 사역은 계몽주의 이후 시대를 살면서 과학적 증거와 역사적 객관성 그리고 합리적 논증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에게 구약과 신약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성육하신 하나님이라는 초이성적인 사실을 믿는다.

하지만 합리주의에 근거한 역사비평적으로 볼 때, 관련 구절들인 사 7:14절과 시 40:6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의 한계는 더 확실한 역사적 증거나 덜 편향된 적용이 등장하면 기존의 합리적 해석은 대체되어야 한다는데 있다. 우리가 비평 이전의 해석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바울이 바리새적 해석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적 해석은 과거를 포기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과거에만 머무르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영감을 입은 사도들이 그렇게 해석했기에 우리도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극단과 사도적 해석은 1세기의 것이기에 우리와 무관하다는 극단을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밝혀서 교회를 변혁시키려는 사도들의 해석의 목적은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 할 때 사도들이 자신의 역사적 문맥을 고려했듯이, 우리도 현대의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석의의 한 측면인 객관적인 주해 방법을 사용하되, 그것을 초월하여 창조성, 직관, 대담성, 해석 작업에 대한 겸허한 사명감 등이 상호작용하도록 해야 현대인에게 더 잘 들리는 성육신적 메시지가 될 것이다

출처 : 행 복 충 전 소
글쓴이 : DaeMyu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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