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음성듣는법

[스크랩]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것들

어노인팅 2007. 3. 24. 19:09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것들

 

"제발 이런 책을 출간해서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말기를 바란다. 오늘의 우리 시대가 예언이 없어서 망하는가? 절대로 아니다. 가지고 있는 66권의 성경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고 배운 대로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언이 필요하다니 말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아예 성경을 다시 쓰겠다고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국의 N 기독출판사가 최근 번역 출판한 예언 사역에 관한 책에 대해 어느 목회자가 인터넷을 통해낸 서평이다. 

  이 견해는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입장을 잘 나타낸다. 이들은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 성경 외의 '직통 계시'라면서 반발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제일의 이유는 신학적 편견이다.

   위의 주장은 '기사와 이적은 사도시대에 끝났으며 오늘날 개신교 성경 66권인 정경(Canon)의 기록이 끝났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성경 외적인 특별 계시가 없다'는 기적 종식론자들의 전형적인 주장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성경만으로도 충분한데 성경 외적인 특별 계시가 왜 필요하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마치 성경 기록에 무엇을 더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과연 그런가? 먼저 '성경의 충분성'(the sufficiency of Scripture)에 대해 살펴보자.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다(딤후 3:15-17). 성경은 우리 신앙의 표준이며, 성경에 기록된 교리적, 윤리적, 실천적 가르침은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가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성경의 충분성은 종합적, 원칙적, 일반적 측면에서 충분하다는 것이지 우리가 일상생활이나 개별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기도하라'고 명령하며 기도의 일반적 원칙적 지침을 제공한다. 그런 원칙에 의해 우리는 가족, 이웃, 지도자, 지역, 국가를 위해 기도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 어떻게,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통해 바로 지금, 누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라 는 명령을 전달 받을 수 있다.  기도 제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어떤 기도를 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새벽에 자주 나를 깨우신 적이 있다. 잠이 한참 곤히 들어있을 새벽 2시나 3시에 깨우셨다. 그날도 몸이 상당히 지쳐있는데 나를 깨우셨다. 나는 응겁 결에 "누구를 위해 기도할까요?"라고 물었더니 "S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S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내용이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그렇다고 이런 음성이 성경 내용에 무엇을 더하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성경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어디에서 말씀을 전할 것인지에 대해서 성경은 일반적, 원칙적인 것에 대해서는 기록했지만 그 사람 개인을 향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이런 공백을 메워준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불충분한 것인가? 아니다. 국가에는 헌법이 있고 그 하위 법률, 명령, 조례 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헌법이 불충분한가? 아니다. 헌법은 종합적이고 전체적이고 중요한 사항만 정하고 나머지 세부 사항은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이 가능하다. 성경의 충분성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에 대해 반대 주장을 한 그 사람에게 반문하고 싶다. 그 사람은 교회 이름은 어떻게 정했으며, 장소는 어떻게 정하고, 예배 시간은 어떻게 정하고, 설교는 어떻게 하는가? 그런 것에 대한 자세한 규정이 성경에 있는가? 그 사람은 분명히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들이 성경의 충분성에 위배되는가?  

 

  그 다음 특별 계시에 대해 살펴보자. 전통주의자들은 아직도 '계시'라면 곧 '특별 계시'로 생각하여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같은 특별 계시가 있다고 하면 금방 완성된 66권의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기적종식론을 고수하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주장이다. 과연 이 주장이 불변의 진리인가? 불행하게도 이 주장은 잘못된 주장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웨인 그루뎀은 [신약과 오늘날의 예언의 은사]에서 절대적인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루뎀은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공적 계시(성경)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같은) 사적 계시의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는 기적 종식론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리차드 개핀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고전 14:1, 24-28, 39에 의할 때 '예언의 은사가 사도시대에 끝났다'는 개핀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그는 반박했다.  

  최근 한국의 신학 교수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례들은 대부분 특별 계시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런 것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되고 성경 자체를 통해서 듣도록 해야 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런 것을 추구하다 보면 사탄의 사탄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삼가할 것을 권면한다. 그런 음성을 들음으로 인한 유익은 하나도 모르니까 나쁜 것만 부각되어 보이는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을 듣지 못함으로 인해 신앙생활이 이성화, 형식화, 관념화, 율법주의화 되는 위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는 상상이나 해보았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직접 성경 외적인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유익한 점은 하나도 모르고 위험한 점만 보이고 그 결과 해묵은 조직신학 책에서 읽은 대로 '특별 계시는 곧 성경'이라는 잘못된 주장을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일부 개혁주의자나 장로교인들은 이런 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통적인 장로교는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마치 개혁주의와 장로교가 성경 위에 군림하는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개혁주의가 무엇이고 장로교가 무엇인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에 두는 신학이자 교파가 아닌가? 개혁된 교회는 성경의 바탕 위에서 계속 개혁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직도 해묵은 개혁신학에 매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개혁주의이자 잘못된 장로교이다. 어떤 신학이나 교파도 성경의 권위에 의해 검증되어야 한다. 과정은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변하지 않지만 그에 부수되는 신학은 계속 발전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기를 거부하는 것은 참된 개혁주의가 아니라 잘못된 기적 종식론을 옹호하는 잘못된 개혁주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와 같은 기적 종식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가 뛰어난 강해 설교가이자 존경 받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런 그가 말한 것이니 맞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존경 받고 이름난 목회자들도 가끔 설교나 강의를 통해 자기들도 잘 모르면서 어떤 영적인 현상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비판한다. 말하는 사람이나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오류인가?

   저명한 신약신학자인 D. A. 카슨은 [주석상의 오류]에서 사람들이 흔히 잘못 사용하는 '논리적 오류'(logical fallacies)를 예시했다. '논리적 오류'란 쉽게 말해서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되는 말' 즉 억지 부리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존 맥아더와 같은 사람들의 말을 믿는 논리상의 오류를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것'(simplistic appeal to authority)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안과 전문의사가 위장병에 대해 말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을 다 믿어야 할 것인가? 물론 어느 정도는 알겠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 전문 분야가 다르고 그 분야에 대해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뛰어난 설교가이고 목회자라도 자기가 방언 못하고 음성 듣기 못하면 적어도 그 분야에서는 그렇게 하는 초신자 보다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그 말에 권위가 없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직접 음성 듣기를 잘 하지 못하거나 (체험의 결핍), 음성을 듣거나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의 오류를 한 두 번 목격했기 때문에(나쁜 경우를 체험함), 존 맥아더 류의 의견에 쉽게 동조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자기들이 모르는 좋은 경우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직접 경험한 한 두 개의 나쁜 경험으로 전체를 평가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 또 한 사람 뛰어난 설교자이자 존경 받는 목회자이자 유수신학교의 학장까지 겸하고 있는 찰스 스윈돌은 [하나님의 뜻에 담긴 신비](The Mystery of God's Will)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 계시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성경 외의 계시를 낮게 평가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물론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나의 사역을 볼 때 나는 신빙할만한 그런 계시를 본 적이 없다. (무 체험의 의한 주장). 한편, 나는 진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성경 외의 계시를 의지하여 많은 문제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나쁜 몇 가지 경우를 경험함).

   그러면서 그는 잘못된 경우 한 가지를 예로 든다. '무 체험' '나쁜 몇 가지 경험'에 의한 주장은 은사 반대자들이 상투적으로 하는 주장이다. 한 때 방언에 대해서도 그들은 이런 식으로 반박했고 또 어떤 새로운 영적인 현상들이나 가르침에 대해 그렇게 반응해 왔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D. A. 카슨이 말한 '논리적 오류'에 의할 때, 이런 주장은 좋은 경우가 수없이 많은 것은 모르거나 무시하고 '제한된 몇 가지 증거에 근거하는 오류'(appeal to selective evidenc), 몇 가지 나쁜 경험을 통해 전체를 모두 나쁘게 평가하는 '근거 없는 일반화 또는 과대 진술'(unwarranted generalization or over-specification) 및 무 체험 때문에 생긴 '세계관의 혼란'(world-view confusion)의 논리적 오류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존 맥아더나 찰스 스윈돌같은 같은 사람이 아무리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워도 실제로 음성을 듣는 사람은 "내가 듣는데 자기가 무엇이라고 없다고 하느냐?"라고 반박할 것이다. 물론 제대로 듣지 못하거나 나쁜 경우를 목격한 사람은 그들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게 믿어질 것이다.

   필자는 목회자로서의 존 맥아더나 찰스 스윈돌을 존경한다. 그러나 제발 이런 주장들은 더 이상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교만과 무지를 나타내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얼마나 목회를 오래 했고―기껏해야 몇 십년 아닌가?― 얼마나 광범위한 목회 경험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2천 동안 전 세계에 걸쳐서 수십 억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모든 사람들의 케이스를 일일이 다 점검해 보았단 말인가? 어떻게 자기 개인의 제한된 경험이나 나쁜 경험 몇 가지로 하나님의 선물을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좋은 열매를 맺은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몇 가지 예를 보자.

 

  히포의 어거스틴 감독. 그는 뛰어난 지성을 가졌지만 영혼의 안식은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도 그는 영혼이 괴로워 친구가 선물로 준 성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이웃 아이의 음성 같은 것이 들려왔는데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라는 음성이 노래같이 들려왔다. 어거스틴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성경책을 폈는데 로마서 13 13절의 말씀이 눈에 확 들어왔다( 13:13-14).

  이 말씀은 너무나 자신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책망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그 체험을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 말씀은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내 속에 있던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다." 이후 어거스틴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폴리캅.속 사도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폴리캅의 순교]에 보면 그는 순교 직전 기도 중에 환상을 통해 곧 일어날 일을 보았다. 그는 베고 있던 베개에 불이 붙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곧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

 

   터툴리안. 그는 [영혼에 관한 소논문]에서 환상과 예언을 기록했다.

 

   콘스탄틴 황제. 그는 전쟁 중, 어느 날 정오에 하늘에서 십자가 방패를 보았고 거기에 "이것으로 정복하라"(Conquest by This)는 환상을 보았다. 그는 물론 군사들도 보았다. 그가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의아해 하던 중 그 날밤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셔서 똑같은 표적을 보여 주시면서 그 모양으로 만들어 모든 적에 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곧 금과 보물로 그 형상을 만들었으며 이후 A.D. 300년의 전쟁에 대승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 기초가 되었다.

   

  한경직 목사. [아름다운 빈손 한경직]에 보면 최근 소천한 한경직 목사는 숭실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 황해도 구미포에 휴양을 갔다가 혼자 해변을 거니던 중 "하나님 뜻대로 사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복을 받는다"라는 세미하고도 강권적인 음성을 들었다.

   이에 대해 이후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탬플턴상 수상 연설문(1992)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날이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평소와 같이 해변가를 걸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너무도 갑자기 저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때의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저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분명한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신의주 제2교회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 후 해방이 될 때까지 3년 간 보린원(고아원) 원장으로 생활했다. 여기에서 그는 시간을 정하고 언덕에 올라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 언덕 밑으로 삼천리 강산이 한 눈에 보이는데 흰 돌로 지은 교회당이 그 강산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떤 후 순간적으로 '일본은 틀림없이 망하고 조국은 분명히 독립한다. 독립된 조국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쳤다고 한다.

   이후 해방이 된 1949 324일 기공 예배를 드려 지은 건물이 바로 지금 서울에 있는 석조건물의 영락교회당이다.

 

   그 외에도 이런 기록이나 간증들은 무수히 많다. 더군다나 현재 미국이나 세계 각지에서 사역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한국 사람들에게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크리스천 인터내셔날의 빌 해몬 감독([선지자와 개인 예언] 시리즈), 중보기도 사역자로 이름난 신디 제이콥스([내말을 네입에 두리라]), 치유사역자인 프란시스 맥넛 박사,[놀라운 성령의 능력]과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의 저자인 잭 디어, 영국에 본부를 둔 치유사역센터인 엘렐 미니스트리의 사역자들, 모닝 스타의 릭 조이너([빛과 어둠의 영적전쟁] 등), 폴 케인과 딕 밀즈같은 예언 사역자가 출석하는 메트로교회의 마이크 빅클([예언 사역에 자라가라]), [지역 교회 최고의 사명]의 저자이자 콜로라도 스프링스 소재 뉴라이프 교회의 테드 해가드 목사,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의 저자인 더치 쉬츠 목사, 가는 길 교회의 잭 훼이포드 목사, 한인 교포 1.5세로 예언에 의해 교회를 설립하여 현재 수백 개 교회연합의 대표로 있는 체 안 목사(「성령의 불속으로」) 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교회나 사역의 현장에서 음성 듣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도자들이다.

   또한 와그너 교수가 몇 년 전 풀러신학교를 그만 두고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설립한 [와그너 리더십 신학교](Wagner Leadship Institute)에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 '예언 사역'이 정규과목으로 개설되어 있다.

  실로 앞서가는 미국이나 남의 교회에서는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예언 사역은 전도, 상담, 각종 치유사역 및 중보기도 및 말씀 공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셀 교회 사역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랄프 네어버 박사의 교재를 보면 초신자에게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을 강조하며,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예수전도단(YWAM)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강조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에 보수적인 한국의 CCC(기독교대학생선교회)에서 개최한 내적치유 세미나 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미국의 CCC 총재였던 빌 브라이트 박사는 은사 체험도 많고 상당히 은사적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의 CCC는 보수 성향이 짙은 것같다. 소개한 사람이 보수주의자니까 자기취향에 맞게 소개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CCC의 내적 치유 강사는 주로 과거의 일을 초자연적으로 알아 맞추는 '지식의 말씀'을 통해 내담자의 과거의 사실을 알아 맞추고 내담자는 환상을 통해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보고 치유 받은 간증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었다. 내담자들은 자신의 인생을 추적하는 시간 여행을 통해 태중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환상을 통해 보고 예수님을 초청하여 (이것도 환상을 통해서 본다) 실제로 치유 받은―이런 것을 내적치유에서는 '믿음으로 그림 그리기'(faith picturing)라고 부른다―간증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변호한다. 미국 [가는 길 교회]의 담임 목사인 잭 훼이포드는「미니스트리즈 투데이」(96 11·12월호) 잡지에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변호하면서 비판자들을 책망했다. (잭 훼이포드의 기사 참조).

    그는 또한 같은 잡지 2001 1·2월 호에서, 자기를 겨냥한 존 맥아더와 찰스 스윈돌의 비판을 의식한 듯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신다"(God Still Speaks)란 제목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강력하게 변호했다.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교수 출신인 잭 디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Surprised by the Voice of God)에서 성경 이신론자들(Bible deists)은 바리새인들처럼 성경 내용은 잘 알지만 정작 성경이 지향하는 하나님은 모를 수 있다면서 음성 듣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책망했다. 이신론자들이 창조의 하나님은 인정하지만 섭리의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듯이 성경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신 후 더 이상 다른 초자연적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주권적인 성령](The Sovereign Spirit)에서 사도들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사와 이적을 행하면서 사역했는데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 없다면 우리가 사도들보다 더 잘났다는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기적 종식론은 한 마디로 "헛소리" (Nonsense)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저명한 신약신학자인 고든 피는 [복음과 성령](Gospel & Spirit)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은사주의자들이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그들은 논리(신학)를 성경보다 앞세운다'고 비판했다.

   최근 필자는 어느 미국 목사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전통주의자들은 우리가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나는 반문하겠다. '그러면 당신들은 왜 무 체험을 바탕으로 성경을 해석하느냐?'"

   체험은 교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확증한다. 나의 무 체험이나 나의 제한된 나쁜 체험으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바로 교만이자 무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예언의 은사가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인가? 또한 전통주의자들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설교의 은사나 가르치는 은사로 잘못 해석한다. 예언이 사도시대에 끝났는데 성경은 '예언을 사모하라'(고전 14:1)고 하니 그렇게 견강부회(억지로 끼어 맞춤)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면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질문해 보자. 만일 예언이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라면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고전 14:29)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설교나 가르침을 분변해야 할뿐만 아니라 둘이나 셋씩 설교하거나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의 예언은 설교나 가르침이 아니다. 이는 아마 성경이 예언을 기록한 책이므로(벧전 1:20; 1:1 ), 예언의 은사는 예언인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하는 설교나 가르침으로 해석한 듯하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포함하는 예언의 은사는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는 다르다. 이는 웨인 그루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 예언과 같은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예언과 오늘날의 개인 예언과 같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예언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예언과 가르침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은사의 종류로서도 분명하게 구분한다( 12:6, 7 참조). 또한 가르치는 자는 교사이고 예언하는 자는 선지자로 구분한다(고전 12:28, 29 참조).

   물론 예언이나 가르침 모두 성령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므로 안위, 권면, 책망, 인도 등의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설교나 가르침은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진리를 전달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이나 예언은 개별적이고 구제적인 진리를 전달한다. 설교나 가르침은 통상 계획적으로 준비하여 행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즉흥성'(spontaneity)이 강하다. 누가 계획한다고 어떤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정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말씀 중심으로 생활해야 된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런 신학, 저런 신학'으로 오히려 성경의 분명한 구절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있다.  

  이처럼 '이렇고 저런 신학적 편견'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제일의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방언 하는 기도를 해 준 적이 있다. 먼저 성경에 기록된 방언의 정당성을 시인하게 하고 혹시 방언을 반대했거나 대적한 것을 회개하라고 한 후 안수했더니 금방 방언이 터져 나왔다.

   음성 듣기를 원하는가? 먼저 성경의 기록을 보고 음성 듣기를 인정하라. 그리고 난 후 음성 듣기를 반대했거나 대적한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간절하게 사모하라. 성경에서 특별히 구하라고 강권한 은사는 음성 듣기를 포함하는 예언의 은사밖에 없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예언의 은사는 위험한가? 또 어떤 사람은 위험하다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부정한다. 웨인 그루뎀 교수는 예언이 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므로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부정해야 한다면, 개신교가 인정하는 성경 66권의 정경이 완성되지 않은 초대 교회 당시에는 예언을 분변할 표준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에 예언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위험했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하나님의 음성 듣기는 마귀가 제일 두려워 하는 영적 무기 중의 하나이다. 마귀의 최대 전략은 자기의 정체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인데 음성 듣기를 통해, 마치 레이더로 적군의 동향을 낱낱이 살피듯, 그들의 정체나 궤계를 백일 하에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강력한 영적 무기의 사용을 반대하는 것은, '자동차가 위험하니 자전거 타자,' '가스가 위험하니 장작 때자'는 주장과 같다. 음성 듣기를 반대하는 주장이야 말로 마귀를 이롭게 하는 가장 위험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말썽이 많으니 금지하자. 또한 어떤 사람들은 말썽이 많고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음성 듣기를 자제하거나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라면 다른 직분이나 은사도 사용이 중지되어야 한다. 오늘날 잘못된 목사, 잘못된 장로나 직분자가 얼마나 많은가?

   정통을 내세우면서 성직매매나 교회를 통해 더러운 이를 취하고, 잘못된 가르침이나 상담으로 양 무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영성이 부족하여 양 무리를 헐벗고 굶주리게 만들고, 구원의 확신도 없는 목자가 양 무리를 구덩이로 인도하고, 금권·부정 선거로 총회장이 되고, 교회 연합이나 단체를 내세워 영적 지도자를 이단이나 사이비로 매도하고, 교회의 직분을 마치 세상의 지위인 양 착각하여 칼자루를 종횡무진으로 휘두르는 무리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해서 목사직,  장로직, 총회장직  없애자는 사람이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음성 듣기나 예언의 은사는 유익하지만 위험한 만큼―미래의 방향 설정이나 중대한 결정에 관한 사항―엄격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는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

   사실 신앙의 거성들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영계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죽하면 사도 요한도 계시의 와중 속에서 피조물인 천사를 경배했다가 두 번이나 책망을 받지 않았는가( 19:10). 

 그런데 사도 요한 보다  훨씬 못한 우리들이 한두 번 틀렸다고  용서 못할 죄인 취급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자기들은 틀리지 않고 죄짓지 않는가.

 

   기타 여러 가지 방해 요인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가르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음성 듣는 것이 훈련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선배들의 도움으로 음성 듣기도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래서 쓴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기타 사모하는 마음의 부족,  지속적으로 죄악 된 삶을 사는 것 등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방해하는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전혀 인격적, 신앙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도 정확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을 나는 많이 목격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도 있다. 여느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으로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자가 음성 듣기를 더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내가 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신앙인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또한 내가 아무리 음성을 정확하게 듣더라도 내 죄를 회개하지 않고, 부족한 것을 채워가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 내가 사랑, 겸손, 온유, 친절, 오래 참음 등의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이 되거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듣는 것 못지 않게 순종하여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음성 듣기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이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출처 : 대명교회(大名*大明*大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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